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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 - 윤태영 비서관이 전하는 노무현 대통령 이야기
윤태영 지음, 노무현재단 기획 / 책담 / 2014년 4월
평점 :
지난 주말에 시간을 내어 나는 볼테르의 서적 <캉디드>를 읽었다.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자, 우리는 오늘을 살아가면서 낙관주의자 같이 그냥 살아가는지 혹은 <캉디드>에서 등장하는 버림받은 학자인 마르틴처럼 다소 비관적인 요소가 보이는 것일까? <캉디드>라는 소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당시 프랑스 루이15세가 집권하던 때에는 다미엥이 몇 시간 동안 고문을 받으며 죽어가던 때이다. 마녀사냥이 일어나고, 더러운 매독이 여기저기 음탕함에 흘러들어가던 시기다. 도저히 현실에서 희망이란 단어 내지 긍정이란 단어를 찾을 수 없다. 그런데도 <캉디드>의 주인공인 캉디드는 낙관주의자로서 살아간다.
우리에게 낙관적인 요소를 포기하라는 말은 아니지만, 과연 현실에 대한 문제점에 대해 낙관적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오히려 캉디드와 논쟁을 하던 마르틴처럼 현실에 대한 문제점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여 거기에 대한 근본을 찾아야하기 때문이다. 철학이란 문제의 해답을 주지 않으나, 그 문제에 대한 원인이 무엇인지 답을 찾아준다. 근본적으로 무엇이 틀렸는지 알아야 이후 대책을 세울 수 있는 이정표가 올라오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故 노무현 대통령의 비서관이자 제1부속실장을 맡았던 윤태영 씨가 저술한 <기록>을 보면서 나는 <캉디드>로서 무엇을 보고 있었는가?
볼테르의 <캉디드>는 현실의 부조리를 있는 그대로의 진리이며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형이상학적인 이분법을 나누는 방법에서 그 기준이 윤리도덕적인 영역에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냥 그들이 그렇게 말하고 있으므로 거기에 부조리가 하나의 당위성을 가지게 되었다.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낙관론적인 태도를 보이는 캉디드와 달린 <기록>에서는 보이는 노무현이란 이름은 <캉디드>에서 찾아보면 그 어떤 인물에 속할 수는 없다. 단지 캉디드와 다르면서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 현실에 대한 부조리와 비판적 관찰은 놓치지 않고 받아들이고 투쟁했으나, 그런다고 미래에 대한 비관론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으려 했다는 점이다.
이에 반해 나는 아마 캉디드와 같이 논쟁을 하며 여행하던 마르틴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모든 것을 비관적으로 대하려는 내 생각이 마치 마르틴을 보는 것 같았다. 그도 그럴지도 모른다. 마르틴은 사실 볼테르를 <캉디드>란 소설에 등장시킨 하나의 등장인물이기 때문이다. 마르틴으로 보는 세상은 온갖 부조리와 모순으로 가득하였기에 마르틴은 부정적인 세상관념으로 통해 캉디드와 논쟁했던 것이다. 부정적인 비관과 긍정적인 낙관, 그 어떤 것이든 포기할 수 없을 인간의 판단력이다.
윤태영 씨의 <기록>은 볼테르의 <캉디드>로 통해 보자면, 18세기 중반의 프랑스나 혹은 21세기 초반의 한국이나 부조리와 모순으로 가득했다. 대신 캉디드는 그 곳에서 있는 그대로 맞추어 살던 무비판적 낙관론자이고, 노무현은 있는 그대로와 맨얼굴로 싸우던 비판적인 낙관론자였을 뿐이다. 어느 한 인물로 통해 보는 소설이나 혹은 수기 내지 역사는 분명히 우리에게 특이한 의미를 부여한다. 그 인물이 살던 시절에 모든 관점은 그 인물을 중심으로 보여주나, 그 인물이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사회적 흐름과 현재적 상황이란 조건이었다.
조건에 의해 그 당사자가 선택하거나 혹은 선택하도록 강요받은 상황에서 늘 인간은 희비가 엇갈리는 운명에 처한다. 윤태영이란 사람이 보는 인물, 노무현은 어떤 사람인가? <기록>이란 서적은 어떤 한 인물이 다른 인물과 만남과 이별을 기록한 책이다. 대개 어떤 인물에 대해 기록한 도서를 보면 기록하는 사람의 주관이나 입장이 매우 강렬하게 반영되는 편인데, 이 책은 오히려 그것을 최대한 배제하였기에 그 강렬함이 다가오는 것 같았다. 기록을 맡은 윤태영 씨가 당시 있었던 상황을 묘사하기보단 당시 있었던 말이나 글을 그대로 텍스트로 기록했기 때문이다.
기록이란 것은 분명 입장의 차이에 의해 갈림길이 나눌 수 있지만, 타인이 하는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 적었다는 것은 최대한 객관적인 자료가 되는 것과 같다. 그리고 그 기록은 후에 다른 사람들에 의해 평가를 받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지금도 생각하지만 정치라는 것은 참으로 난해한 이름이다. 정치를 두고 정치철학으로 들어간다면 정치라는 것은 상당히 인간에게 필요한 제도이고, 때에 따라서는 정치가 없으면 우리 사회조차 영위할 수 없을 정도로 문화적인 제도이다. 그렇지만 정치철학이란 말을 우리 사회에서는 잘 사용하지 않는다. 철학이란 이름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은 우리 사회의 모습이다.
정치라는 것은 더러운 진흙에서 몸을 서로 뒹굴며, 자신과 다른 상대편을 어떻게든 밀어내어 그 진흙탕의 주인이 되어야 하는 것이 현실의 모습이다. 진흙에서 벗어난 인물은 진흙이란 더러운 장소에 나왔지만, 문제는 진흙탕 밖에는 모두 늪과 같은 어둠이다. 인간은 권력의 맛을 보면 절대로 그곳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는 것일까? 정치가 철학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정치판은 진흙탕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다고 더럽고 치사하고 보기 싫어도 우리는 그곳에서 나올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노무현이란 인간에 대한 기록은 스스로 추방되면서까지 그곳에서 투쟁하던 어느 한 남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전에도 생각했지만, <기록>이란 책을 보면서도 노무현이란 인간을 어떤 인간과 비교하면 좋을지 다시 한 번 떠올려보았다. 이전에 게오르크 뷔히너라는 독일 연극작가가 저술한 <당통의 죽음> 그리고 그 소설을 영화로 만든 <당통>이란 작품이 있다. 노무현을 보면서 왠지 당통이란 사람을 떠오르지 않을 수가 없다. 프랑스의 자유와 평등을 위해 투쟁하던 한 혁명가가 자신의 동지이었던 로베스피에르에 의해 죽음을 받아들인 것을 말이다. 노무현이 당통처럼 보인 이유는 그의 죽음을 앞두고 같은 진영에 있던 사람들도 혹은 진보라고 불리는 이들도 버렸다.
그리고 진보라는 이름은 계속 패배해갔다. 당통 뒤에는 수많은 자코뱅당이 뒤를 따라 오지 않았던가? 왜 하필 당통이라고 나는 생각하는가? 기록에서 보듯이 노무현은 검찰이나 경찰 같은 권력조직을 활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를 비판했다. 노무현은 당통처럼 합법적으로 폭력을 행사하거나 권력을 행사하는 기구를 이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노무현이 한 번은 로베스피에르처럼 확실하게 칼을 빼는 것이 좋았겠다고 생각했다. 뭐든지 대화로서 풀어가려는 그의 노력, 하지만 그 대화의 장이 서기 위해서도 로베스피에르의 결심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늘 여론과 언론에 공격만 당하면서도, 국민이 기분을 풀기 위해 대통령인 자신을 두고 욕을 한다면 그것조차 기쁘게 받아들인다는 그 태도에서 그는 결코 로베스피에르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연설문 적고 그것을 발표할 때는 로베스피에르와 같았다. 왜 연설은 로베스피에르처럼 했어도 진짜 로베스피에르처럼 한 번은 칼을 날리지 않은 것이 큰 안타까움이었다. 자신 앞에 거대한 적을 두고는 그렇게 당당한 그의 모습에서 그에게 지지를 보낸 사람들은 많은 기대를 보냈을 것이다. 역사의 청산, 사실 지나간 세월을 잡고 다그친다고 다시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시기를 놓쳐 영원히 미래에 영향을 준다면 1분 1초라도 먼저 수술 칼로 도려내야 할 것이다. 그 도려내지 못한 상처가 아물지 못한다면 병원균에 의해 감염되어 나중에 사지를 베어내거나 목숨을 잃어야 하기 때문이다. 윤태영의 <기록>에서는 그런 모습보단 대통령의 일상적인 모습에 대해 많이 적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작은 모습에는 그의 인격이나 생각이 잘 드러나 있었다. 내가 가장 인상 깊은 정치적 판단은 누구 한 명이 없다고 해서 그 국가나 사회가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이 안 된다는 점이다.
국가나 사회는 하나의 시스템으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그 시스템만 제대로 갖추면 누구라도 다시 원활하게 유지할 수 있다는 점이다. 대통령이란 존재는 정치적으로 가장 위에 있을 사람이기도 하나, 그가 진짜 해야 할 일은 그 시스템이란 체계적인 구조에 대해 기반을 닦고 운영을 하는 것이다. 시스템에 모순이나 에러가 생기면 거기에 대해 대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정치의 핵심이란 점이다. 문제는 그 시스템이 운영되기 위해서는 현재 시점으로만 인스톨을 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기존에 운영되던 체계까지 업데이트를 해야 한다.
문제가 있는 시스템의 한 요소가 있다면 다른 시스템까지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그래서일까? 기록이 중요한 것은 그 당시 있었던 정황을 정리하여 추후에 누군가 그 문제를 풀 수 있도록 실마리를 제공하기 때문일 것이다. 처음에 <캉디드>의 이야기를 거론한 것은 당시 프랑스의 부조리와 모순을 볼테르가 자신의 소설로 통해 풍자했기에 그 동기로 인해 프랑스 혁명가들은 루소와 더불어 볼테르를 자신들의 상징으로 여겼을 것이다. 그 문제점에 원인, 그리고 그것을 정리한 기록, 혹시 자신에게도 문제가 있더라도 그것을 기록을 남기는 것이야 말로 계속 사회가 발전해가는 과정일 것이다.
우리 사회는 과거에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렇지만, 계속 민주주의라는 역사를 만들어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세상에 완벽한 민주주의란 있을 수 없다. 그 자체로서 계속 변증법적으로 후퇴와 더불어 전진만이 있을 뿐이다. 아무리 후퇴한다고 하여 비관적인 마르틴이 될 것인지 아니면 그 상황조차도 만족하고 따르는 캉디드가 되어야 할 것인지 혹은 제3의 길을 찾아야 할 것에서 볼테르는 캉디드와 마르틴의 논쟁처럼 다른 길을 바랬을지도 모른다. 노무현에 대한 평가에서 그가 모든 것을 다 잘했다는 것과 못했다는 것만을 떠나 공과 실을 나누어 볼 필요는 있다.
그런 점에서 기록이란 무척이나 소중하다. <성공과 좌절>이란 자신의 회고록이나 혹은 <여도 나 좀 도와줘>에서 보면 다른 정치인들과 달리 노무현은 자신의 유리한 점을 내세우기보단 오히려 자신이 부족한 점을 내세운다. 특히 <성공과 좌절>에서 자신이 실수한 점을 반사교면으로 삼아 후에 자신의 실수를 모델로 삼아 그 문제점을 파악하여 다른 길을 찾아가기를 바란 것이다. 그런 점에서 기록이 중요한 것이다. 사람의 기억이 컴퓨터 하드디스크처럼 반영구적으로 저장되는 것이 아니기에 언제라도 그 문제를 찾아보기 위해서는 데이터베이스로 관리할 필요가 있다.
그러지 않으면 똑같은 상황이나 비슷한 사건이 터져도 우리는 볼테르의 <캉디드>처럼 멍하게 그냥 당하기만 할 것이다. 문제는 캉디드처럼 당해도 그것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 채 그것마저도 당연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선택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선택에 의해 모든 것이 좋은 것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최선의 선택이란 지금의 상황보다 조금 더 좋게 만들거나 혹은 덜 나쁘게 만들 뿐이다. 정치에서 말하는 결정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이런 부분은 존 롤즈의 <정의론>에서 밝히고 있다. 정치가 모든 것이 정의로울 수 없다면 때로는 부정의를 택해야 할 상황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더 큰 부정의를 피하기 위해 다른 부정의를 택하는 것도 하나의 정의론적인 요소가 될 수 있다. 선택의 기로에서 어떻게든 피하고 싶은 상황이 도달하는 것은 우리의 삶 어디에나 볼 수 있다. 그런다고 선택을 포기하는 것도 선택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렇다면 지금 상황에서는 어떻게든 그 상황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기록을 남긴다면 누군가 똑같은 문제를 풀고 그 돌고 도는 미로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생각을 바꾸면 세상을 바꿀 수 있겠지만, 그 생각을 만들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모순과 부조리를 알아야 할 것이다.
분명 윤태영 씨는 故 노무현 대통령을 보좌한 비서관이었고 제1부속실장이었고, 퇴임 후에도 그의 곁에 있었던 사람이다. <기록>이란 책으로 본다면 노무현에 대하여 그가 어떻게 보고 있기보단 그와 있었던 시간을 기록하여 우리에게 제시한다. 하지만 노무현이란 인간이 처음 국회의원으로 나올 때부터 윤태영 씨는 그와 같이 있었다. 노무현이란 인간을 본다면 우리나라가 20세기 후반부터 21세기 초반까지 어떤 사회였고, 그 사회에서 노무현이란 인간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 수 있다. 그가 어떤 인간이고 어떻게 받아들이는 것은 결국 보는 사람의 관점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적어도 그가 어떤 인물인지 알기 위해서는 기록으로 통해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윤태영의 <기록>을 보면서 느낀 점은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자는 것이었다. 내가 <기록>을 다 읽으면서 노무현에 대해 말하고 싶은 것은 그는 캉디드가 아닌 캉디드이었다. 혹은 마르틴이 아닌 마르틴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