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민하는 힘
강상중 지음, 이경덕 옮김 / 사계절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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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식당에서 친구들이랑 같이 저녁을 먹는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세상이야기 흐름이 나왔다. 나 같은 경우, 약자의 편에 대해 기본적으로 어느 정도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정치적인 이익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가치관은 사람들에게 다소 이상적이라고 하더라도 본래 그것이 헌법이나 혹은 자유주의적인 철학이다. 왜냐하면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늘 가지고 다닌 프랑스혁명의 영웅이자 공포정치의 최고에 군림하던 로베스피에르조차도 인정한 부분이다. 그가 파리의 거리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강조한 부분이 있다. 자유란 자신에게만 있어야 하는 게 아니라 타인에게 있어야 그 자유의 존재가 가능하다고 말이다.

 

자유라는 것은 결국 자기의 의지에 따라 결정하는 인간의 최고의 가치이며, 진리이다. 하지만 그 자유라는 것이 개인에게 주어진 선택사항이라고 하여 타인에 대한 입장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무튼 그 친구는 나보고 노동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사람이라면서 예전이면 한국전쟁 시기에 태어났으면 공산주의자가 될 것이라고 하였다. 딱히 이데올로기적으로 이분법적인 비난보단 그런 나의 생각에 대해 말한 것이다. 나는 약자에 대한 입장에 대변하는 것이 본래 자유주의에서 시작했다고 했다. 그것은 자유주의 사상이 기본이라 했으나 친구는 아무래도 시대가 바뀌면 그렇게 된 것이 아닌가라고 했다.

 

나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으나, 실제 자유주의 철학사상으로 이미 18세기 장 자크 루소와 더불어 19세기의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 그리고 20세기에는 존 롤즈의 <정치적 자유주의> 등과 같은 사상을 일반인들이 알기란 어렵고, 책이 있다고 해도 읽지를 않으며, 읽는다고 해도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은 상당히 낮다. 미시적인 접근법에서는 나는 무지하고 어리숙하나, 거시적인 구조와 고찰에서 나는 친구들보다 밝다. 자기 앞날조차 제대로 감지하기 어려운 입장에서 큰 구조를 본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생각해보면 많은 학자들이 그렇지 않은가 싶다. 자신의 입장에서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 겪던 사람들이 결국 큰 이름을 날리는 경우가 많다. 그런다고 하여 내가 그런 사람들과 같이 비교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은 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이야 말로 오히려 자신이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을 절실하게 인정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나 같은 경우 어떤가? 그렇게 사는 것이 재미없다고 여긴다. 늘 같은 일상과 생활, 대한민국 소시민으로 태어나 그렇게 살아가는 나로서는 일확천금의 기회조차도 없다. 게다가 나는 로또복권과 같은 행운도 기대하지도 않는다.

 

현실에 낙관적인 기대나 희망도 그다지 가지지 않고, 그런다고 현실에 대해 뭔가 할 수 있다는 의지나 추진력이 없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정말 무기력하고 지루하며 비관적인 관념에 쌓여 있을지도 모른다. 실제 다소 그런 무기력한 일상에 대해 지쳐있으며, 비관적인 관념이 내 의식을 자리 잡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그런 것이 꼭 나쁜가라는 생각에 현실적으로 많은 사람들 사이에 있어서는 분명 좋지 못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나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더 좋지 못하고 나쁜 것이라고 여긴다.

 

르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에서 나는 생각하는 것에서 과연 나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라고 의문을 던지면 인간은 자아에 대해 들어가고, 자아에 대해 들어가면 그 자아에 대한 형성의 주변을 보기 시작한다. 즉 인식과 존재에 대해 각인하면서 인간은 본인만 아니라 타인, 그리고 타인들이 사는 사회와 그 사회가 존재하는 국가와 인류를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이 생각하는 것과 존재하는 것에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고 그것에 대해 어떤 식으로 살아가야 하는가?

 

강상중의 <고민하는 힘>이란 책은 바로 이런 의문을 던지는 책이다. 이 책에서는 다른 책과 달리 매우 경험적인 저자의 본인을 통해 현실의 모순과 그늘 그리고 그것을 보는 눈에 대한 성찰을 보여준다. 예전에 가라타니 고진이란 일본 문화비평가의 책을 읽을 적이 있었다. 그 중에 하나가 <근대문학의 종언>이었다. 읽은 시기에는 상당히 어려웠고, 단순히 문학을 떠나 하나의 사회와 정치 그리고 철학적인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때 내가 처음으로 알게 된 인물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나쓰메 소세키였다.

 

지금 일본의 천엔 지폐의 얼굴이 새겨진 인물이나, 일본만이 아니라 세계적인 것을 생각하면 나쓰메 소세키는 만엔보다 높은 가치를 인물이라고 생각된다. 그의 서적을 읽는 순간 지식인이 가지는 세상에 대한 인식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의 저서를 읽어보면 일본이 러일전쟁 전부터 하여 1916년 사망 전까지 많은 저술을 남긴다. 그의 저서에 담긴 근대문학에서 무엇을 말하는가? 생각해보면 나쓰메 소세키는 근대문학이라고 해도 근대문학 치고 조금 다른 감이 있다.

 

그의 서적에는 근대라는 것에 대해 같이 조류를 타는 것에 긍정적인 요소보단 오히려 부정적인 요소가 강했다. 특히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와 같은 경우, 작품 소재가 러일전쟁 이후에 나온 것이고, 러일전쟁에 대한 승리로 모두가 들뜬 상태인 반면, 작품 내의 주인공은 오히려 그것에 대해 무관하고,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장병을 위한 모금활동에 대해 냉소적인 반응을 보인다. 러일전쟁의 승패보다 더 중요한 것이 나쓰메 소세키의 눈으로 본 것이다. 바로 근대라는 것은 거대한 서사 즉, 인간이 인간 본인에 대한 가치보단 국가와 사회라는 하나의 거대한 틀에 맞추어 가는 것이다.

 

일본 근대문명이 결국 군국주의의 길로 열렸고, 메이지유신은 에도시대의 도쿠가와 정부를 천황중심의 군사국가로 변모했다. 기술의 발달과 세계의 흐름에 인간이 거슬러 갈 수 없어 거기에 억지로 흘러가는 소시민의 모습에 나쓰메 소시키는 오히려 그런 모습이 좋지 않다고 본 것이다. 그런다고 에도시대나 혹은 이전시대를 좋다고만 볼 수는 없다. 하지만, 그의 소설에서 자본주의라는 근대화적인 경제체계가 들어오면서 인간의 정신세계가 점점 가라앉는다고 본 것이다. 문명이란 과연 인간에게 좋은 방향을 준 것인가? 아니면 오히려 인간을 더 망치는 것이 아닌가?

 

물론 이런 사고는 18세기 장 자크 루소가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나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발견한 것처럼 근대문명이 결코 인간에게 좋지 아니한 것을 안 것이다. <고민하는 힘>의 강상중 씨의 생각대로 그도 느끼는 것이 바로 인간의 근대화와 더불어 인간이 가진 벽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관념이 결국 인간을 소외와 좌절로 이끄는 것을 말한다. 인간은 결국 하나의 도구이고, 자신의 존재에 대한 안정성을 위해 낯선 이방인을 외면하고 차별하는 것인가? 강상중 씨는 일단 한국인이었으나 한국에서 사는 한국인이 아니라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란 재일교포였다. 어린 시절에는 일본에서 조선인이라고 멸시받고, 한국에서는 일본에서 왔다고 낯선 눈으로 보는 것도 모자라 차별당할 수 있다.

 

그것도 어려운 경제여건으로 가난이라는 고통도 짊어지고 살았을 것이다. 차별과 가난 그것이 지닌 강상중 씨에게 다가온 문학가와 사상가가 바로 나쓰메 소세키와 막스 베버이다. 나쓰메 소세키는 문학가 겸 문학비평가였고, 막스 베버는 경제학자다. 개인적으로 막스 베버에 대해 읽어본 적은 없고,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란 도서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가 본 자본주의정신이란 무엇인가? 자본주의와 관련하여 경제학의 아버지인 애덤 스미스는 영국의 경제학자가 아니라 도덕철학자였다.

 

그의 유명한 경제학의 성서라고 볼 수 있는 <국부론>에서 애덤 스미는 시장경제에 대해 논하기를 “그 누구에게도 방해를 받지 않는 자유로운 경쟁이 부를 만들고 풍요로운 사회를 실현할 수 있으며, 설사 경쟁이 있다고 해도 사람들 속에 도덕과 윤리가 존재하는 한, 이른바 ‘신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해서 불평등과 불균형은 생기지 않는다.”고 했다. 이에 반해 막스 베버는 “마지막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이 진리가 될 것이다. 영혼이 없는 전문가, 마음이 없는 향락인, 이들은 인간성이 과거에 도달하지 못했던 단계에 이미 올랐다고 스스로 자화자찬할 것이다.”

 

<고민하는 힘>에서 스스로 자화자찬하는 그들은 바로 생각이 없는 사람들이다. 즉 인간의 이성보단 동물적인 욕심이 합리적인 이성이 되어버린 존재를 두고 말한다. 생각하면 논리에 의해 작동되는 이성은 다소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논리라는 것은 자기의 손익득실관계에서 명확히 자기중심적인 형태로 이어지고, 인간의 무의식에 자리 잡은 이기심이 만일 그 논리와 부합될 경우 인간이 주어진 논리란 자기합리화 시키는 수단에 불과할 뿐이다. 가령 힘이 있는 자가 약자에 대해 부당한 행위를 하여 사익을 챙겨도 그것은 하나의 논리로 이어지는 합리성으로 이루어진 절차라는 것이다.

 

따라서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본래 중세후기의 유럽에서는 근검절약이었지만, 그게 처음에는 자신에 대한 근검절약정신이었으나, 추후에는 타인에게 전가되어 공장의 근로자에게 전개된다. 그런 정신은 타인에게 병들게 하여 처음에 육체가 다음으로 정신이 파괴된다. 남을 생각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근검절약은 타인에게 강제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옳은가? 물론 타인에 대한 근검절약과 달리 자신에겐 온갖 보석과 고급 의상과 향수로 도배로 한다. 이런 점을 많은 책에서 지적한다.

 

18세기 프랑스대혁명과 영국 산업혁명 이전에는 계급사회가 확연히 존재했다. 그것은 아무리 재산이 많아도 계급이 귀족이나 왕족, 성직자라는 신분이 되지 못하면 그런 상징적인 요건을 가질 수 없었다. 물론 전혀 그렇지 않은 것은 아니나, 많은 제약과 통제가 따랐다. 그런데 이제 계급이 평균화되었다고 하면 계급을 정하는 것은 바로 재물의 차이다. 그래서 갖은 사치가 이루어지고, 그 사치로 인해 피해를 입는 사람들이 증가했다. 나쓰메 소세키의 책에서도 그런 내용은 등장하고, 그런 그들이 누리는 교양이나 품격을 우습게 보는 모습이 나온다.

 

인간의 정신에 대한 끊임없는 노력과 탐구가 아닌 단순히 몸으로 둘러댄 모습에서 가식과 허위의 모습이 보인다. 어떻게 보면 근대라는 공간은 인간에게 개인의 사유와 표현 그리고 의사에 대한 자유와 권리가 보장되기 시작했다. 정작 그런 것이 필요하다고 여겨도 사람들은 어떻게 활용해야할지를 몰랐다. 그렇다면 정말 필요한 것보다는 그것을 대체하는 다른 기준점이 필요했다. 과거에 누리지 못한 것을 누리고 싶다는 욕망과 더불어 그것을 누리는 자에 대한 욕망이 인간 스스로를 더욱 고립시킨 것이다.

 

그래서 그런 세계에 대해 강상중 씨가 잘 보는 이유는 그는 예초부터 이방인이었고, 외부에 있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놓인 세계가 다른 이들과 놓인 세계와 전혀 다른 세계이기에 그렇기 때문에 사회라는 거대한 구조를 자신의 눈으로 볼 수 있었다. 사람이 거기에 속한 세계에 있으면 그 세계에 대한 문제와 진실을 알아내지 못한다. 그저 돌고 돌아가는 다람쥐 쳇 바퀴처럼 뛰어갈 뿐이다. 하지만 그런 세계를 알아내고 본다는 것은 재미없고 괴로운 일이 될 것이다. 다른 이들이 알지 못한 것을 혼자만 알고, 뭔가 아니지만 그대로 흘러가는 모습을 말이다.

 

특히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을 읽으면 강상중 씨의 말대로 근대일본시대의 사람이나 현대에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생각하면 매우 친근하고 전혀 남의 일이 아닌 이야기로 다가온다.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은 오히려 근대인보단 현대인에 더 어울리는 책인 것 같다. 하지만 그의 저서가 근대문학이고,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처럼 나쓰메 소세키의 사상은 거대한 것이 흘러가는 게 좋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좋지 않은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현실에 그냥 지나쳐 가는 게 좋지 않은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처음에 돌아가 내 친구와 저녁 먹을 때 나눈 대화에서 나는 이 책에 대해 어떻게 보는 것인가? 남들에게 딱히 내가 가진 생각을 강조할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계속 그런 생각을 그만두지 않는 것은 살아있다는 것이 무엇인가이다. 나라는 사람이 느끼는 무기력과 비관적 관념이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한 점이다. 막스 베버나 나쓰메 소세키나 혹은 그들을 좋아하는 강상중 씨는 분명 이런 세계에 대한 문제에 대해 염증을 느끼거나 불편함을 느꼈을 것이다. 말년의 나쓰메 소세키는 위궤양으로 죽고, 막스 베버는 폐렴으로 죽는다. 둘 다 60살도 채우지 못한 것에서 말이다.

 

지나친 스트레스와 우울증, 그리고 말년의 힘든 고통 속의 죽음, 그들의 인생에서 재미는 있을까 라고 생각하지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자신에 대해 자아성찰과 반성에서 그런 것조차 없는 것이 허무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쾌락과 향락도 좋은 재미는 분명하다. 인간은 즐거운 것을 좋아하니 말이다. 그런다고 우리가 살아가는 이 현실을 모른 채 그저 그냥 살아가는 능숙한 모습에 우리는 진지하게 인생을 임하는 것일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고민하는 힘>에서 강상중 씨는 청춘에 대해 말한다. 청춘은 좋은 말이나, 그것은 정말 나이에 대한 생물학적 수치인가? 아니면 생물학적인 조건을 넘어 자신의 존재에 대한 새로운 발견인가? 그것을 결정은 자기 자신이나, 적어도 그런 계기라도 필요한 게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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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2-10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꼼꼼한 리뷰에 핵심을 찌르는 요약이 있군요. 이런 리뷰를 좀 사람들이 많이 읽어야 할 터인데
일단 길면 안 읽더라고요...

만화애니비평 2014-02-10 17:47   좋아요 0 | URL
괜찮습니다. 곰곰발님이 알아주시면 그것으로 만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