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레이] 설국열차
CJ 엔터테인먼트 / 2014년 3월
평점 :
품절


<설국열차>를 보면서 생각한 점은 어느 정도 사전에 내가 판단하던 내용이 들어맞은 것과 그 이상의 내용이 있다는 것을 알고 또 다른 내용이 있었다는 점을 확인했다. <설국열차>에서 제일 중요한 갈등 요소는 바로 계급적 요소로 생각하는 것보다 그 계급이 구성된 원인에 대한 고찰이었다. 시놉시스부터 차량의 제일 뒤편에 탑승하는 승객들이 섭취하는 음식은 재료가 알 수 없는 것으로 만든 단백질 블록이다. 인간의 식량 문제에서 단백질이 중요한 이유는 인간의 성장과 더불어 인간의 생체조직을 이루기 때문이다.

 

 

단백질의 영양소는 다른 영양소인 지방과 탄수화물처럼 유산소 운동으로 통해 에너지를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적으로 에너지를 발산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인간이 단백질을 섭취하는 것은 당장의 생존문제가 달려있으며, 인간 번식에 필요한 정자 및 난자와 같은 생식활동도 단백질의 보충이 필수적이다. 그런 단백질이 <설국열차>에서는 매우 중요한 소재가 된다. 왜냐하면 영화 후반부에 가면 34세의 커티스의 17세의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이다. 인류의 오만함과 어리석은 환경오염으로 인해 생태계의 균형을 파괴했다.

 

 

그리고 설국열차가 등장한 원인은 바로 윌포드가 만든 유람열차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생존이 불가하기 때문에 존재한 것이다. 이때 설국열차는 이미 탑승하고 있던 승객이 있는 반면 탑승하지 않은 승객이 있다는 점이다. 빙하기가 찾아온 후에 열차 밖에 있던 사람들은 살아있는 되기 위해 설국열차에 탑승해야 했다. 승객정원은 천 명 정도, 이 많은 인구들을 통제해야 한다는 점은 분명히 살아남기 위한 숙제이다. 

  

왜냐하면 정해지지 않은 승객이 탑승할 때 이미 탑승한 승객들과 그 승객의 부하들이 뒤늦게 탑승한 승객들의 짐을 모조리 빼앗았고, 식량이 부족한 사태에서 뒤늦게 탑승한 승객들은 생존이 걸린 문제가 있었다. 모든 것을 빼앗겼으니 식량이 존재할 리가 없다. 이때 사람들은 서로를 잡아먹기 시작했다. 인간이 인간을 잡아먹는 원인은 최후의 인간으로서 모습을 상실할 때가 가능하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식량이나 재원을 공급받을 수 있는 정상적인 세계에서 그런 비난을 듣지, 비정상적 상황에서는 인간을 사로잡아먹는다는 것은 이미 문화인류학적인 연구에서도 들어난 사실이다.

 

 

영화를 보면서 생각나는 도서는 마빈 해리스의 <식인과 제왕>이었다. 문화인류학에서 문화유물론은 자연환경적인 하부구조가 문화적 구조를 만들기 때문에 설국열차에 탑승한 불청객들은 밀림 속의 원시부족이 아니나, 그들이 되어야 했다. 원시민족 내지 혹은 원시부족이 아니더라도 남미의 아즈텍문명의 식인문화는 바로 단백질의 관건이었다. 커티스가 17세가 될 때 어느 산모를 죽였고, 그 산모의 아이를 먹으려고 했을 때 길리엄의 희생으로 그 아이는 살아남았다. 그리고 그 아이는 커티스를 위해서라면 모든 걸 바칠 수 있는 에드가였다.

 

 

커티스는 인간이 인간을 잡아먹어야 연명이 가능한 지옥과 같은 시기를 견딘 사람이었다. 그리고 길리엄을 비롯한 원로들은 팔이나 다리 일부 없는 이유도 바로 그 당시 아비규환과 같은 식인의 향연을 막아내기 위해서다. 결국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아가기 위한 자기희생이란 숭고함과 더불어 불청객 탑승 1달 뒤에 단백질 블록이 난민들에게 공급된다. 그 덕분에 난민들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고, 탑승객들 중 일부는 2세를 생산하여 인류를 영속하려 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아이들에 대해 윌포드는 억지로 인구수를 점호하여 아이들 몇 명을 억지로 데리고 간다. 이들의 생사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윌포드는 인구통제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었고, 커티스가 윌포드를 만났을 대 윌포드로부터 설국열차의 비밀을 듣는 순간 그에게 납득 당한다. 이것은 설국열차는 지구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의 인류라는 공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설국열차 이외에는 그 어떤 인간이 살아남을 수가 없었다. 새해가 다가오면서 유치원에서 7인의 도주자에 대한 내용을 복습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들은 설국열차에서 내려 땅을 밟자말자 얼마 되지 않아 모두 얼어 죽고 만다. 결국 설국열차가 아니면 그 어떤 인류는 추위와 배고픔으로부터 보호받을 수가 없었다.

 

 

문제는 설국열차 시스템은 모든 것이 자급자족이 가능한 시스템이었다. 달리는 열차는 영구적으로 달릴 수 있는 영구적인 엔진을 가지고 있었고, 열차 내부에는 물을 만드는 시설, 생선을 키우는 수족관, 고기를 저장할 수 있거나 또는 채소를 키울 수 있는 정원이 존재했다. 결국 승객들에게 자급자족이 가능한 시스템을 구비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게다가 교육기관을 비롯하여 여가 및 오락 등과 같은 여러 문화시설도 구비하고 있었다. 이들은 선택된 인간이기보단 처음부터 승객인 것이다.

   

  

그러나 장 자크 루소의 <인간 불평등기원론>에서 인간의 불평등은 2가지로 나오는데, 그것은 선천적인 것과 후천적인 것이 존재한다. 그러나 설국열차의 불평등은 분명 후천적인 것으로 시작(그것은 빙하기가 올 때 미리 탑승한 승객과 그렇지 못한 승객)하여 선천적으로 구분 짓게 만들었다. 그것은 열차의 어느 장소에서 태어났다는 조건만으로 모든 것이 결정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런 불평등에 대해 커티스는 불만을 느끼고 혁명을 일으켰으며, 그것의 결론은 결국 생존을 위해서라는 것이다.

 

 

열차가 아무리 1년 365일 하루 24시간을 달려도 물을 정수할 수 있는 능력이 정해져 있다는 점과 식량이 될 식물과 동물 역시 종족 번식 및 성장에 어느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결국 이 모든 식량이 모든 기차 안의 사람들에게 열람이 되었다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모두 공멸하지 않은가? 결국 인구조절은 필수불가결이고, 윌포드는 마지막까지 자기에게 찾아온 커티스에게 열차의 주인이 되어달라는 부탁을 한다. 앞으로 자기 수명이 다하면 그 자리를 커티스에게 이양할 계획이었다.

 

 

커티스는 처음에는 윌포드의 제안에 긍정하게 된다. 왜냐하면 설국열차는 사회구조적인 요소로 보면 식량과 재원이 정해져 있는 밀림과 별반 차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고의로 윌포드가 커티스에게 메모를 전해주는 이유는 인구조절을 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7인의 탈주자와 4년 전의 반란 역시 윌포드가 계획한 내용이었다. 누군가 꾸준히 선동하여 분쟁 내지 투쟁이 일어나지 않으면 결국 식량부족에 모두 공멸하기 때문이다. 그런다고 하여 불청객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앞 칸에 승객들도 계속 늘어나면 그만큼 인구통제의 영역은 불청객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설국열차는 계급체계가 분명하지만, 자본주의 사회구조와 전혀 다른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사회구조는 화폐가 존재해야 하며, 이익과 이윤을 추구해야 하나 그 추구할 수 있는 수단적 요건이 없었다. 식량도 윌포드의 부하가 임명한 사람이 직접 만드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생각해보면 19세기 독일수상인 비스마르크가 독일통일을 이끌던 국가사회주의체계에 근접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권력을 지닌 윌포드는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여 인구통제를 끊임없이 시도한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구조가 아니고 대신 문화유물론적으로 밀림의 세계이기에 커티스는 윌포드의 사상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열차가 멈추는 순간 인류는 모두 멸망할 것이고, 지나치게 많은 인간들에게 공급할 식량과 물조차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설날 기념으로 인구조절인원에서 74% + 18인은 설국열차 최하층 인간에게 부당하나, 설국열차라는 생태계에서는 필요한 수단이었다. 그래서 마빈 해리스의 <식인과 제왕>에서 제시된 생태 환경적 조건이 자연계가 아니라 문화 생태적으로 인간의 세계에서 통하는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문제가 조금 있었다. 열차에 대해 완벽성을 추구한 윌포드였으나, 열차 역시 영구적으로 돌아가기 위해 엔진이 영구적인 관리가 필요했다.

 

 

단지 그 관리요소에서 기계부품의 교체만 이루어지면 되나, 사실은 그렇지 아니했다. 설국열차 초반에 소년 2명이 억지로 통제요원에게 잡혀가는 모습이 나오는데, 그 원인은 바로 열차 엔진의 기능을 유지해줄 부품이 필요했다. 빙하기로 인해 지구문명은 더 이상 만들 수가 없었다. 문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연에 대하여 인간의 노동을 투입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의 노동력이 존재하더라도 그 노동을 할 수 있는 생산수단이 없다는 점이다. 공장은 이용할 수 없을 정도로 눈에 파묻히고, 시설물들은 동파되거나 눈사태로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다. 노동을 투입할 수 없어서 부품을 얻을 수 없기에 윌포드는 결국 5세 미만의 아이들을 하여금 열차의 정비를 하도록 한다.

 

 

워낙 기계가 미세하고 예민하기에 작은 몸을 가진 아이가 아니면 들어갈 수 없는 좁은 공간은 마치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에서 어린아이에게 장시간의 노동을 강요하고 착취하는 공장주가 생각나게 만들었다. 결국 자본주의 사회구조는 아니나, 인간의 노동력을 착취하지 않고 열차 그 자체가 생태계라고 하던 윌포드는 거짓말을 하게 된 것이다. 그것을 확인한 커티스는 혁명의 중단에서 다시 혁명의 재장전으로 이어지고, 열차의 엔진은 멈추고 모든 열차 안의 사람들은 죽고 만다. 

 

 

오로지 살아남은 사람은 흑인소년 1명과 남궁 민수의 딸인 요나, 서구적인 시각에서 보면 참으로 거북할지도 모를 요소다. 왜냐하면 백인남성중심이 서구사회와 게다가 그 열차의 주인은 백인남성이 윌포드다. 자본가였던 그가 그 생태계의 정점에 있었고, 그의 사상은 결국 틀렸다는 것이 증명되어 그것을 부정해야할 새로운 가치가 필요했다. 마지막에 살아남은 2명의 어린 소년과 성숙한 소녀에서 인류는 이 2명만 존재했다.

 

새로운 인류의 기원이 되어야 할 사람이 동양여성과 흑인남성이란 점은 아마 미국 헐리웃 영화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결말이다. 설국열차에서 그런 기존 가치관의 붕괴는 이미 작품 초반부터 나와 있다. 지구온난화의 문제를 걱정하여 많은 나라에서 오존층이 형성되어 있는 성층권에 새로 개발한 가스를 살포했기 때문이다. 인류가 문명화에 따른 환경오염은 인간 스스로 자신이 살아갈 터전을 파괴했다는 변증법적인 문제를 보여준다. 인간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것이 오히려 인간의 생존조차 위협한 것이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욕망하기 위해서는 그 인간 그 자체에 대한 실존적인 존재가 필요하다.

 

 

자신의 실존 없이 결코 인간은 욕망할 수 없다. 욕망의 주체가 사라진다는 것만으로 인간은 욕망을 누리기 위해 생존을 누려야 한다. 생존하게 되면서 그 자신에 대하여 순간적인 욕망은 생기기 때문이다. 그런 생존에 대해 투쟁의식에서 남궁 민수는 새로운 대안을 찾아가는 사람이었다. 그는 보안설계 전문가였으나, 한편으로 지구환경 시스템에 대해 꾸준히 고찰하고 연구하고 있었다. 같은 궤도를 18번을 돌아가는 열차 안에서 추락한 비행기를 보면서 처음에 후미만 보이고, 그 다음에 동체부위가 보인다면 다음에는 분명 비행기 전방도 보일 것이란 점이다.

 

 

인류의 어리석은 빙하기가 자연 스스로 해빙기를 맞이하는 점이고, 지구 지표면을 감싸는 얼음이 녹게 될 정도면 인간은 얼어 죽지 않고 얼마든지 2다리로 생존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남궁 민수가 그렇게 Kronol을 원한 이유는 그것이 환각물질이란 점도 있어나, 한편으로 강력한 인화물질이란 점이다. Kronol이란 물질이 실존하지 않더라도 nol이란 단어가 후미에 들어가면 메탄올, 에탄올, 프로판올과 같은 탄화수소 결합물질인 알코올을 의미한다. 알코올의 경우 인간에게 환각작용을 일으키기도 하고, 때에 따라서는 마취제로 사용된다.

 

 

실험실에서 사용되는 알코올램프 역시 탄화수소가 강력한 인화력을 이용하여 만든 것이다. 그것을 이용하여 설국열차 출입문을 부수고 나가려는 남궁 민수는 인류의 생존에서 대안지점은 설국열차의 생태계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해빙기를 맞이하는 지구환경시스템에 맞추는 것이다. 설국열차의 인구통제는 결국 열차 내에서 생기는 에너지의 한계성이다. 그 에너지는 달리는 열차의 동력이다. 동력의 한계와 더불어 그 동력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어린 아이들의 노동착취라는 이율배반 속에서 인간 스스로 살아가는 것이 비로소 속박에서 해방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작품의 연출적인 요소에서 운 좋게도 2013년 BICOF(부천국제만화축제) 행사에서 <설국열차> 영화제작자인 봉준호 감독을 비롯하여 만화원작가인 쟝-마르크 로셰트(그림)와 뱅자맹 르그랑(글)을 초빙하여 대담을 본 것이다. 영화연출에서 개인적으로 인상이 남는 부분은 커티스가 사람들을 이끌고 정수시설이 있는 곳에 갈 때 윌포드의 부하와 목숨을 건 싸움이었다. 도끼를 들고 있던 경비대는 혁명을 일으킨 사람들을 보자 생선 한 마리에 도끼로 배를 가르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서 물러나지 않으면 바로 죽을 수 있다는 경고를 말이다.

 

 

그리고 그 경고를 뒤로 한 채 결투를 벌이는 장면에서 커티스를 중심으로 클로즈업이 되어 슬로우 모션으로 찍히는 장면은 생사를 넘어 자신의 실존적 가치를 찾는 그의 여정이 보인다. 자신의 살인과 식인에 대한 죄책감으로 속박된 커티스에게 유일한 그 해방구는 설국열차의 엔진을 점령하는 것이다. 그런 여정에서 그의 격렬한 싸움과 그것을 본 경비대가 터널에 들어갈 때 모든 조명을 끄고, 적외선 스코프로 혁명을 일으킨 사람들을 무참하게 도살할 때이다. 그 후에 인류에게 최고의 선물과 최악의 재앙을 준 프로메테우스의 선물 불이 도착하자 커티스는 그 위기를 벗어날 수 있다.

 

 

문명의 발전은 불의 발견에서 시작될 수 있는 것처럼 투쟁에서도 문명의 우세(총, 도끼, 적외선 스코프와 같은 도구)를 가진 경비대에게 역시 문명적 조건(횃불)은 어쩔 수 없는 것일까? 인류 스스로 멸망은 문명에 의해 시작하고, 그 문명에 의해 인류는 초라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런 문명의 소재적인 요건에서 카메라의 클로즈업, 슬로모션, 적외선 촬영은 인간의 투쟁의 긴박함을 제시해준다. 조금 아쉬운 부분인 점은 요나의 선지능력이다. 왜냐하면 몽타주적인 요소에서 요나의 능력으로 인해 제거되어야 했다. 가령 문 앞에 도끼부대가 있다면 문을 열려고 하는 커티스 일행과 도끼를 들고 커티스 일행을 노리는 부대들의 모습을 각각으로 비춘다면 격렬한 싸움이 되거나 혹은 엄청난 위기가 된다는 점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문을 열면 안 된다는 요나의 대사와 도끼를 들고 생선의 배를 가르는 장면은 몽타주적인 요소를 배제한 미쟝센적인 요소에 치중했다. 좁은 공간이란 열차 속에서 공간적 상황과 어두운 화면, 좁은 통로 등과 같은 요소는 분명 커터스의 위기를 강조하기 좋은 장면이었다. 또한 지배계급이 운영하는 유치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의 경우도 좋은 표현이다. 피아노를 치면서 노래하는 장면은 워킹 인사이드로 통해 윌포드야 말로 자신들의 구세주라는 표현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카메라의 급박한 회전 내지 빠른 전환, 또는 롱샷(주로 컴퓨터그래픽을 이용한 외부에서 달리는 열차를 촬영하는 장면에 치중)의 비율이 적었기 때문에 좁은 공간의 한계성을 그대로 보여준 방법이었다. 상황은 분명히 급박하나 카메라의 연출은 왠지 모르게 급박한 느낌보단 순서를 꾸준하게 이어가는 느낌이 강한 것처럼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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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3-12-27 1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리뷰 공모작이군요. 이거 나랑 라이벌 관계네...ㅋㅋ 전 이 영화 안 봐서 모르겠네요. 내가 봉준호 영화를 개봉관에서 놓치다니 ....

만화애니비평 2013-12-27 16:32   좋아요 0 | URL
그냥 닥치는대로 올리는 중입니다~!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