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Phos -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 우수만화창작 지원작
박흥용 글.그림 / 황매(푸른바람) / 2008년 9월
평점 :
품절


빛이란 매우 신기하고 재미있는 존재다. 분명 우리의 눈에는 빛이란 존재가 보이지 않는다. 단지 빛으로 통해 사물을 비추거나 혹은 반사되어 가는 색으로 통해 볼 수 있다. 빛 자체를 시각적으로 받아들일 경우 지상에서 인간의 눈에 심한 자극을 준다. 물론 이 정도면 양호한 편이다. 지구 대류권을 지나 성층권과 열권, 그리고 지구 대기권을 지나 우주공간에서 태양을 보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대기권의 기체가 없이 태양광선을 직접 노출되면 우리의 동공은 파괴된다. 그래서 우주를 비행하는 조종사들은 우주복을 입을 때 안면부위가 검은색으로 코팅되어 있다.

 

태양을 보는 것에서 태양이 뭔가 강하게 내리는 그 순간 뭔가 반사되어 빛의 흔적이 남는다. 빛이 안 보이는 이유는 빛 자체에 색을 띠지 않기에 그렇다. 빛이 보이는 것은 역시 반사에 의해서다. 그런 만큼 빛을 이용하여 인간이 볼 수 있는 것들은 매우 다양하고 흥미롭다. 미학적 영역에서 빛의 예술로서 예술품을 역사에 영원히 기록하는 일이 있다. 렘브란트라는 화가는 <야경>이란 그림으로 통해 가운데는 밝은 조명이 겉으로 갈수록 어둡게 하여 그 미묘한 명도를 조절하여 빛의 마술사라는 호칭까지 붙었다.

 

그뿐인가? 빛을 이용하여 투명유리 대신 고딕 양식으로 이루어진 성당과 교회에 가보면 빛을 투과된 유리창의 색이란 매우 아름답고도 신기하다. 혹은 숭고함을 더하여 예술을 넘어 하나의 신앙적 영역까지 도달한다. 지금도 사람의 가치관에 따라 예술보다는 종교적 가치에 접근하겠지만, 적어도 중세 내지 르네상스를 지나 근대이전에는 그것은 하나의 미적 가치였다. 미적 가치라는 것은 그것이 예술로서 사람들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도덕적인 관념이란 점이다. 빛을 이용한 세계는 매우 다양한 놀이도 만들어낼 수 있다.

 

이번에 읽어본 박흥용 작가의 <Phos 빛>이란 작품은 바로 그 빛을 이용한 신비로운 세계를 보여준다. 조금 다른 점이라면 빛을 이용해 다양한 색을 보여주는 것보다는 빛의 세기로 통해 여러 가지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부모님이 외지로 나가 형과 단 둘이 살아가는 한 소년은 언제나 고독하다. 부모님은 집에 계시지 않고, 하나 뿐인 형은 진학준비로 공부하기가 바쁘다. 혼자 집에 앉아 형이 올 때까지 홍길동 그림을 그리는 소년의 모습은 적적함을 보여준다. 그래서인지, 작가 스스로를 그 소년에 투영한 게 아닐까 싶다.

 

작가의 나이를 생각하면 1970년 전후로 소년인 시절이 있었을까 하는 기분이 든다. 1981년 만화계에 등단했다면 말이다. 신동헌 감독이 만든 홍길동이란 장편 애니메이션을 이래저래 길바닥에 그리는 모습을 보면 그림쟁이의 실력은 외로움에서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런 그가 무료함에 견딜 수 없어 동네에 TV가 있는 집의 아이하고 친하게 지내려 하나 그것이 쉽지 않다. 집안에 부모님이 없기에 경제적 사정이 밝지 못한 것이다. 눈깔사탕 하나 살 돈이 없어 그저 홍길동만 그린 소년은 어느 날 형으로부터 영사기를 소개받고, 그것에 빠지면서 필름을 구하러 다닌다.

 

처음에 필름을 훔치는 짓을 하다가 우연히 사진관에 한 아저씨를 만나면서 소년의 인생에 큰 즐거움이 다가온다. 만화에서 소년이 살던 시절은 1970년대 근대화라는 시절에서 가난과 몸부림하던 시절이다. 당시 우리나라에 TV는 흑백TV가 보급되었다. 물론 일부 부유한 가정에만 가질 수 있던 TV, 라디오나 전화기도 모두 가지기에도 벅찬 시절이다. 따라서 이 만화책은 빛으로 통해 색을 보는 게 아니라 빛의 명도로서 즐거움을 찾는다. 필름을 구하고 혼자 심심함을 이기고 싶은 소년은 이런저런 필름을 모아 동네 아이들을 모아 놓고, 변사 노릇을 하며 이야기꽃을 피운다.

 

거기에는 황금박쥐의 해골 캐릭터도 있었고, 철인 28호 로봇도 있었다. 이제 막 한국에 애니메이션이 들어오던 시절이다. 물론 자체적으로 만든 것보단 일본에서 제작하는 애니메이션을 하청으로 받아 다시 수입하여 이름만 바꾸었으나, 그래도 아이들에게 애니메이션이란 만화영화는 즐거움의 세계였다. 소년은 아이들에게 필름으로 통해 홍길동, 철인28호, 요괴소년까지 등장시킨다. 거기에 소년과 소년의 친구들까지 주인공으로 만들어 즉흥적인 이야기를 만든다. 이것이 곧 스토리텔링, 인간이란 생각하기 위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하기 위해 생각한다.

 

그저 멋대로 설정한 세계에서 소년은 잠시 이야기가 멈추는 감이 오는 것 같아도 다시 이야기를 연결한다. 바로 빛을 이용한 것에서 말이다. 빛이 비추면 사물이나 대상에 의해 그림자가 생긴다. 필름 역시 빛을 비추면 그 선과 면을 따라 그림이 화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림자로 놀아보는 것은 예전부터 인류가 사용한 놀이 중에 하나다. 실루엣이라고 그림자를 비추는 스크린으로 중국과 인도에서 즐겼고, 환등기로 이용한 스크린은 17세기에 들어오면서 새로운 즐거움을 주었다.

 

이런 스토리텔링의 가능성은 17세기에 사용한 사람들이 주로 선교활동을 하는 자였다. 그림자와 빛으로 통해 선과 악의 이분법적인 요소로 통해 사람들에게 겁을 줄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서양은 유일신 관념과 더불어 태양이 하나라는 점을 중시했다. 두려운 존재라고 믿게 하려는 악마의 그림을 클로즈업하면 사람들은 빛의 세기가 줄고 그림자가 늘어 모두 두려워하고, 반대로 악마 대신 천사를 클로즈업을 하면 모두 밝은 화면으로 통해 안심을 하게 된다. 특히 스토리텔링에서 이분법적인 세계관은 화면의 등장인물로 통해 관객과 동일시하게 하는 관점을 부여한다.

 

소년이 집에서 환등기로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할 때 적에 대해 대응하는 정의의 편은 우리 친구들이라고 했다. 스토리 소재에서 적이 있어야 비로소 하나가 된다는 서사적 이데올로기를 적용하는 것이다. 작품에서는 빛의 즐거움을 강조하기 위해 스토리텔링의 요소를 차용했으나, 빛의 즐거움을 알기 위해서는 스토리텔링이 필수적이다. 작품을 보면 그렇게 어려운 내용이 없다. 초등학생에서 어른까지 누구나 공감가고 향유할 수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작품의 그림체에서 실제 현장을 사진으로 촬영하여 색과 빛을 조절한 배경은 매우 신선하다. 그리고 그 배경 위의 만화캐릭터들이 단순한 표정과 묘사로 금방 페이지가 넘어간다.

 

작품에서 빛을 소재로 스토리텔링을 전개하듯이, 빛의 세기가 환등기와 사진관 주인이 자신의 과거를 찾아가는 것에서 확실한 명도가 느껴진다. 보통 만화를 감상하다보면 어두움 부분과 밝은 부분 그리고 옷이 접히는 부분까지 명암 처리를 한다. 실제의 빛이 아닌 펜과 연필 그리고 컴퓨터 일러스트로 통한 명암이나 그 명암이 있기에 등장인물은 항상 역동감을 넘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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