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김연수 지음 / 자음과모음 / 201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소설의 주제는 마지막에 나온다. 그 주제는 부여된 chapter처럼 “2012년의 카밀라 혹은 1984년의 정지은”, 이 2여자를 기다리는 사람은 이희재라는 남자였다. 아주 선량하고 박식하며 자신의 한계와 고통 그리고 심연의 세계를 보려고 했던 남자를 말이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이란 소설의 발달은 카밀라, 한국어로 동백꽃이란 영문이름을 가진 여자가 한국에 오면서부터다. 그녀가 이런 계기가 된 것은 양어머니 앤이 돌아가시고, 양아버지 에릭이 재혼하면서이다. 가족의 구성에서 생물학적 죽음과 동시에 마음의 죽음까지 받아들이야 했다.

 

인간이라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니 말이다. 양아버지 에릭의 재혼과 동시에 카밀라에겐 짐이 온다. 거대한 25㎏나 나가는 박스가 6개, 총 무게가 150㎏이니 그녀의 나이가 24살이라면 5.125㎏/년을 가진 박스가 되는 셈이다. 물론 그녀는 1988년에 태어나 2012년 진남시로 다시 되돌아간다. 그것은 인간이 다시 고향으로 간다는 것은 삶과 동시에 죽음이란 세계를 발을 밟는 것과 같을 것이다. 처음 간 곳은 진남여자고등학교, 유독스럽게 자신을 증오스럽게 바라보는 신혜숙 교장, 그리고 신혜숙 교장의 남편 최성식, 이들의 만남을 모든 것이 어긋난 시계처럼 흐르기 시작했다.

 

그 어긋난 시계는 전혀 상관없는 일들이라 생각하나 오히려 그것이 발단이 되어 모두를 절망의 바다로 몰아넣는다. 따라서 이희재가 마주나온 중학생의 정지은과 어엿한 아가씨인 정희재, 그들에게 다시 시작해야할 이야기는 무엇이란 말인가? 소설을 읽다보면 역사적 시간적 흐름과 그 역사적 흐름에서 일어난 개인적 비극은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우리나라 역사의 흐름이 이 소설에서도 역시 전혀 무관하지 않은 소재로 사용되고 있었다. 관할지역 도교육감으로 나오려고 하는 최성식, 그에겐 언제나 24년 전의 비극이 뒤를 따르고, 그를 보는 아내 신혜숙 교장 역시 불신으로 가득하다.

 

이 모든 것은 정지은의 죽음에서 비롯되었다. 정희재를 카밀라로 만들고, 사회에 나가서는 각각의 인생에 충실한 주부, 섹스 프리스타일 커리우먼, 심지어 여성감독까지도 말이다. 그들의 인생은 모두 어느 일에서 시작된 것이다. 1984년 마치 조지 오웰이 만든 소설 <1984>처럼, 그 암울한 시간은 모든 비극의 씨앗이다. 아니라면 미국 선교사 딸인 엘리스가 연못에 빠져 죽어 영원히 부모와 재회하지 못한 채 구천을 떠도는 것이 원인일까? 적어도 소설에서 이야기하는 민담에서 엘리스의 죽음은 단지 소문만 무성하다. 왜냐하면 마지막으로 양관이란 곳에서 엘리스를 보던 사람은 이희재이니깐.

 

그 엘리스를 보고 겁먹은 사람은 이희재의 아버지의 정부였으니 말이다. 모든 비극은 1984년 진남조선의 한 현장이었다. 이희재의 아버지는 조선소의 사장이고, 지은이의 아버지 그리고 지은이를 증오하던 미옥의 아버지는 희재의 아버지가 운영하던 조선소의 현장노동자였다. 그들은 열악한 근무환경을 개선하길 바라며 시위를 했다. 사장은 당장 용역깡패를 부르고, 깡패들과 대치하던 노동자 중에 4명이 죽고, 그 시위를 주도한 지은의 아버지는 자살을 했다. 모든 비극은 그곳에서 탄생한다. 왠지 노동자의 죽음은 내 마음을 아프게 한다.

 

내 아버지가 노동자여서 그런가? 이 소설을 읽는 도중, 내 방에 들어온 나의 어머니가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배에 가신 아버지가 다시 온다. 기관실 옆에 있는 숙소 온도가 60~70℃ 정도 된다고 말이다. 우리 동네에도 조선소가 있었고, 이 소설에 등장하던 지은이의 아버지와 그 주변사람들도 그런 비극을 겪는 것을 역사적으로 목격한다. 어느 역사적인 비극이 결국 개인의 비극이 되고, 그 비극은 다시 다른 이들에게 비극으로 되어 평생 자신의 인생에 대한 영향이 된다. 인간이란 결국 자신의 주변 환경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버지 잃은 미옥과 지은, 미옥은 시위주동자인 지은이 아버지를 증오하고, 그의 딸인 지은이를 증오했다. 게다가 지은이를 사랑해주던 최성식 선생님을 보며 질투까지 했다. 매우 낡은 학교도서관에서 그것도 발랜타인데이 때 남몰래 초콜릿을 최성식 선생님에게 주려고 했는데, 그것마저 지은이에게 이길 수 없었다. 따라서 지은이가 매우 미웠고, 그녀의 나쁜 소문과 그리고 그녀를 궁지를 몰아넣게 되었을 것이다. 자신의 추한 모습은 추후 아들이 발견한 마을 민담, 전설로 통해 스크린 화면으로 비춰진 자신의 동기인 영화감독의 입에서 나온다. 그 동기는 미옥이 보이지 않으나 마치 앞에서 그녀의 과거를 캐묻는 것처럼 그녀에게 말을 건네는 아우라를 보여준다.

 

모든 비틀림은 비단 국내만 아니다. 카밀라를 입양한 앤과 에릭, 그리고 카밀라를 사랑하던 유이치까지다. 사실 친부는 정지은의 오빠가 아니나 그렇게 포장된 그곳, 카밀라 아니 정희재는 자신은 사람으로 살아갈 의지를 잃고, 자살을 시도하기 위해 바다로 빠진다. 그러나 그녀는 죽기만을 위해 바다에 빠진 게 아니라 그 바다에 빠져 평생 만나지 않을 어머니 지은이를 찾아가는 것이다. 바다의 차가운 물결이 희재의 뺨을 스쳐갈 때, 그것은 지은이가 소녀인 자신보다 성장해버린 딸의 부드러움 생명을 느끼고 싶어진 것이 아닌가 싶다. 거기서 우연히 희재를 구한 지훈, 만약 지훈이를 그렇게 만나지 않고, 정상적으로 진남바닥에 봤으면 동네 누나 동생이 되었을 것이다.

 

지금의 지훈은 군에 가기 전에 희재를 위해 스쿠터를 모는 왕자가 되었다. 왕자는 백마를 타는 것이 맞는데, 왕자는 멋지게 등장해야 하는데, 왕자가 되어버린 남자는 오히려 아무 의도도 없이 그저 사람을 구하겠다는 것과 희재의 생명의 은인인데도 오히려 희재의 자아 찾기에 동참해주는 친구가 되었다. 비와 바람이 거세게 몰아치는 날 우산 안에 서로 붙어있는 그들은 친구보다 연인에 가까워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분명히 목적을 가지고 행동하고 있다. 지은이란 어머니의 죽음을, 왜 그렇게 되었는지, 그러나 중요한 건 지은이가 최성식을 사랑한 것을 사실이나 더 중요한 점은 지은이는 자신의 배에 있는 희재를 무척이나 사랑했다는 점이다.

 

단지 그의 아이가 아니라 나의 아이라는 점이다. 그녀의 자살은 엘리스처럼 사라져간 희재를 생각하는 것인가? 아니면 희재라는 이름이 노트에 새겨진 것처럼 이희재를 생각한 것인가? 이 모든 우연에서 우연으로 되어버린 필연적 숙명은 비틀어져 버린 몇몇 영혼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안겨준다. 만약 그 때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그 선택의 기점을 잡을 수 있다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이희재는 젊은 시절에 지은이의 구원을 해주는 것보다 같이 아픔을 공유할 수 있는 존재였다. 만약 이희재가 아버지 이상수를 말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한갓 작은 일들이 엄청난 일들로 발달해 간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처럼 파도는 바다에서 매우 사소한 일에 하나이다. 그 파도가 넘치는 바다에서 바다는 파도가 그저 스쳐가는 일이다.

 

그 스쳐가는 일이 아무렇게 여기지 않은 바다처럼, 만약 바다가 그 파도처럼 스쳐가는 일을 정말 생각했다면 어떻게 될까? 파도는 바다가 있기에 가능하나, 파도가 없다면 바다는 움직이는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없다. 물론 파도의 원리는 지구와 달의 운동에서 생기는 조석과 간만의 차이고, 기압과 수온 그리고 바다지형도 포함되나 말이다. 그래도 파도가 있기에 우리는 바다라는 것을 눈으로 움직이는 생명처럼 볼 수 있다. 그 생명이 가득하여 모든 것을 삼킬 것 같은 파도! 그것이 바다가 파도를 가지는 것이다.

 

물론 현실에서는 시간의 장벽을 넘을 수가 없다. 후회의 시절, 지은이가 실어증에 걸리고, 마음을 열어준 선생과의 밀애, 그리고 아이의 헤어짐, 오빠의 누명, 카밀라의 회귀 이 모두가 비극의 연속이다. 혼자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크나큰 세계, 하지만 크나큰 세계도 작은 세계가 모여진 세계다. 그 작은 세계에 대해 우리는 꿈을 다시 꿀 수 없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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