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의 서양미술사 : 후기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편 (반양장)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13년 4월
평점 :
절판


국내에서 미술에 대해 혹은 미학에 대해 일반 사람들에게 물어본다면 그렇게 잘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미학에 관심이 생긴 나라고 하여도 미술에 대해 관심을 가진지 얼마 되지 않았다. 내가 미술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한 것은 미학(美學)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영화, 애니메이션과 같은 영상매체에 의해서다. 그리고 미학을 알기 위해 우연히 진중권 교수의 <미학 오디세이>를 접했고, 그의 도서 중에서 미학 이외에도 다른 문화평론이나 사회에 대한 의견을 담은 도서를 보았다.

 

 

그런 와중에 미학에서 이번에는 미술사에 대한 책을 냈었을 때, 흥미가 가지 않을 수가 없다. 미술이라는 것은 결국 인간의 예술을 나타내는 것으로 예술은 인간의 삶을 광학적으로 보는 것처럼 인간의 삶을 어떻게 바라보는 것이 중요한 관건이었다.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에서 일부계층들이 아니면 미술에 대해 접근하기가 어렵다. 대부분 초등학교 교육과정에서 중고등학교 교과과정에서 미술은 그저 그림 그리는 사생대회나 점토나 색종이 오려붙이기란 실기로 점수 매기는 것에 치중하고, 미술의 본질적인 미(美)라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중고등학교 시절, 특히 석고상이나 그림이 벽에 걸린 미술교육실에서 내가 배운 것은 미술인가? 아니면 수능을 치기 위한 방법인가? 안타까운 사실은 미술이란 과목은 수능조차도 나오지 않은 소외과목이었다. 그저 내신에서 적당히 시험보기 위해 이론 수업을 하며 그림을 그린다. 그러나 손재주가 없는 나에게 그림을 그리는 것도 벅차고, 사생대회에 나가 풍경화조차 제대로 그리지 못한다. 미술시간은 그저 악몽이었다. 그림을 잘 못 그리면 점수가 낮게 나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 같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미술이란 그저 먼 나라의 이야기일 뿐이었다.

 

 

미술은 그야말로 수능하고 아무런 관계가 없고, 내신에 큰 도움이 되지 않으며, 교과과정으로 전혀 의미를 가지지 못한 것처럼 느꼈다. 어떻게 보면 미술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더 많은 것들을 알아야 했다. 세계사나 현대사 혹은 윤리도덕 같은 것들을 말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윤리도덕 시간에 비록 짧은 수업시수이나 그곳에 나온 철학가나 사상가 그리고 그들이 저술한 많은 도서들이 결국 예술이란 큰 흐름에 조류가 되었다는 사실에서 미술이란 과연 나 같은 일반인들과 분리된 존재인가? 라는 의문을 가졌다.

 

 

고등학교 시절 최신 미술에 대한 정보는 거의 피카소에 이르면 기말고사가 다가왔다. 단지 피카소가 인상주의 내지 큐비즘이란 입체적인 회화를 쓴 것만 말하지 왜 그가 그렇게 했는지에 대해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그것을 알게 된 것은 불과 2~3년 이내였다. 미술 그러니깐 미술을 포함하는 예술이란 것은 우리 인간과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역사적인 흐름에 따라 같이 흘러가는 하나의 시대적인 거울과 같은 존재라는 것을 요새 깨닫고 있다. 예전에 진중권 교수의 <미학 오디세이>도 그러하나 <교수대 위의 까치>와 같은 도서 역시 그러하다.

 

 

미술이란 예술에서 보인 그림의 한 폭은 우리에게 그 시대에 어떤 사람이 있었고,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으며, 왜 그런 식으로 그리게 되었는지 생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단순히 외우기 식으로 고전주의 → 바로크 → 로코코 → 신고주의 → 인상주의 등등으로 넘어가는 것이 과연 우리 생활사에 중요한 것이 무엇이 있을까 에서 없다고 말할 수 있었으나, 그동안 <미학 오디세이>나 <서양미술사> 등의 도서로 통해 다르게 생각하게 된 것이다. 오히려 미술에서 보여준 것이야 말로 그 시대의 사람들이 가진 가치를 보여주고, 그것이 그 시대에서 당연한 도덕적인 관념이었을 것이다.

 

 

도덕이란 것은 단순히 윤리하고 다른 것이다. 미적인 가치, 즉 당시 사회에서 가져야 할 당연한 것이다. 물론 그것은 근대를 지나 현대로 오면서 다른 것이 되어야 했다. 인간에게 관념이란 것이 있기에 그 관념으로 하여금 거대한 흐름에 순응되어야 한다는 지배계급의 헤게모니가 예술로 하여금 하나의 숭고함을 부여하였다. 서양의 오래된 성당이나 교회, 회화, 동상을 등을 보면 그것은 예술을 위해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상징성을 부여하기 위해 만들었다. 인간의 지배를 위한 하나의 이데올로기로서 고전예술성을 지나 근대로 오면서 마르크스주의의 도래에 따른 인간은 거대한 관념이란 조류보단 역사적 자아를 가진 하나의 주체로서 보면서 예술이란 것은 기존에 가진 성질과 달리할 수밖에 없다.

 

 

고전적으로 예술의 존재는 지배계급인 왕족, 귀족, 성직자, 기사 등에 의해 유지되었다면, 근대의 유럽에선 모더니스트로 통해 예술은 예술을 위한 것이 되어야 했고, 또는 예술은 파괴되어야 하는 것이 되기도 했다. 딱히 예술사를 논하기에 나의 지식에 한계성이 있으나, 적어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예술은 변모한 것이다. 예술에서 미술은 계속 변해가고 있으며, 예술이 인간에게 정치적, 미학적으로 고정관념을 부여하고 통치자에게 하나의 정당성을 제시한다면 그것에 대해 파괴하는 것도 존재한다.

 

 

아방가르드라는 전위는 예술이면서 예술임을 부정하며, 또한 순수하게도 대중문화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대중문화에서 벗어날 경우 엘리트주의적으로 흐를 가능성이 높기에 아방가르드 역시 대중들을 정치적인 해방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에 한계성이 있었다. 미술이란 것은 관념에 의한 것을 시각적으로 혹은 이번에 소개된 <서양미술사 - 후기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에서도 청각이나 촉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 되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다다이즘과 관련하여 마르셀 뒤샹의 <샘>에서 예술은 그저 작품에 보이는 미적 감각일까? 아니면 작가의 명세로 통한 것인가?

 

 

미술이란 영역에서 이런 실험들은 계속 진행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가령 어느 유명한 작가 및 교수가 있는데, 그의 작품은 늘 많은 관심과 다양한 평들이 따른다. 그가 만약 전화로 오늘 필요한 작품을 목수나 대장장이에게 이야기하여 주문하면 그건 누구의 작품인가? 언제 한번 어떤 미술대학 교수의 블로그에서 재미난 일화를 보았다. 어느 미술가가 거리의 걸인을 데리고 와서 물감이 어지럽게 뿌려진 동판을 닦게 했다는 것이다. 걸레에 모든 물감이 제거될 일은 있을 수가 없고, 대신 아주 이상하게 색이 덥힌 동판이 되었다. 물론 그것은 작품으로 인정받았겠으나, 한편 폭로로 통해 그것은 우습게 되어버린 해프닝이었다.

 

 

프랑스 사회학자인 장 보드리야르가 “기호는 상품이고, 상품은 기호다”라고 했다. 교수의 이름은 결국 상품이고, 상품은 결국 기호인 교수로 통해 이루어졌다. 미술이란 것도 결국 자본주의 안에서 기호라는 기표에 의해 의미조차 없는 것도 의미가 가능하게 되었다. 이렇듯 현대사회로 오면서 미술 역시 현대사회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고, 그것은 또한 우리에게 영향을 준다. 앤디 워홀이란 팝아티스트를 보자. 그는 마릴린 먼로나 마오 쩌둥이나 코카콜라 등의 이미지를 복제하여 다양한 색으로 펼친다. 그의 말에 의하면 코카콜라는 우리 모두가 마실 수 있다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이라도 세계 최고의 부자라도 그들이 마시는 코카콜라는 모두 같은 맛이다.

 

 

옛날 우리 속담에도 이런 말이 있었던가? 걸인의 찬, 왕후의 밥이라고, 단지 조금 유감인 것은 우리는 쌀로 지은 밥만 먹는 게 아니라 반찬도 같이 먹기에 코카콜라처럼 느낄 수 없는 점이다. 코카콜라를 비롯한 많은 인스턴트 식품은 우리에게 일상적으로 접하는 것이기에 미술적인 요소로 볼 수 있는가? 누구나 간단히 접하기에 팝아트에선 자본주의에 대한 친화성을 보여준다. 여기서 잭슨 폴록을 발견하여 미국 미술평론에 큰 영향을 준 그린버그의 상황을 보면 조금 다르게 볼 수 있을 것이다.

 

 

본래 트로츠키주의자인 그린버그는 아주 특이한 상황에 놓인다. 1940년 트로츠키는 스탈린이 보낸 자객의 피켈을 맞고 사망한다. 영구혁명론을 주장한 트로츠키와 일국사회주의를 주장한 스탈린에서 그린버그는 아주 애매한 상황에 놓였다. 스탈린이란 트로츠키의 적을 따를 수도 없고, 그런다고 마르크스주의자인 트로츠키가 없는 이상 노선을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1950년대 메카시즘이 미국 내에서 열풍하자 더욱 그린버그에겐 스탈린에 대한 적대적 성격과 동시에 미국 자본주의 사회에서 합류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문제는 스탈린을 배격하는 기존의 예술정신이 미국의 자본주의적 성향에 따른 것이 아닌데도, 그것이 하나의 미국의 상징이 되어야 했다. 미국은 개인주의 성향이 매우 강하기에 예술은 정치적 입장보단 개인의 역량으로 매겨지고, 그것은 곧 미국의 정치적 자유가 있다고 하는 하나의 이데올로기적인 관점이 된다. 정말 그것은 정치적 자유가 있기에 가능한 예술인가? 단지 그렇게 보이기 위한 하나의 도구에 불과하다. 이런 상황에서 잭슨 폴록은 아방가르드 예술에서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처럼 그 순수성을 지향하는 작품이 나온다.

 

 

미국의 아방가르드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은 바로 이해하지 못하나 적어도 유럽의 아방가르드와 다른 점은 분명하다. 유럽의 아방가르드는 예술과 삶의 경계는 허무는 것이라면, 미국은 자유가 있다고 하는 냉소주의에 대한 이념적 우위를 만들기 위한 도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럽은 직접적으로 전쟁을 겪었고, 전쟁에 의한 정신적 충격에서 나올 필요가 있었다. 또한 프랑스에선 드골에 저항한 5월 혁명에 의해 늘 새로운 바람이 일어났다. 상황주의 인터내셔날이란 그룹이 미국의 팝아트에 대한 부정적인 관조로 일어났기 때문이다.

 

 

미국의 아방가르드는 유럽의 아방가르드와 달리 사회전체에 대한 혁명적 기류보단 그저 개인적 만족감이 더한 것 같았다. 미니멀리즘을 보는 순간 나는 특수촬영을 하는 셋트장이 생각났다. 특히 일본의 울트라맨과 같은 외계초능력자가 거인화되어 괴수를 무찌르는 장면에서 소품들이 미니어쳐가 되는 모습을 말이다. 그것은 단순히 사회적으로 놓여있는 모순에 대한 혁명적인 구호보다 그저 공간적 배치에 따라 미의 가치가 그냥 있다는 정도로 보였다. 미국과 유럽의 미술은 그런 차이성이 보인 것 같았다.

 

 

현대미술에서 보인 특이사항은 이런 기존에 보여준 예술에 대한 반란이다. 아니라면 원래 상태에서 다른 방법으로 진행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 나는 처음으로 모더니즘 이후가 포스트모더니즘이 아니라 후기 모더니즘이란 단어를 보았다. 처음 본 낯선 개념, 그것은 결코 이해가 바로 된다는 것을 보장할 수 없다. 이것은 단순히 미술적 영역이 아니라 미학적 영역에서 사상까지 연계된 점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도래와 더불어 미디어의 발달은 실제와 가상의 차이를 벗어나 차라리 가상이 현실을 대체하는 세상이 되었음을 알린다. 미술이란 그저 행위에 대한 결과에서 미술 자체가 행위라는 것도 그러하나, 그것은 세상이 거대한 서사에서 탈피하려는 포스트모던을 보여준다.

 

 

그런다고 그것 역시 한계성이 온다고 내가 생각하는 것은 이 책에서 가장 관심을 가진 상황주의 인터내셔널 전사에 의해서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가 하는 일이 우리의 판단과 우리의 이익을 대변하기보단 어느 누군가에 의해 조장되고 그 누군가를 위한 이익이 된다는 점이다. 열렬한 행위자일수록 가장 스펙타클의 사회에서의 지루한 구경꾼이기에 미술로 통해 행위자는 그것을 따르기도 혹은 파괴하기도 한다.

 

 

우리가 예술과 가까이 있으면서 멀리 있는 이유는 팝아트에서 코카콜라가 전시될 수 있듯이 코카콜라 역시 우리가 가까이 하는 존재다. 그래서 가장 가까이 있기에 가장 예술로 보기 어려운 것이 될 수 있다. 혹은 가장 예술적인 작품 역시 모조와 복제가 있기에 예술작품의 숭고함이 떨어진다. 아니라면 우리 스스로 예술가가 되어 삶과 예술의 경계를 파괴하는 전위적인 존재가 되면 좋겠으나, 그것 역시 스스로가 해결하지 않으면 결국 아무 것도 아니게 된다. 하지만 아무 것도 아닌 것마저도 잘 꾸미며 예술이 되기에 아이러니에 부딪히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곰곰생각하는발 2013-06-07 0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구야.. 뭘 이리 길게 쓰셨습니까.. ㅎㅎㅎ 하여튼 성실 그 자체유....
난 슬슬 진중권이 쓴 미학 이야기'가 이젠 다 비슷비슷해서 약발이 좀 떨어진 듯해요...
뭐 미학오디세이에서 햇던 말 서양미술사도 보면 비슷한 말이고...
하여튼 미학을 이렇게 알기 쉽게 흥미쥔쥔하게 소개하는 것도 기술은 최고 기술임..

만화애니비평 2013-06-07 12:57   좋아요 0 | URL
뭐 그건 최고죠...ㅎㅎ
국내에 이런 양반이 없으니 단지 중권이 아찌의 오덕적인 면은 본 받아야 할 가치라고..ㅎㅎㅎ
이전에 공각기동대와 한스 밸머의 관계에서 많은 영감도 받고..
이제 후학을 양성하면 좋겠다고 봅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