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기 에반게리온 1 - 사도의 습격
GAINAX 지음, 사다모토 요시유키 그림 / 대원씨아이(만화) / 1997년 3월
평점 :
절판


보통 만화책을 발간하는 것에서 판권이 출판사가 아니라 애니메이션 본사에 있는 경우가 아주 드문 느낌이다. 한국에서는 대부분의 판권을 만화책을 전문적으로 출판하는 출판사에서 이루어진다. 하지만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출판에 대한 권리를 만화잡지사가 아니라 가이낙스에서 직접 판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안노 히데아키를 비롯하여 만화책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직접 그리고 만드는 사다모토 요시유키 작가의 경우를 생각하면, 판권이나 작가 모두 가이낙스 소속이란 점이 특이한 점이다.  

 

가이낙스 작품 중에 다른 만화책이나 라이트노벨을 토대로 만든 것은 있지만,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가이낙스에서 만화 뿐만 아니라 애니메이션, 게임 각종 상품에서 판권을 지닌 것을 생각하면 가이낙스의 콘텐츠상품은 다른 것과 차원이 다르다. 그와 비슷한 판권을 행사하는 업체로는 스튜디오 지브리가 있을 것이다. 작가가 직접 애니메이션 회사에 소속되어 전반적으로 그 회사에서 중책을 만드는 일은 많지만, 사다모토 요시유키처럼 그렇게 만화, 애니메이션에 모두 관여하는 만화작가 및 애니메이터들은 흔하지 않다.

 

그래서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만화로 보는 것과 TV애니메이션으로 보는 것과 심지어 신극장판으로 보는 것에서 각각의 맛을 느낄 수 있다. 만화책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제1권에 소개되어 있는 것처럼 사다모토 요시유키의 입장에서 작품을 전개한다. 본래의 TVA <신세기 에반게리온>과 유사하면서도 다른 이유는 감독인 안노 히데아키와 사다모토 요시유키가 바라보는 작품세계관이 다르기 때문이다. 사실 애니메이션을 보면, 신지가 제3도쿄시로 올 때 분명히 레이가 신기루처럼 보였으나, 만화책에선 그렇게 나오지 않고, 처음 에바에 탑승할 때도  TVA에서는 레이가 괴로워하는 것과 동일하나, 초호기가 아무런 이유 없이 작동하는 것이 나오지 않았다.

 

만화책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레이가 신기루처럼 나오는 것 대신하여 초호기에 레이가 탑승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레이가 초호기를 탑승해도 신지가 처음 탑승하는 것에 비하면 싱크로가 떨어지는 것이 에바 초호기가 역시 이카리 유이의 몸과 마음이 담겨진 것을 복선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신지가 처음 탑승하는 모습에서 만화책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다소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서>의 신지와 유사한 느낌이 든다. 물론 비슷한 것도 있고 다른 것도 있으나, 신지가 레이의 모습을 보고 바로 탑승한 것과 TVA처럼 전혀 자기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에바 초호기를 타고 제3사도를 격퇴하여 미사토가 신지를 데리고 언덕에 가서 저녁에 제3도쿄시의 전경을 보여줄 때, 신지는 미사토의 위로를 받는 것으로 나오나, 만화책에서는 눈물을 흘린다. 수고했어 내지 잘 했어 라는 칭찬을 미사토보단 아버지 이카리 사령관에게 받고 싶은 것이다. 물론 이카리 사령관도 조금 다른 모습으로 나온다. 본래 애니메이션에서는 이카리 사령관의 안경 너머의 눈빛이 잘 나오지 않으나, 생각보다 만화책에선 이카리 사령관의 눈모양이 자주 나온다.

 

사람과 사람 간의 단절된 세계는 만화책보단 애니메이션이 더욱 강조된 셈이고, 그것은 만화작가인 사다모토 요시유키와 애니메이터 안노 히데아키가 바라보는 작품을 통한 자기 주관이 다르다는 점이다. 따라서 시나리오가 TVA와 비슷해도 주인공이 보여주는 모습은 매우 다르고, 상황이나 대처 역시 다를 것이다. 물론 1권부터 초호기를 탄 레이에서 레이가 초호기와 이중적인 자아를 형성하는 것보다 차라리 동화할 수 있다는 것으로 추후에 나온 시리즈를 읽으면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레이의 존재, 그 레이를 있게 한 원초적인 존재인 이카리 유이가 초호기에 숨 쉬는 것을 너무 빨리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본래 애니메이션에서는 신지가 초호기를 타고 제3사도를 무찌르기 전에 사도의 공격으로 인해 의식을 잃었고, 그 덕분에 에바 초호기는 폭주를 일으켜 이길 수 있었다. 이때 불안해하던 신지에게 누가 안으려 하는데, 왠 이상한 가면을 쓴 사람이 신지를 안으려 했고, 신지는 그 두려움으로 비명을 지른다.

 

신지가 병원에 누워 일어났을 때 무의식적으로 기억하던 것을 떠올리기 시작하는데, 그때 에바 초호기가 눈을 떠서 신지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점이다. 인류 최후의 보류 인조인간 에반게리온 초호기, 신지를 태울 때부터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한 그 행동은 NERV 요원들을 모두 행운과 더불어 공포를 안겨준다. <신세기 에반게리온> 1권을 다 읽은 후에 후기부분을 읽어보면 주인공 선택지를 신지만이 아니라 미사토로 추가한다.

 

신지는 인간관계가 싫어서 모두를 거부하고, 미사토는 인간관계의 깊이 있는 것을 싫어하여 여러 사람들을 이래저래 넓혀가는 타입이다. 모두 외로움을 가지면서 그 외로움은 서로 다른 방법으로 해결하는 것이다. 세상과의 벽을 처음부터 쌓은 신지, 세상과의 벽을 쌓았으면서도 쌓지 않은 척하는 미사토, 2사람을 보면 왜 그런가 하나 사실 우리의 모습이다. 아무 이유 없이 에바에 타라고 하는 신지, 그곳에서 제대로 말도 하지 않고 두려움만 떤 채 괴로워하던 신지, 그 나약한 소년은 바로 우리의 주인공이란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으나, 바로 우리의 모습이다.

 

우리는 그렇게 대단하지도 강하지도 혹은 슈퍼히어로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현실에서 나약하고 무능하고 때로는 절망에 흔들리기도 한다. 영웅을 기대하는 심리에서 오히려 영웅이 아닌 나약한 인간들을 두고 처음에 신지에 대해 많은 부정적인 시선을 보내지만, 그 누구라도 그 자리에 앉으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유명한 서적인 시학(詩學, poetics)을 읽으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다.”라고 말이다. 역사는 어느 한 개인에게 일어난 하나의 선택지로 끝이 나나, 시라는 어느 가정의 이야기는 결국 나에게도 일어날 수도 있다는 하나의 개연성 내지 필연성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세컨드 임팩트를 맞아 인조병기를 타고 미지의 생물과 싸우는 일들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신지처럼 어려운 인간과 사회생활은 말 그대로 일어나는 일이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사도를 대항하여 인류가 사투를 벌이나 사투를 벌인 후에나 그 중간에도 인간과 인간은 갈등하게 된다. 그래서 인간은 항상 나약하다. 그 나약함을 부정하는 것이야 말로 가장 나약한 인간임을 누가 알겠는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