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 없는 수단 - 정치에 관한 11개의 노트
조르조 아감벤 지음, 김상운.양창렬 옮김 / 난장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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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보면 자본주의구조에서 20세기 말 미소냉전은 그렇게 끝이 났다. 서로 자신들만의 가치관만을 강조했으나, 실제로는 그것을 핑계 삼아 은폐, 조작, 감시, 첩보 등을 상대 국가만 아니라 자신의 국가에게 사용했다. 결국 서로에 대한 이분법적인 적개심이 결국 그 감정의 표출된 수단적 방향을 적대하는 상대방이 아니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 책에서는 조르조 아감벤의 설명과 더불어 기 드보르의 설명을 추가적으로 제시한다. 기 드보르가 스펙타클의 사회라는 구경거리의 세상은 1927년부터라고 한다.

 

스펙타클의 사회가 1967년에 나왔고, 그것에 대한 비판이 20년 뒤에 나온 것이다. 그런데 왜 1927년이란 말에 확실히 1927년은 중요한 시기인 듯하다. 미소냉전의 이데올로기적인 대립각을 세우기 전에 그것의 바탕이 되던 것이 1927년이다. 레닌이 1924년에 죽고, 트로츠키와 스탈린의 정치적 대립에서 스탈린이 1927년 트로츠키를 정치적으로 승리한 시기와 비슷하다. 그런 점에서 소비에트 연방은 프롤레타리아독재국가라는 겉모습에서 관료주의적 국가로 변해 있었다.

 

어떻게 보면 시장경제자유주의와 국가자본주의의 대립각에서 각 나라에 속한 국민들은 과연 무엇을 보고 적개심을 느껴야 했는가? 국가와 국가에서 개인적 갈등은 전쟁이 아니라 단순히 싸움에 불과하나, 국가와 국가의 대립은 전쟁이다. 전쟁과 더불어 일어나는 인종청산 내지 인종말살과 같은 비인도적 행위들은 상대국가에 대한 관념에서 국가적인 영역으로 다른 나라의 사람을 대하지 그 사람 자체로서 대하지 않는다. 오히려 국가적이기에 국제법이나 전쟁법을 따르기보다는 내부적 법적으로 따르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에 히틀러의 수하들은 폴란드 점령과 프랑스 및 기타 유럽국가의 유태인들을 수용소에 가두어 심각한 잔혹행위를 빚었다. 그 행위에서 그들의 행위는 인간과 인간으로 대하기보단 그저 국가적 이데올로기로 통해 다루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데올로기라는 것은 인간과 인간을 분리시키는 합법적인 도구라고 볼 수 있다. 그 도구 속에서 인간은 그 법의 대상에 해당되는 인간과 해당되지 않은 인간으로 분리하고, 그 분리된 공간에서 법의 범주에 벗어난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살아있는 생명체나 그들은 법적인 요건, 즉 시민 내지 인민으로서 자격이 없기에 보호 받을 수 없다.

 

주권의 영역에서 주권은 결국 people이란 생물적 조건과 더불어 People이란 시민권이란 것이 필요하게 한다. 하지만 후자에 속하는 시민권에 속하는 것은 한정된 존재다. 그것은 언어, 문화, 풍습 등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생각해보면 우리 인간은 언어로서 모든 것을 해결하는 존재다. 언어가 가졌기에 그 고유한 문화와 조건들이 형성되어 있다. 언어의 분리된 이질감이 결국 차별이란 것을 둔다. 다시 그 언어로서 이미지들을 형성한다. 예전에는 글을 읽지 못하면 문맹인이나, 지금은 영상을 이해하지 문맹인이다.

 

영상으로 이루어지 20세기에서 이미지로 매개된 사회, 즉 스펙타클이란 거대한 소용돌이에 우리 사회는 흘러가게 되는 것이다. 미디어의 모든 권력적 요소는 인간의 사고를 할 수 있게 하는 언어적 기능을 통제할 수 있다. 조지 오웰의 <1984>에서 스미스가 일하던 국가기관에서는 새로운 사전을 발간하고, 언어의 실제사용을 제한적으로 두려한다. 그것은 언어가 인간의 사고와 행동에 큰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이미지들로 매개된 사회에서는 결국 대중문화의 연계성이 된다. 민주주의 정치제에서 가장 한계점은 그런 이미지로 매개된 대중들의 전체주의적 요소일 것이다.

 

가장 파시즘에 가까운 정치제는 사실 민주주의 제도일 것이다. 민주주의는 형식적 제도이지 그 제도에 대한 사실적 행동에서 인간 스스로 계몽이 아니라 미디어로 통한 형성된 여론과 상황이 주어지게 되기 마련이다. 그런 상황과 여론들은 다시 정치적으로 수단화되기도 한다. 근거도 없으나 민주주의 제도의 한계점은 국가적 업무를 모두 국민 모두가 담당할 수 없다는 점이고, 그것을 대신할 관료들이 필요하다. 문제는 관료라는 존재들이 국민의 아래에서 행동하기보다는 국민의 위에서 행동할 수 있는 권력을 지닌 것이다. 노모스라는 법의 통치적 부분에서 우리는 법의 아래에 있어야 하나, 법의 위에 있는 것으로 통해 하나의 정치적 질서가 있다는 점이 아이러니다.

 

법으로서 통제하는 존재는 인간이지 그 법 자체가 아니다. 게다가 기계적으로 수치를 드러낼 수 없으며, 그것을 판단할 이성조차 없다. 판단의 기준은 결과론적 부분이 아니라 그 결과에 대한 행위의 근거성과 동기 부여다. 그렇기에 인간 스스로가 법으로서 다른 인간을 통치하는 부분에서 법을 집행하는 인간 스스로가 도덕성의 판단함에 그 판단하는 자의 도덕성이 소유하지 않게 되면 일어나는 것이 수용소적인 통치일 것이다. 그것이 전쟁이라면 전시수용소고, 그것이 내부적이라면 재외국민들의 수용하는 공항이나 보호소일 것이다.

 

민주주의적 요소가 왜 전체주의와 가까운 내용에서 민주주의에서 People이란 조건이 민주주의국가에 해당되는 사람에게 해당될 뿐이지 그것에 해당되지 않은 이들은 법적으로 보호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그 법적인 조건은 분명히 생물학적으로 인간과 인간을 나누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물질과 물질로서 구분하는 것이다. 법적인 요건에서 그런 일련의 행동들은 여론과 상황이 좌우한다. 사실 어떻게 보면 그런 사건들은 많이 일어날 경우 국내외 인권단체에서는 분명 경고를 내릴 것이나 그것을 실행하는 정부기관과 국민들은 그것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법적인 절차에 의해 행동하고 있다고 여기는 것이고, 민주주의 제도에서 국민이 주인이기에 그들의 주인으로서의 소유권이나 행복추구권이 보호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오로지 자신들의 유지가 결국 민주주의 제도에서 그 나라 국민들의 목적의식이다. 그렇다면 저런 의식은 자유민주주의제도만 있었던가? 아니다. 20세기 소비에트연방 붕괴가 일어나던 러시아에도 있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제도적인 부분과 더불어 미디어로 통해 상대국가의 불리한 점만 편집하여 몽타주화한 것이다.

 

그렇지만 분명히 말하는 것은 스펙타클화되어버린 국가적 인식에서 실제적으로 미소 냉전 시기에 직접적으로 그들이 무력적으로 충돌하지 않았다. 상대국가의 동맹국이나 해보았자 첩보전이었다. 직접적 물리적 충돌을 하지 않았기에 그들은 동맹국에게 우위적인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것이 상대국가의 주권에도 민폐를 주는 것에서 말이다. 어째든 그런 초국가적인 권력과 더불어 한 국가의 내부적으로도 이런 부분은 국가에 대한 권력을 지대한 부분을 공헌한다. 국가권력 중 경찰은 내부적 치안을 해결하기 위해 진실로 시민들의 안전을 보장하기보단 오히려 감시와 처벌의 형태로 발현할 수 있다.

 

국가 내부적으로 긴장감을 형성하면 대부분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그 심리적 행위에 대한 카타르시스가 필요하다. 결국 그 카타르시스가 해결되는 것은 만들어진 범죄의 소탕이다. 범죄라는 것은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기도 하나 한편으로 사회적으로 안정을 만들어 놓게 하는 장치다. 범죄의 구조적인 접근은 결국 한 개인의 도덕성 및 정신적 문제에서 그 이상으로 사회적인 조건을 보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곧 이것에 대한 제도적 개선보단 오히려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있다고 보여줌으로서 미디어의 기능을 정치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것이다.

 

사회적 갈등은 그 사회에 살고 있는 인간들의 조건이 다르므로 발생하고, 국가적 갈등은 그 국가들이 존재하는 지역적, 정치적, 종교적인 부분에 따라 발생한다. 그러나 우리는 직접 서로 다른 사회 내부와 국가 외부의 현실을 알지 못한다. 우리가 아는 부분은 미디어로 통해 매개된 스펙타클로서 알아가는 것이다. 발터 벤야민은 자신의 도서에서 이미지의 연속성을 둔 영상이 오히려 파시즘 국가에서 유용한 수단이 될 것이라고 한다. 책자와 같은 것은 분명 계속 집중적으로 읽고 생각해야 하나, 영상물은 눈에 보이는 화면과 동시에 이제는 소리까지 나온다.

 

정보의 전달력이 그만큼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쉽고 이해하기 좋다는 것이다. 20세기에 발달한 영상물이 이제는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인터넷으로 바뀌었다. 실시간적으로 늘어나는 정보의 유통에서 이제는 정보의 부족이 아니라 정보의 과잉으로 넘쳐난다. 정보가 과잉화 되면서 문제점은 정확하지 않은 정보와 조작 및 은폐된 정보들이 몽타주로 변질되어 사실이 아닌 거짓이 하나의 사실성을 가지게 되는 simulacre의 연속성이다. 결국 simulation이 스펙타클의 산물로서 결정체인 것이다. 일망감시체제인 판옵티콘에서 이제는 인터넷콘이란 단어가 좋지 않을까 싶다. 네티즌의 해킹과 더불어 정보감시는 그 당사자조차 알지 못할 만큼 교묘하고 지능적이다.

 

문제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미디어로 통해 생성된 스펙타클은 신화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다. 스펙타클의 사회에서는 어제 봤던 뉴스와 드라마, TV토크쇼 뿐만 아니라 인기유행 중인 극장가의 영화까지 포함된다. 우리는 언제나 스펙타클이란 도구에 의해 모든 것들을 대화하고 사고를 공유한다. 정해진 것만 보는 것에서 인간의 집단적 사고를 유도하고 결국 그것은 인류의 적이 눈앞에 있는 사람들로 대체하게 만든다. 그나마 2차 세계대전의 잔혹한 수용소는 그 자체로서 상징성을 가지고 있으나, 상징성이 없는 수용소에서는 누가 과연 희생되어 가는가? 호모 사케르적인 요소로 보면 그것은 권력을 지니지 못한 자들이다. 모두 상관없는 이야기처럼 사람들은 받아들이나 사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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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3-03-31 1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한 번 읽어봐야 겠어요. 호모 사케르보다 이 책이 더 좋다는 소릴 들어서 말이죠.
민주주의는 결국 쪽수 싸움이잖아요. 쪽수를 밀고가는게 파시즘입니다. 물론 여기서의 파시즘은 전체주의이지만 쪽수가 전체를 차지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죠. 민주주의는 올바른 감시 체제가 작동을 하지 않으면 말 그대로 파시즘입니다. 한국 사회 파시즘적 사회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3-03-31 21:38   좋아요 0 | URL
호모 사케르보단 이 것이 좋은 듯합니다. 여러가지 모아 중구난방적인 부분이 조금 이어진 부분이라고 할까요?
민주주의라고 하기엔 이성이 없는 이 세계에서는 민주주의로 가장한 전체주의에 불과하죠.
한국 파시즘이죠. 확일화 되니 말이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