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바이러스
진중권 지음 / 아웃사이더 / 2004년 6월
평점 :
절판


주변 친구로부터 듣는 이야기가 좀 극단적이고, 너무 강현 선입견이 아니냐고 듣는다. 아마 내가 성격이 그렇게 좋지 않은 것도 있으며, 이런 이야기가 나온 것도 너무 일상적이고 사소한 것들이다. 일단 내 개인적으로 사소하고 일상적인 부분에서 상당히 경직된 인간이다. 얼굴을 속일 수 없는 기분, 말로 내뱉어도 그대로 드러나는 나의 심정, 거짓말하면 10번 하여 1번 성공할 수준, 그런다고 하루에 거짓말을 10번을 넘기도 어렵다. 아침에 출근하여 사무실에 오면 대화도 그렇게 많이 하는 편도 아니고, 대화도 거의 업무상, 나머지는 무얼 하냐고? 당연히 PC 앞에 앉아 한글, 캐드, 포토샵, 엑셀을 가지고 보고서 정리하기 바쁘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부분은 내가 이래 보이지만, 다소 선입견도 없고 극단적이지 않다. 그런 요소는 바로 일상적인 부분을 넘은 그 이상의 영역에서 가능한 부분이다. 지식인 사회에 들어갈 수준이나 상황까지는 아니나, 적어도 지식인들은 일반 세속에 나오면 바보가 된다. 세속의 대중들이 보고 듣고 생각하는 범주가 거의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에서 우리는 대중문화에서 공감대 형성이 너무 잘 되어 있다. 가령 “너 어제 TV에서 그 드라마 봤니?”, 혹은 “그 영화 봤지? 너무 감동적이더라!” 뭐 이런 식이다.

 

다들 그 영화를 보면 특별한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특히 비극의 주인공을 보면서 자신을 대입하면서 나라는 존재의 특별함을 느낄 것이다. 물론 인간에 대해 논하면 그 자체로 특별하다. 그러나 그 특별함은 결국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생각이란 점에서 특별하지 않다. 오히려 자기가 특별하다고 여기기에 특별하지 못한 것이다. 대중문화에서의 대중들은 이런 의식구조가 팽배한다. 그래서 이런 대중문화와 미디어의 관계를 엿보면 여기에 합류되지 않은 자들이 오지에 살고 있는 원시인이나 문명화가 덜된 야만인으로 보일 것이다. 애석하게도 그런 원시인에 야만인의 범주에 나도 들어간다.

 

나의 모토는 그런 취급을 당하는 것이 아니지만, 당할 수밖에 없다. 내가 사람들과 만나면 문학과 예술을 이야기하고 그것에 대한 철학적 언변을 쏟아 놓을까? 다들 그런 것에는 잠이 오고 지겨워한다. 기본적으로 어느 정도 서로 간에 알고 있어야 가능한 대화니 말이다. 따라서 나는 바보가 될 수밖에 없다. 내가 활동하는 인터넷 포털 사이트의 blog나 카페, 그리고 인터넷서점에서는 특별하지 않으나 다소 좋은 우대를 받고 살고 있는데 말이다. 인문학의 정신보다 돈에 모든 것을 거는 이 사회에서는 나란 존재는 그저 이방인에 불과하다. 하기사 이방인이니 이렇게 넘보면서 글을 적는 게 아닌가?

 

아웃사이더의 입장이 되어야 비로소 다른 세계를 적을 수 있을 것이다. 그곳에 머무는 순간 그 세계에 대한 비판적 글을 적을 수 없다. 이미 그것에 물이 들여 어떤 판단력을 내리야 한다는 기준이나 좌표조차 잡을 수 없다. 아니라면 인간의 의식구조 수준일 것이다. 딱히 내가 수준이 높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입도 조금 더러운 편이고, 성격도 급하다. 그러나 그렇기에 적는 것이다. 가끔 사람들과 술을 마시면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는 필수다. 최근 일이다. 사람들이 자살하는 사회에서 노동자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옆에 같이 마시던 놈이 “그렇게 죽을 것 같으면 그 만큼 하면 뭘 못하겠어요?”라고 한 것이다.

 

나는 한편으로 조금 맞기는 하나 그 상황적 순간이 닥치면 그것도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솔직히 말하여 한국 사회에서 가장 짜증나는 부분은 바로 이런 점이다. 왜냐하면 남의 불행과 고통은 그래 흘러 보내면서 자신의 신세는 한탄한다. 물론 저런 대사를 날리는 녀석은 뻔뻔하게도 백수이면서 전에 돈 모은 다 썼다고 나보고 담배 1갑을 사기 위해 3,000원을 달라고 했다. 그때 소주를 마신 자리라 그냥 줬지만, 속으로 무척이나 짜증났다. 담배를 피우면 몰라도 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회사에 다른 직원의 이야기다. 월급이 적어서 울상을 짓고 있는데, 앞으로 결혼문제에 대해 고민했었다.

 

그런데 자살한 노동자가 생계문제에 대해서는 역시 냉담한 반응이다. 이것이 한국사회의 특징이다. 내 불행은 말해도 남의 불행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엔 서로 자기가 어렵다고 해도 결국 그 서로가 타인의 어려움을 핑계로 보는 것이다. 적어도 나 같은 경우 내 불행과 남의 불행은 둘 다 말한다. 따라서 나는 주변사람에게 ‘이상주의자’ 취급을 당하기도 한다. 현실에 대한 문제를 논하는 순간, 그것이 하나의 금기까지는 아니나 ‘이상주의자’란 명칭을 부여받는다.

자신의 기준과 틀에 맞지 않으면 무조건 거부하는 한국사회, 나도 물론 포함되겠지만 그것조차 인식조차 할 수 없는 것이 현재다. 그래서일까? 진중권 교수의 <빨간 바이러스>를 읽으면서 참으로 통쾌한 기분이 든다. 그리고 약간의 아쉬움도 든다. 내가 이래저래 인문학을 독학하고, 글을 쓰는 방법이나 전개과정을 고민하면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문체가 진중권 교수 양식이다. 뭔가 아이러니하면서도 생뚱맞은 것도 결국 큰 조류로 흘러가게 하는 그 풍자와 묘사력, 게다가 글을 읽으면 이 사람이 머리가 차갑지 마음은 뜨거운 것을 알 수 있다.

 

내가 이때까지 위에서 왜 이래저래 주절거렸을까? 대중문화와 대중, 거기에 나라는 존재의 미약함, 그리고 주변에 있었던 일화들까지 말이다. 이런 것을 <빨간 바이러스>를 읽으면 이해간다. 미디어사회에서 지식인의 자리에 네티즌이 들어서도 결국 지식인은 필요하다. 지식인이 가진 논리와 지성은 네티즌에게 무장되지 않기 때문이다. 역시 그 말대로 물량투입이란 점에서 극단의 성격을 가진다. 개인적으로 나도 다소 진보적 성향이 있으나, 이른바 한국에서 진보라고 뭉치는 행태를 보면 진보에 가깝기보단 신보수주의자에 가깝다. 극단의 좌익은 극단의 우익과 같다.

 

이런 극단적 성향 구보수와 신보수는 양쪽 날개를 펼쳐 곡예비행을 하고 있다. 마치 이것은 누가 그 진영에서 가장 극단적인 행동과 말로서 보여주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파시즘이란 것은 참으로 무서운 것이 파시즘을 대항하기 위해서는 안티파시즘이 필요하나 그것 역시 파시즘으로 넘어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 책에서는 진중권 교수의 정치철학관을 볼 수 있다. 처음에 노무현 대통령에서 나중에 민주노동당, 지금은 진보신당 계열이다. 시민주의적인 정치참여에서 한국에서 시민의식이란 것을 찾기가 어렵다. 그 이유는 극단적 이분법이 적용하기 때문이다.

 

어느 일정한 프레임에 조금이라도 비켜 가면 몽둥이찜질을 받아야 한다. 가령 노무현 대통령의 존재를 보자. 조선일보의 막말식이나 혹은 한나라당 당시 행동을 보면서 노무현 대통령의 입장을 들어주는 것보다 그 노무현 대통령을 공격한 자들에 대한 공격이다. 덕분에 반사효과인가? 노무현 대통령을 편을 드는 것처럼 보이다가, 노무현 대통령의 정치적 입장에 비판하면 진중권 교수의 말이 인용된다. 그것을 보면서 당사자는 무슨 생각을 들까? 한국의 언론은 내가 볼 때는 몽타주의 향연이다. 언론은 진실성보다 중요한 것이 공정성이다. 공정성이 없는 진실성에서 분명 누군가 한 대사는 맞아도 그 전후관계는 따지지 않는다. 그렇게 편집된 영상에서 우리는 국민들은 이분법적 사고에 의해 정의가 된다.

 

개인적으로 존 롤즈의 <정의론>이란 도서를 좋아하나, 정의라는 단어를 싫어한다. 아마 이분법적인 사회구도로서 점철해야 하는 것일까? 토크빌이란 사상가는 그 나라의 정치수준이 곧 국민의 수준이라고 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나 역시 수준이 높지 않으나 우리나라 국민 수준이 바닥이라고 여긴다. 그래서인지 주변에서 나보고 너무 지식에 맹신하지 않은가 라는 말도 들으나 지식 없는 맹신은 더 무섭다.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지식인의 죽음은 지식이 없는 자들의 포효다. 대한민국 헌법조차 보지도 않고 정치적 행위에 대해 논하는 네티즌을 볼 때마다 참 우리 미래를 맑고 맑아 물고기조차 살지 못 살겠다고 생각했다.

 

마치 조선 중후기 열녀문이 한참 세운 시기가 한국이다. 특히 중세인가? 현대인가? 편에서는 순간 사회문화에 대한 비판적인 책이 어느 순간 진중권 교수 특유의 미학연구도서 변한 것처럼 느꼈다. 예전에 읽어본 요한 하우징어의 <중세의 가을>이 나오고 움베르트 에코의 고전주의 시대를 다룬 서적이 소개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소개하면서 갑자기 미학오디세이인가? 여겼으나 그 이유는 한국이 여전히 계몽이란 단어가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계몽주의적 요소에서 계몽은 스스로 깨우치고 껍질을 벗어야 하나, 한국에선 전체주의적 상황에 따라가야 한다. 열녀문이 세운 시기의 한국이라 내가 명하는 것은 사고의 우회가 불가능한 경직사회라는 점이다.

 

그런 문제는 좌와 우, 진보와 보수, 기성세대와 신세대에서 마찬가지다. 자동차 연비문제로 나는 어느 회사가 좋아라고 말하고 있다. 정말 연비가 좋은 차는 하이브리드인데 말이다. 제3의 길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언제나 같은 것만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예술에 대해 논하기를 아방가르드 예술운동은 망해도 그 정신은 살아있다고 한다. 이해하기 위해 만들기보단 이해하지 못하도록 만든 예술, 때로는 그것이 필요하다. 늘 같은 것만 하려고 하니깐 말이다. 게다가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것도 말이다.

 

가장 나를 폭소로 만든 것은 뇌물방관 수사로 결국 자살한 어느 부산시장의 목숨을 위해 그 장례식은 부산시장 걸맞은 장례식과 그 죽음에 대한 애도로서 눈시울을 붉히는 그들이 “노동자가 분신을 해도 ‘뽀득뽀득’ 말라 있던 눈이다. 농민이 음독을 해도 ‘말똥말똥’ 굴러가던 눈이다. 서민들이 투신을 해도 ‘맹송맹송’ 시큰둥했던 눈이다. 도대체 그, 메말라 척박한 눈을 촉촉히 적신 가뭄 끝 단비와 같은 사건은 무엇이었을까? 듣자하니 수뢰 혐의로 구속되어 수사를 받던 어느 공직자의 자살이라고 한다. 평소에 아끼고 아꼈던 그 고귀한 눈물을 기껏 어느 수뢰 혐의자를 위해 흘린 것이다.”

 

사람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면 간단한 사안이 아니나, 한국에서는 그런 것이 참 코미디가 되어 버렸다. 선거철만 되면 코스프레 의상을 하고 포토제닉에 충실한 이들이 행태를 보면, 우리나라의 코미디언은 우리 국민들이 만들어주는 것 같았다. 역시 자신도 그런 게 죽어가는 노동자, 농민, 서민인 주제에 자신의 현실을 부정하고, 자신의 후예들은 자신의 길을 가지 말라고 한다. 가지 말라고 하면서도 과연 그 길을 벗어날 확률은 얼마나 될까? 대한민국 헌법은 대한민국 모든 법을 망라하여 그 모든 법보다 위에 있다. 한국의 헌법은 인권에서 생존권을 중시하나 한국은 이상하게 재산권을 중시한다.

 

겉으로는 인권이나 민주주의 공정을 외치나 실상을 보면 재산권에 대해 생계가 달린 자들에 대해 사회적 악으로 만들고, 횡령을 한 어르신에 대한 법적 처분이 부당하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는 2013년 유효하고, 이 책이 나온 2004년에도 유효했다. 물론 조건은 조금 달라진 것이 있다. 이라크 파병과 관련하여 참여정부의 기록에선 부시행정부와 외교적 조건이 달려 있었다. 최악의 상황을 피하기 위해 다른 선택, 수우미양가라는 성적순에서 가라는 것을 피하기 위해 양으로 갈 수밖에 없는 현실적 입장이 안타까운 것은 사실이다. 극단의 영역을 벗어나 새로운 대안을 찾지 않은 사회에서 <빨간 바이러스>는 정말 퍼지지 않는 바이러스다. 인체에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운이 없을 사망하고, 컴퓨터는 포맷도 해야 한다. 그러나 이 바이러스는 퍼지지 못한 것도 모자라 백신도 투여하지 않아도 앓고 있다. 우리 사회에는 바이러스가 퍼져야 하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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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3-03-24 15: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리뷰네요.
저도 심히 공감합니다.

만화애니비평 2013-03-24 15:57   좋아요 0 | URL
생각은 많은 반면 아무런 힘이 없는게 심한 우울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