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의 무덤, 스스로 추방된 자들을 위한 풍경
승효상 지음 / 눌와 / 2010년 9월
평점 :
품절


인간이란 어떻게 하면 인간일 수 있는 것인가? 철학적 의문적 사고에서 레비나스는 제1의 철학은 윤리라고 했다. 개인적으로 나는 윤리와 도덕을 분리한다. 가령 전에 베스트셀러로 팔린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는 무엇인가에서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을 많이 인용했는데, 거기서 번역자의 실수가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을 읽기전에 <윤리형이상학 정초>에서 윤리 대신 도덕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원래 독일어로 된 칸트의 원전 도서와 영어로 된 마이클 샌델 교수의 책의 번역을 다르게 봐야 한다.

 

그것은 중요한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도덕이란 단어가 왜 위험한가에서 도덕은 하나의 사회적인 인식이나 관념의 당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도덕에서 미덕이란 단어가 붙는다. 가령 한국에서 시간이 늦어 오는 것도 미덕이라거나 혹은 덤으로 끼워주는 것이 미덕이라거나 하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미덕으로 작용할 수 있으나 윤리적 판단이나 선험적 기준에서 결코 좋은 것이 될 수만은 없다. 가령 어느 도시에 온 사람이 시골에 와서 마을주민들에게 일일이 인사하면 맛있는 음식을 대접해야한다는 고정적 사고가 하나의 도덕이다.

 

단순히 도덕은 어느 국가만이 아니라 작은 소규모 사회나 공동체에도 존재한다. 그래서 미덕이란 것은 위험하다. 당시 사회적 분위기에 따라 하나의 결정적 판단에 오류로 등장할 수 있다. 특히 1789년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나자 자코뱅파이 왕당파를 제거하고, 내부적으로 만든 국민공회의 상징성을 너무 지나치게 부여한 나머지 국민공회를 비판하는 자에 대해 제거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영화 <당통>에서 실제 1793년에 일어난 일을 재각색한 팩션으로서 그 당시 로베스피에르와 같은 국민공회 정부는 제일 중요한 자유의 요건에서 양심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부정했다.

 

같이 자코뱅클럽에서 혁명을 일으키고, 내부적으로 지롱드파와 대항하며, 외세침략까지 막아낸 동료들을 어느 순간 기요틴 아래에서 화려한 칼날로 그들의 목과 몸을 분리했다. 그리고 그 시대에서 그것이 하나의 도덕이다. 도덕이란 단어가 위험한 이유는 옳은 일이 나올 수 있어도 옳지 않을 경우가 허다했다. 국민공회의 경우 그들은 모든 법적인 통제 위에 있고자 했다. 국민공회를 무시한 자는 프랑스공화국을 무시하여 국민의 아래에 있어야 할 그들이 오히려 국민의 위에 있었다. 이로서 프랑스혁명의 중요한 역할을 한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배반했다.

 

웃기는 일이다. 로베스피에르는 <사회계약론>을 항상 들고 다니며, 하나의 상징을 부여했다. 루소의 열렬한 지지자가 루소의 가르침에 가장 반대되는 행위를 했으니 말이다. 도덕이란 그래서 무서운 것이다. 처음에는 옳은 일을 해도 뒤에 지나가면 망가질 가능성이 있다. 그런다고 이런 역사적 모순을 부정만 할 수 없다. 지금 프랑스가 문화, 예술, 철학의 나라가 된 이유는 바로 이런 연유다. 프랑스 파리에 3대 박물관인 루브리 박물관이 있다. 이것이 대중에게 공개된 이유는 국민공회가 국민을 위해 미술관으로 모두 공개한 이유다.

 

모순의 역사에서 그렇게 인간의 역사는 진보적으로 때로는 후퇴하기도 한다. 변증법적인 상황에서 우리는 과도기 뒤에 도래하는 과도기를 맞이한다. 하지만 그것에 대한 대가는 너무나도 크고 잔혹하며 때로는 숭고하다. 영화 <당통>에서 당통은 자기의 목이 잘리기 전에 사형집행인에게 부탁을 한다. 사형집행인에게 자기 목을 들고, 자신의 얼굴을 파리의 수많은 시민들에게 보여 달라고 말이다. 그는 어긋난 프랑스대혁명의 취지를 군중에게 각인하기 위해 죽음을 선택했다. 하지만 1794년 테르미도르반동과 나폴레옹의 등장으로 프랑스대혁명은 끝이 난다. 영화 <레미제라블>처럼 19세기에서도 계속 혁명은 일어나도 왕당파와의 끊임없는 투쟁을 벌인다.

 

 

그래서일까? 역사란 언제나 힘이 있는 자에게 영광만 돌아간다. 그리고 그것은 그 시대의 당연한 미덕이 되었다. 힘과 권력에 대한 인간의 욕망은 인간 스스로 신화를 만들어내고, 그 신화의 벽에 폭력, 억압, 착취라는 것을 만들었다. 민주자유주의국가에서는 그런 것들을 부정하나, 아직까지 이 3가지 단어는 전혀 사라지지 않는다. 숭고한 자유와 평화, 그리고 사랑이란 슬로건은 여전히 빛을 보고 있다. 이 3단어가 아무리 사람들이 외쳐도 타인들은 왜 고통 받고 있을까? 그것에 대한 의문은 곧 윤리적인 철학적 사고로 이어지나, 가끔 그것이 거론되는 것이 바르지 않은 것 같다.

 

 

그것에 대한 의문을 건드는 사람은 마치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들거나 또는 용의 비늘을 건드는 행위와 같으리라. 이익도 되지 않고 충분히 자신에게 불리한 길을 선택하지 않아도 되는데, 그것을 선택하는 사람은 역사에 언제나 있는 법이고, 그것을 택하여 그의 생전에는 언제나 쓰라린 패배와 고통, 좌절, 그리고 절규만이 들린다. 때로는 허무하게 죽기도 억울하게 죽기도 한다. 내 인생에 길이 남을 영화 <당통>에서 스스로 기요틴 아래 목을 받친 당통이나, 당통을 죽일 수밖에 없던 로베스피에르가 존경하던 장 자크 루소, 노동자들을 위해 스스로 편안한 길을 버린 카를 마르크스, 러시아혁명의 영웅이나 스탈린에게 살해당한 레온 트로츠키 등을 보면 언제나 역사에서 새로운 바람을 부는 이에게 비참한 죽음만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비참하게 만든 자는 권력을 잡았고, 아주 후세에 이르러는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받았다. 물론 우리나라에도 그런 인물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단지 우리사회가 과도기란 이유로 그들의 이름을 말하는 것조차도 어렵다. 왜 그럴까? 대한민국 헌법은 국민이 주인이고, 양심의 자유가 있는데 말이다. 헌법에서 제시하는 민주주의정신과 현실의 도덕과는 괴리감으로 가득하다. 바로 그 괴리감에 대하여 의문을 던지고, 그 의문으로 인해 갈등이 생겨 그것을 차근차근 해결해가는 것이 진정한 민주주의사회다.

 

 

민주주의라는 사회구조는 절대로 평온하지 못하다. 오히려 시끄럽고 때로는 논란이 되어 사회적 이슈가 되는 일이 많다. 민주주의라는 것은 사회 내부의 갈등을 조율하면서 성장해 가는 것이다. 문제는 그것을 스스로 짊어가는 이가 누구냐는 것이다. 말과 행동은 일치될 수 없기에 그 행동의 주체는 항상 모든 지탄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즉, 상징적 존재가 되어야 하나 그 상징적인 존재가 신성시되는 것이 아니라 그를 벌거숭이가 될 정도로 고통의 굴레를 지나가야 한다.

 

 

한국이란 나라에서 그런 짐을 지고 가는 것은 너무나도 위험하다. 물고문에 전기고문에 죽기도 하고, 살아도 몸과 정신이 성치 않아 고통스럽게 눈을 감는 이들도 있다. 이번에 소개한 승효상 교수의 <노무현의 무덤, 스스로 추방된 자들을 위한 풍경>은 바로 그런 굴레의 짐을 스스로 지고 가다 운명을 맞이한 어느 남자에 대한 추모서적이다. 책 본문에 인상 깊은 구문이 있다. 승효상 교수는 네이버캐스트 지식인의 서재에서 2번째로 나올 정도로 아주 박식하고 뛰어난 인물이다. 세계적으로 건축학으로 인정받으며, 한국종합예술대학교 학생들에게 건축을 가르친다.

 

 

그의 건축이 되던 노무현 비석, 그것은 아주 특별한 의미가 있다. 그것은 예술이야 말로 삶이고 정치적 표현이기 때문이다. 예술은 삶을 광학적으로 보고, 미학이란 것은 철학의 칼로 예술을 가르는 것이라고 한다. 노무현의 죽음을 삶의 광학으로 보면 어떤가? 삶의 광학에서 그의 죽음은 그저 허무함과 아쉬움, 그리고 원망까지 섞여 있다. 오늘 회사에서 다른 부서의 상사가 자신은 노무현이 죽어서 싫어하게 되었다고 한다. 왜 죽어야 하는 것이냐고 한다. 그런 말은 아는 동생으로부터 들었다. 하지만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던 그의 입장을 내가 직접 알 수 없으나, 그렇게 할 수밖에 없던 것은 분명 안타까운 일이다.

 

 

인간의 자살을 두고, 사회적 타살이라고 한다. 스스로 권력으로부터 추방시키고, 이제 스스로 세상과의 인연으로부터 추방시켰다. 쓸쓸한 한국의 지식인이던 한 시민주의자는 그렇게 삶을 마감했다. 승효상 교수는 <오리엔탈리즘>의 에드워드 사이드가 저술한 <권력과 지식인>을 두고 노무현에 대해 논한다. “지식인이란 지역성, 주관성, 현재의 시점이라는 각각의 것들과, 보편성이라는 것 간의 상호작용에 반응하며, (중략) 애국적 민족주의와 집단적 사고, 그리고 계급, 인종, 성적인 특권의식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지식인인 한, 스스로 경계 밖으로 추방하며, 관습적인 논리에 반응하지 않고, 모험적 용기의 대담성에 변화를 재현하는 것에 가만히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것에 반응하는 자여야 한다.”고 했다. 이때까지 프랑스혁명과 역사에 대한 명제로 통해 우리가 인류문명이 오면서 되풀이되는 비극적 인간의 모습에서 무엇이 바뀌고 찾았는가? 그런 노무현의 죽음이기에 그의 죽음은 상징성에 대한 부여가 쉽지 않음이다. 예술에서 그 중에서 특히 건축이란 인간에 대하여 유물론적인 구조이면서 가장 관념적인 부분을 지배하기 쉽다.

 

 

건축물을 보면 우리가 사는 집과 아파트, 빌딩과 조형물, 심지어 오랜 시간을 견딘 유적에도 존재한다. 건축물에 대한 미적인 부분에서 서양에서는 당연히 성당과 교회일 것이다. 그것들은 예술이기도 하면서 아니기도 하다. 예술에서 숭고함을 너무 추구하면 그것은 예술이 아니라 하나의 기적과 같은 신앙이다. 노무현의 죽음은 예술에서 어떻게 그려야 하는가? 그의 무덤은 작은 비석만 놓여 있다. 높지도 않아 거의 바닥에 누워있고, 비석에 새겨진 글자는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라고 되어 있다.

 

 

그는 여전히 시민주의자였다. 아마 법을 전공하였고, 대한민국 헌법 역시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기본 되는 점과 존 롤즈의 <정의론>과 같이 정치적 자유주의를 추구한 대통령이었다. 그것에 대한 상징은 역시 시민이었다. 시민 대 시민, 만인 대 만인의 투쟁보다는 시민 대 시민이라는 동등한 위치에서 보자는 것이다. 그의 비석은 우뚝 서있지도 않고 누워있다. 그의 비석 주변의 광장은 신성한 장소이기보단 누구나 밟을 수 있는 공간이다. 경계로 되어 있는 부분은 그의 작은 비석 주변이다.

 

 

그 누구라도 노무현의 비석에 동등한 위치에 있을 수 있다. 그것이 승효상 건축가가 바라본 광학적인 삶이다. 노무현의 비석으로 가는 길은 독특하다. 입구에서 시작하여 마치 역삼각형이 퍼지는 모습, 그 앞에는 작은 호수 수반이 있다. 물이라는 공간 즉 생명을 말한다. 생명이 깃든 수반, 그것을 시작하여 죽은 자의 비석으로 간다. 노무현의 광장은 살아있는 자의 삶과 죽어있는 자의 죽음을 연결하는 통로다. 단지 그 수반의 모양은 미국 페미니스트 예술가인 주디 시카고의 작품인 <디너파티>와 흡사하다.

 

 

조금 여성의 자궁을 상징하는 생명의 공간 같기도 하나, 그 종점은 죽은 자가 있다. 하지만 죽음은 한 갈래로 모이는 것이 아니라 가면 갈수록 퍼진다. 삶과 죽음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언제나 하나다. 살아가는 것은 곧 죽어가는 것이고, 인간은 삶을 영위하면서 죽음의 시간 앞에 선다. 그래서 죽었다는 것은 살아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실존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 역삼각형의 공간을 보면 우리는 여러 갈래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넓은 공간 중심에 노무현의 비석이 외롭게 누워있다.

 

 

그 외로운 비석 옆을 걸어가면 많은 직사각형 돌들이 틈틈이 메운다. 그의 삶과 죽음까지도 사랑하고 그리워하고 아파하던 모든 이들의 소원과 명복들이 들어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작은 비석까지 밟고 갈 수 있다. 비석으로 이루어진 길을 밟으며 같이 그들의 마음에 공감한다. 이 광장은 끝까지 시민 대 시민으로 남은 것이다. 스스로 권력 속으로 은폐하여 신화화하지 않으려한 노무현, 하지만 그의 그런 모습이 그를 신화의 주인공으로 만들었다. 그는 신이 되었다. 인간의 욕망을 투영한 신이 아니라 인간의 억압을 해방하려고 한 신으로서 말이다. 그래서 그는 희생양이 되어야 했다. 사회적 타살이란 자살을 말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곰곰생각하는발 2013-03-19 2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500점이길래 대단하다 했는데 20000점이니 후덜덜하네요....ㅎㅎㅎ

만화애니비평 2013-03-19 22:43   좋아요 0 | URL
이게 다 덕심인겁니다!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