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속 대통령 - 노무현, 서거와 추모의 기록 1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엮음 / 한걸음더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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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적는 나는 그 날의 허무와 감각적인 마비, 그리고 현실로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내 가슴속에서 타오르기 시작하는 분노, 슬픔, 분노, 좌절, 절망, 아픔, 고뇌, 번뇌, 충격, 충돌,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분들을 나를 덮치려 하고 있다. 책이라는 것은 이성적으로 보고 판단하고 생각해야 하는데, 도저히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도 판단할 수도 없었다. 오직 나에게서 분출되는 것들은 피로로 가득한 내 두 눈 속에서 흐르는 뜨거운 눈물과 입으로 말하지도 못할 한숨이었다.

 

그날의 기억을 어떻게 지우랴? 그날의 일들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나는 이제 그것을 뛰어넘지 못하는 패배주의에 주저앉은 것 같았다. 내 마음을 이토록 괴롭게 하면서 눈물을 하염없이 쏟아내게 하는 사람, 노무현, 나는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었다. 하지만 할 수가 없었다. 점점 가난해지는 서민들, 나이가 환갑이 넘었는데, 나중에 아들 결혼비용 만들어보겠다는 내 아버지, 수축해져가는 내 지갑과 은행잔고들, 내 개인적인 상황, 주변 상황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답답하고 씁쓸하다.

 

물론 모든 생활이 정지될 정도는 아니나, 점점 박탈감으로 가득해지는 나와 주변사람들의 얼굴표정을 보면서 더욱 더 노무현이 그립다. 한때 봉하마을에 가는 것조차도 두려웠다. 나라는 자신의 무력함과 나약함에 좌절감을 맛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좌절감을 이기기 위해서 그리고 아픔과 고통을 넘어 새로운 인생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가시밭길을 넘어야 할 관문이다. 이제 추모 3주기를 맞아 내 모든 슬픔을 뱉어버리고 싶으나, 뱉어보려도 더욱 가슴만 아플 뿐이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한다 말인가?

 

“내 마음속 대통령” 노무현, 그는 정말 시대와 현실에 굴하지 않고, 정면으로 부딪힌 인물이다. 기득권과 특권계층에 대해 끊임없이 대항하고, 그들과 맞서다가 상처도 받고, 많은 오명 아래 괴롭게 가슴이 타들어갔다. 한국에서 살다보면 과연 도덕이 무엇이고? 정치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면 회의적으로 돌변한다. 독일의 자유에 대한 모순과 왜곡을 신랄하게 조롱하던 니체가 과연 “정치는 권력에 향한 의지”라는 말처럼 한국에서 도덕과 정치는 말 그대로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인식할 수 있는 하나의 role이 있었다. 그것은 인간적인 가치나 윤리적인 가치가 아닌 힘이라는 하나의 상징으로 모든 도덕과 정치가 변질되었던 것이다.

 

그는 말 그대로 그런 한국의 사회에 뿌리깊이 박혀있는 role과 싸웠다. 빽도 없고 힘도 없으면 그저 입 다물고 닥치고 박혀 있어야 한다는 것이 결국 최소한의 상식이 아닌 몰상식과 폭력으로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에서 말이다. 노무현의 죽음은 그런 사회에서 마지막으로 자신의 몸을 날려서 거기에 대항하던 하나의 상징이고, 그 상징으로서 기득권과 특권계층에 대한 상징에 대항하려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에 대한 언론과 여론은 너무 심상치 않았다. 검찰에서 분명히 확정되지 않은 정보가 다음날 특급 기사로 표지로 실려 생생하게 전파되고 있었다.

 

최근 차명계좌 관련하여 검찰에서 그것은 <사모님의 생활비를 여비서 통장 200만원에 입금한 것이었다.>라고 인정했다. 무참히 죽음의 사지로 몰아넣어 검찰마저도 그런 발표를 했다. 왜 사실이 2009년 5월에 나오지 않았을까 했다. 그저 생활비를 관리하던 여비서의 통장까지 스캔들로 만들어야 했으니 말이다. 그때는 오죽했을까? 측근비리라고 하여 증명되지 않은데, 마치 사실로 만들려고 했고, 증거가 나오지 않자 거래고객과 방문자들 심지어 고객들의 정보까지 억지로 검색했다. 자주 식사했었던 식당과 허리 치료를 받기 위해 진료한 병원까지 털었다. 정말 이것이 정치의 하나의 순리고, 인간에 대한 배려인가?

 

죽음에 직면의 고인은 어떻게 보았을까? 자기 주변의 사람들로 자신에게 겨누어진 화살은 받아들임은 분명 옳은 일이다. 하지만 아닌 일까지 겨누고, 진실의 메아리는 벽에 가려 막혔다. 억울한 일이 있으면 거기에 의탁하는 것이 진정한 법의 수호가 아니던가? 한국에서 법이란 그저 권력을 향한 도구로 변질되었다. 미디어는 진실이 아니라 진실을 새롭게 만들어내는 형이상이상학(pata-physics)적인 공상과학 소설처럼 변했다. 그 공상과학 소설의 끝은 전직 대통령의 자살이란 커다란 충격까지 이어졌다.

 

인간의 생명은 간단하지 않다. 우주만큼 귀한 것이 인간의 생명이라 했음에 자기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인간들이 살아간 인생이란 과연 얼마나 잔혹하고 슬프고도 분노와 광기로 쌓여 있을까? 그러나 그 죽음이 개인의 이유인가? 아니면 개인의 이유를 넘어 하나의 시대적인 비극일까? 노무현의 죽음은 어느 대통령의 죽음으로 볼 수 없다. 막막하고 답답하고 괴로운 우리 시대의 서민들 약자들 그리고 나 같이 아웃사이더적인 인물을 대신하여 죽음으로 지키려고 한 것이다.

 

노무현의 죽음은 10대 소녀부터 나처럼 30대 남자, 더 나아가 환갑 넘은 어르신들의 눈에서 눈물을 흘리기 했다. 그의 죽음은 우리들 가슴 속에 받아들일 수 없었다. 지킬 수 없어 멀리서 그저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본 일개 서민들에게 그저 악몽에서 일어난 것처럼 보였다. 자기에게 너무 엄격하고, 남들에게 너무 관대한 바보 같은 사람, 내 주변 사람들 중에서는 그의 죽음을 너무 못마땅하게 여겼다. 이때까지 그 많은 시련과 고통, 장애들을 넘어간 일어선 그가 이토록 허무하게 가냐고 말이다.

 

하지만 더욱 더 큰 시련과 고통, 장애는 그의 죽음이 아니라 그의 죽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많은 사람들이었다. 그의 죽음은 편안하지 못했다. 국민장을 하느니 마느니 에서 갈등을 빚었고, 노제에서 살풀이를 하는데, 정부 측에서 일방적으로 등을 돌렸고, 시민들이 만든 자율분향소에는 경찰들만 즐비하게 놓여있었다. 처음에는 시민들의 분향소를 만들려고 하면 철거하던 경찰들이 시민들의 항의에 철거했지만, 어떤 건물 앞에는 버스를 세우고 뒤에는 물대포차량이 있었다고 한다. 상식인가? 정상인가?

 

망자에 대한 예우나 격식에 대해 예초부터 없었다. 슬픔과 눈물로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공간이나 도움을 주지 못할망정, 그들을 예비 집회자 내지 시위자로 판단했다. 아니 오히려 이런 점들을 집회 내지 시위로 만들 수 있었던 자극제가 아닌가 싶다. 하지만 이럴 때에 집회와 시위를 한다면 장례에 대한 예의도 망자에 대한 존중도 아니다. 그래도 마음은 슬픔과 분노로 찰 수밖에 없었다. 특히나 장례행사가 마무리되던 때에 노란색 물건조차도 가지고 못하게 하던 공권력 앞에서 최소한의 자유마저 박탈했다.

 

노무현의 죽음에서 오늘날 한국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고 느끼고 있는가? 물론 사람마다 가치관이 다르니 이렇게 저렇게 옳다고만 여길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의 죽음이란 그렇게 간단하지 않은 일이다. 최근의 정철 카피의 “노무현입니다”를 읽었다. 그가 대통령 시절 사진 찍기 싫어하던 그의 모습을 담은 사진들이었다. 거기에 순간적으로 찍힌 그의 표정에는 어떤 권위의식이나 권력을 탐하던 모습 따위는 없었다. 오로지 인간 노무현만 존재했다. 가끔 나는 노무현의 신화를 생각한다.

 

노무현은 이미 육체적으로 죽었다. 존재하던 인간이 실존적으로 존재하지 않게 되었고, 그의 진행형적인 삶은 이미 모두 마감했다. 하지만 그는 신화적인 존재로 아직도 살아있다. 그의 죽음에 대해 인정하면서 그가 살아있다고 하는 신화적 존재처럼 과연 그는 살아 있음이 분명하다. 아직도 내 마음속에 살아있다. 단지 나는 그가 남긴 숙제를 하나씩 생각하는 것이 옳은 것 같다. 최근 읽은 책 중에 존 롤즈의 “만민법”을 읽었다. 병실에서 누워 죽어가는 그날까지 책을 집필하던 위대한 미국철학자 존 롤즈의 글을 읽으면 이런 말이 있다. 단어가 모두 기억나지 않으나 어렴풋이 이런 내용인 듯하다.

 

<진보란 역사적 상황에서 역사적 인식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역사적 인식조차도 철학적 인식에서 나온다.> 라고 말이다. 과연 영문이 The Law of Peoples처럼 Peoples란 만민도 되나 시민도 된다. 노무현이 꿈꾼 정치적 사회적 가치는 시민사회였다. 시민은 단순히 오늘날 살아가는 사람 중에 한명이 아니라 그 한명이 정치적 자유주의에 입각하여 올바른 가치관으로 통해 사회를 이끌어 가는 대다수의 리더이다. 물론 시민들을 양성하기 위해서는 세계에 많은 지식인들은 시민들을 만들고 계속 유지하기 위해 글을 적고 가르쳐야 한다. 과거와 현실에 대한 인식만이 아니라 그 인식에 대한 재인식들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그런 세상을 만들기란 정말 너무나도 어렵다. 하지만 내 마음속 대통령이 살아있는 한 나는 계속 정진할 수밖에 없다. 그의 죽음보다 더 슬픈 것은 그가 단순히 죽음과 동시에 사람들의 뇌리에 잊혀가는 것이 아니라 그가 추구하던 가치관들이 모두 사라지는 것이다. 비록 실패하고 좌절했다고 하더라도 그 실패와 좌절이 반드시 모든 것을 실패했고, 좌절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실패와 좌절로 통해 오늘날 우리가 그를 타산지석 삶아 배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럴수록 마음이 아프다. 그의 진실함이 너무 가깝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는 영원한 내 마음속 대통령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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