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의 미래 - 다음 세대를 위한 민주주의 교과서 노무현 대통령의 진보의 미래
노무현 지음 / 동녘 / 200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페이지 296에 나온 문구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의 경향들이, 사회 문제를 전부 이성적 논리로 규정하려고 하는, 하나의 사상으로 세계를 통일하려고 하는, 공산주의든 자본주의든 하나의 사상으로 모든 것을 해명하려고 하는, 근대 계몽주의에 대한 비판이거든요?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이 문제는 제기했는데 답이 없다는 거죠.”

 

이 문구는 참고로 故 노무현대통령의 마지막 육성기록과 집필기록을 모아 그 후에 그가 서거할 때 발간한 도서이다. 진보의 미래라고 말이다. 진보의 미래란 말에서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진보와 보수 이원화된 구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뛰어넘으려는 노력이 여실했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의 페이지 296에 문구가 인상이 깊다.

 

이전에 나도 이런저런 책을 보면서 사상, 철학, 이념 등 다양한 관념에 대해 혼자서 공부하려고 허둥거리고 있을 때 저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사상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들어가서 기존 사회의 문제를 알고 말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제일 중요한 부분이 있다. 그 뒤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바로 이런 질문에 대한 답변이 노무현의 진보와 미래라는 점이다. 그의 진보와 미래는 모든 것을 급진적으로 변화하거나, 혹은 외부의 변화에 부동의 자세로 있자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 모든 것을 안고 가고, 새롭게 일어나가자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지도자를 바꾼다고 달라지진 않는다.”에서 많은 공감이 일어났다.

 

지도자 한 명 교체되어도 나라 그 자체가 개선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 지도자를 뽑게 한 시민과 그리고 그 밑에 있는 정치적 조직이 우선적으로 많은 영향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故 노무현대통령은 그런 점들을 이미 오랜 전부터 간파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대통령을 맡을 때까지 늘 이런 말을 들은 것 같다.

 

한쪽에서는 좌파대통령, 다른 한쪽에서는 신자유주의자 신봉자라고 말이다. 어떻게 보면 그가 있을 수 있는 자리는 좌파와 우파도 아닌 그 어디에 내놓아도 안주할 공간이 없었다. 우리나라에서 중도를 지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분명 그는 진보적인 대통령이었다. 단지 그 진보적인 부분을 국제적 동향과 국내 여건을 배제하지 않았기에 보수적인 국가에서 진보를 추구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늘 앞길에 막히고 벽이 늘 가로막고 있었다. 역사는 한 번도 당신을 비켜가지 않음이 여전히 증명했다. 진보의 미래에서 그가 추구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사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계속 깜짝 깜짝하고 놀랐다. 왜냐하면 그가 적어놓은 글을 보면서 故 노무현대통령이란 인물이 얼마나 많은 공부와 사유를 하고 있었나이다.

 

중간 중간에 등장하는 고전 철학자의 이름(장 자크 룩소), 최근에 등장하는 사회 및 경제학자(장하준 교수, 폴 크루먼, 자크 아탈리) 등 많은 대석학들의 책들을 꾸준히 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생각난 철학자는 미국 위대한 현대철학자인 존 롤즈였다.

 

이전에 존 롤즈가 저술한 정의론이란 도서를 본 적이 있었다. 페이지가 600 이상 분량에 내용도 무척이나 어려웠으나, 그 정의론에서 본 내용이 故 노무현대통령이 저술한 진보의 미래에서 많은 합의점을 보았던 것이다. 정의론에서 존 롤즈는 고대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칸트에 이르기까지 많은 철학자에 대한 연구도 하였겠지만, 그는 자신의 원하는 사회상이란 최소수혜자에 대한 초점이었다.

 

기회의 균등, 최소약자에게도 꿈과 미래를 줄 수 있다는 희망을 말이다. 물론 정의론에서 존 롤즈는 개인의 역량과 능력도 중시하고, 개인의 능력에 따른 성공, 성공에 따르는 부와 명예 역시 인정하였다. 단지 그 과정에서 그런 부와 명예를 (사회구조적으로) 박탈감을 느끼지 말아야 하는 것이 그의 정의론이었다.

 

그렇게 하려면 교육의 기회, 최소생존의 기회가 필요했다. 따라서 최소수혜자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어야 말로 인간이 재산이고 보물이라는 가치관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어느 강력한 지도자가 나서서 하겠다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과거 독일 히틀러는 나치즘이란 극단적인 선택으로 통해 국가가 모든 것을 통제하여 자국민을 모두 가난에서 벗어나게 했지만, 그 병폐로 전쟁이란 큰 위협을 안겼다.

 

그렇다면 지도자의 역량도 중요하다면 그 지도자를 제대로 지지하고 선택할 수 있는 정치권에 대한 청구자들도 필요하다. 진보의 미래는 바로 “정치체제 대한 권리(에티엔 발리바르 도서 제목 인용)”를 올바르게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했다. 사실 故 노무현대통령도 지적한 것처럼 지도자만 바꾸는 것만이 정답이 아니었듯 말이다.

 

전복해도 운영체계에서 과거와 별반 차이가 없다면 아무 의미 없는 일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런 잘못된 기로에 들어가지 않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은 시민들이 늘 깨어있기를 바라야 한다. 그것은 결국 교육의 기회이고, 교육은 누구나 받을 수 있을 공평성이 있어야 한다. 가난하거나 생계의 문제로 교육의 기회를 놓치는 것은 결국 그 개인에게는 앞날의 보장 즉 미래에 대한 불투명성으로 이어진다.

 

발터 벤야민이 자유라는 것은 자본주의국가에서 자본의 차이로 인해 나누어진다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결국 가난에 의한 기회의 상실은 경제적인 여건의 악순환으로 이어지고, 경제적인 가난은 결국 그 개인에게 자유의 한도를 상실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을 극복하는 것은 교육이라는 점이다.

 

교육은 국민들에게 정치적인 참여의식 증대만 부여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에 대한 투자는 그것 자체가 사회적인 재력이 된다는 점이고, 차후에 국가 경쟁력으로 통한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을 읽고 글을 적는 엔지니어 입장에서 故 노무현대통령이 말하는 기술전문 관료생성과 더불어 사회간접자본 충원은 곧 우리 사회를 더욱 튼튼하게 하고, 급변하는 세계정황에 크게 대응할 수 있는 밑바탕도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너무 많은 것들이 필요하고 바꾸어가야 한다. 현재로서는 과도기적인 상황이라 볼 수 없는 것 같다. 위에 명시한 것처럼 그는 중도적인 자세로 진보의 미래를 적어갔다. 보수든 진보든 어떻게 보자면 이 둘 세력은 결국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준비해야 할 존재이다. 진보의 미래에서 정말 진보적으로 미래를 투영한다고 하나, 그것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대안이란 점들을 중시했다. 진보의 미래에서 진보는 진보 안에서 갇혀할 것인가? 아니면 보수로 돌아가자고 해야 하는 것인

가?

 

처음에 내가 인상 깊은 문구인 포스트모더니즘처럼 이 모든 것을 지적해도 대안 없는 둘 사이에서 방황하기보다는 둘 사이에서 다소 진보적인 관점으로 앞으로 나가려는 것이 故 노무현대통령의 생각인 것 같았다. 그러나 마음이 아프게도 한국에는 진정한 중도주의란 불가능한 모양이다. 중도는 양쪽의 공격을 받아야 그의 모습이 내 뇌리 속에 깊이 박혀있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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