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우울한 날들에게
마이클 킴볼 지음, 김현철 옮김 / 갤리온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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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내 우울한 날들에게 나온 주인공 Mr. 조너선에게 먼저 추도의 인사를 건네고 싶다. 물론 그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은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詩學)에서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다” 처럼, 조너선의 이야기는 시라고 말할 수 있다. 그의 시는 현실 속에 살아가는 불운한 어린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모방된 현실 내지 재현된 현실이라 말해주고 싶다.

 

조너선의 자살을 읽어가다 보면 그의 일기를 읽고, 그가 남긴 메모와 스크랩, 주변 사람들의 증언과 기록들이 외롭게 죽어간 조너선의 과거를 찾아간다. 불운하게 죽은 조너선을 찾아가는 사람은 조너선의 단 하나뿐인 동생인 로버트다. 로버트는 자기 형인 조너선의 죽음을 통해 그의 행적을 추적한다.

 

그의 일기를 찾아 그의 아버지를 찾아 그의 기억을 더듬어 로버트는 어린 시절 형을 돌이켜 보려고 한다. 그토록 문제만 일으키고 남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형을 말이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이내 곧 후회를 불러 일으켜 왔다. 아니 그 모든 비극적인 결말은 결국 자신도 가해자 중에 하나였다.

 

형인 조너선은 너무 우울하고 슬프고 거기다 못해 이 세상 모든 것으로부터 외면당한 남자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제일 처음 대하는 존재는 어머니고, 그 다음에 어머니 주변 사람이다. 어머니인 Mrs. 앨리스는 아들인 조너선과 로버트를 끔찍하게 아끼던 좋은 어머니였다. 조너선이 괴로워하면 언제나 안아주던 어머니이었다.

 

그런 앨리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조너선은 비뚤어진 청소년기와 청년기, 그리고 어른이 되어 일을 하고 결혼까지 함에도 불구하고 조너선은 안식처를 얻어내지 못했다. 오히려 과거의 망령들이 그를 죽을 때까지 붙잡고 늘어지기 시작했다. 이 모든 것은 결국 인간의 시작이 어디서부터인가? 라는 근원적인 부분이다.

 

인간의 근원은 어머니가 존재하는 가족이란 커뮤니티이다. 인간이 가지는 최소한의 사회규모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모이는 곳은 가족이란 뜻이다. 그런 가족이란 인간적 유대가 깨어지면 어떻게 인간이 망가져 가고, 그 망가져 가는 인간이 얼마나 괴롭고 외로워 눈물이 앞을 가리야 하는 일들이 생기는지 알려준다.

 

소설의 비극적인 주인공 조너선은 항상 강박관념에 시달려왔다. 그의 강박관념은 자신도 알고 있었으나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인간은 이성이란 사유로 통해 말과 행동을 하는 것은 분명하나 그 이성 안의 본질적인 감정과 무의식의 세계는 이성의 통제가 한계가 있었다. 조너선의 무의식 속에 갇혀진 우울과 공포는 이미 어른이 되어서도 존재했다.

 

그 모든 배후는 조너선을 세상에 나오게 한 아버지 토머스였다. 토머스는 젊은 시절 제법 인물도 괜찮았고, 월급도 좋았던 남자였던 모양이었다. 아마 어머니 앨리스와 만나기 전에도 많은 여자와 만나 그는 청춘을 누렸을 것이다. 문제는 어머니 앨리스와 만나면서 앨리스가 임신을 했고, 피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국 앨리스는 심한 복통에 괴로워하면서 정해진 출산일로부터 2주나 지연되었다.

 

당시 계절은 매우 추운 겨울, 밖에는 심한 눈보라로 차들이 도로에서 도저히 달릴 수 없었다. 그때 심한 복통이 앨리스를 덮친 것이다. 어렵게 겨우 제설차의 도움으로 병원에 가서 무사히 조너선을 출산했으나, 조너선의 탄생은 가족들에게 행복이란 대신 불운 내지 비극이었다. 아버지 토마스는 조너선을 매우 싫어했고, 그것이 나이를 먹어가며 조너선에게 누적이 되어버렸다.

 

어린 시절 아이들과 그보다 어린 아기들은 매우 감정에 민감하고, 주변 상황에 그대로 몸에 베여 버리는 시기이다. 조너선은 그때부터 이미 비뚤어져 가고 있었다. 아버지에게 미움을 받고, 겨우 어머니에게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몇 년 뒤에 태어난 앨리스의 두 번째 아들인 로버트는 조너선에게 하나의 위협이었다.

 

로버트가 나오면 자신을 유일하게 바라보는 어머니가 자기를 사랑해주지 않을 것이란 점에서 말이다. 그런다고 앨리스는 로버트가 태어나도 여전히 조너선을 사랑했다. 조너선을 위해 그녀가 바친 헌신은 마음이 아프다. 일일이 조너선을 챙겨주고, 지켜봐주고 학교를 다른 곳에 갈 때도 짐도 챙겨주었다. 정신병원에서 처음 진료 받을 때 조너선의 자신감을 채워주기 위해 좋은 옷에 치아교정까지 해주었다.

 

특히 인상 깊은 점은 아버지 토마스가 조너선을 심하게 구타하려 할 때 옆에서 앨리스가 막아준 것이다. 대신 어머니 앨리스는 밤에 아버지 토마스로부터 심한 구타를 당했다는 내용이다. 조너선은 이런 기억 속에서 계속 성장했다. 아버지 모든 것이 저주했고, 아버지로부터 도망치기 원했다. 죽는 그 순간까지 아버지를 보지 않으려고 했으며, 그의 죽음 전에 유언은 하나의 저주였다.

 

저주의 주문이 아버지에게 돌아가도록 한 것이다. 그의 모든 인생은 아버지로부터 시작하여 우울증과 편집증으로 이어졌다. 키도 크고 아주 멋진 사랑스러운 여자 사라와 살아가면서도 조너선은 그의 우울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사라의 기억에서도 그녀는 조너선의 일들을 보이면서 그가 얼마나 심한 병세를 가지고 있었는지 알고 있었다. 자기도 못알아 봤다는 기억만으로 괴로워했다.

 

그러나 조너선의 기록에는 그녀가 매우 슬픈 얼굴로 울고 있는 사실도, 자기도 너무 슬프고 우울한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알고 있어도 제대로 말할 수 없었다. 그의 이성은 마지막까지 놓친 게 아니라 표출될 수 없었다. 분명 모든 것이 자신이 원하는 바로 될 수 없으나 그는 강박관념과 편집적인 증세로 그렇게 되자고 신념하기를 원했다. 물론 이룰 수 없었지만, 그것이 되고자 알 수 없는 행위를 하였다.

 

남들은 이해할 수 없었으나, 오직 본인만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그의 일기를 보고 로버트는 당시 자신의 눈에서 형은 그저 문제아이었다. 그렇지만 그의 일기로 통해 보는 형은 지극히 정상은 아니나 그 모든 일들이 형의 문제가 아니라 형의 주변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로버트가 본 조너선은 어떤 일을 저지른 것에 대해 모두 기억하고 그것에 대해 자기의 입장은 명확히 서술했다.

 

게다가 자신의 과오도 자신이 저지른 실수도 알았다. 물론 거기에 대한 사과와 후회도 알았다. 죽기 전에 자신과 관련된 모든 사람의 이야기까지 적어놓았다. 과연 그가 제 정신만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었을까? 어째든 이 일기를 본다면 우리 주변에도 그런 사람이 엄청 많을 것이다. 사소한 뭔가에 집착하여 현실이란 공간을 제대로 볼 수 없는 인물을 말이다.

 

또한 생각해보면 나도 조너선과 같은 증세가 아니나, 그런 정신적인 억압이나 우울은 있다. 뭔가 나 자신이 갇혀있고, 터질 수 없는 응어리 같은 것이 말이다. 조너선의 경우 정말 정신병적인 증세가 있겠지만, 그런 증세의 표출의 강약일 뿐이지 우리 인간 역시 조너선처럼 뭔가 과거에 시달리거나 거기에 자신의 마음을 죽이는 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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