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당 선언 - 세계 역사를 바꾼 위대한 선언 돋을새김 푸른책장 시리즈 17
칼 마르크스 & 프리드리히 엥겔스 지음, 권혁 옮김 / 돋을새김 / 2010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참으로 독특한 인물들이다. 그들은 상당한 엘리트 계층이었다. 우선 마르크스는 당대 독일의 학문열풍으로 일으킨 헤겔 변증법에 대해 상당한 수준을 가지고 있었으며, 거기에다 역사, 문학, 철학까지 두루두루 면모를 가진 지식인이었다. 여기에 엥겔스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가 공장주로 있어서 풍요롭게 지낼 수 있었던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모습을 관찰하게 되면서 부르주아 계급이면서 그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대해 죽는 그날까지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다.

그런 그 2사람이 만나 만든 공산당선언의 가치는 매우 역사적으로 이례적으로 독특하다고 볼 수 있다. 내가 20년 전후의 마르크스라는 이름은 함부로 거론되면 안되는 인물 중의 하나였다. 당시 중학교 갓 들어온 나에게 공산주의(共産主義)는 무조건 나쁜 사상이었다.

그리고 이른바 공산주의 국가라는 북한은 그야말로 최악의 국가였다. 물론 지금 이 순간 이 책을 보고 후에도 북한은 나에겐 최악의 국가임은 분명하다. 그런데 중요한 문제는 오히려 북한은 마르크스가 주장한 진정한 국가가 아닌 것이다. 거기는 오히려 프롤레타리아 독단적인 정치(政治)라는 미명(美名)아래 오히려 독재가 일어나는 사회다. 

르크스는 노예 없는 주인 세상을 원했다. 독재(獨裁)로 인해 피해보는 것은 언제나 권력을 가지지 못한 약자들이다. 약자를 위해 일어섰다고 정의를 외치는 그들은 어느 순간 약자들을 억압하는 폭군이 되어 버렸다. 그런 형태가 소비에트 연방의 스탈린 정권이었다. 소비에트 연방은 공산주의라고 하나 사실 그것은 하나의 국가자본주의이었다.

스탈린은 자신의 권력을 위해 국가비밀경찰 조직을 설립하고, 그 전에 자신과 같이 활동하다가 반대되는 파들을 숙청했다. 그런 이후로 마르크스가 울부짖던 원래 가치는 상실했다. 이런 실정에서 한국에서 625전쟁이 발발했다. 이 시기에 맞추어 미국에 매카시라는 의원이 미국 정부 내에 공산주의자가 있어서 그들을 정치적인 숙청해야 한다고 했는데, 이런 일련의 행위들이 매카시즘(McCarthyism]으로 발동되었다.

웃기게도 이런 비판의식이 결여한 이데올로기는 먼 곳에 있던 일본과 한국에서 획기적으로 변했다. 그 당시 소비에트 연방과 미국과 연합군의 진영으로 나눈 한국에선 정치적 노선으로 갈등을 일으켰고, 결국 스탈린에 의해 전쟁이 발발했다. 사실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전쟁을 반대했다. 전쟁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모두 프롤레타리아 계급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정의도 아닌 정의로 전쟁의 씨앗이 발발하고, 우리나라 역시 분단과 휴전 중이라는 긴장감 속에 살아간다. 하지만 이런 문제에서 마르크스가 선언한 공산당선언은 별개의 문제였다는 것이다. 사실 제일 진실로 믿음이 깊고 행동력이 강한 사람은 형이상학(철학)에 대한 깊이가 없는 사람이다. 그들은 교조적인 자신들의 자세로 모든 것을 판단하기 보다는 1가지 틀에 얽매여 2원화적인 대립으로 행동한다.

전에 임마누엘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이란 도서를 보았다. 거기에는 나 역시 조심해야할 내용이나 모든 사람들이 조심해야할 문구가 있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여타의 모든 학문에서는 (전문가가 있겠거니 하고) 조심성 있게 침묵으로 관망하는 사람들도 형이상학[철학]적 문제에 관해서는, 다른 학문에 비해 그들의 무식이 뚜렷이 드러나지 않음을 기화로, 대가인양 지껄이고 대담하게 단정한다."(형이상학서설, IV, 264)

이런 바르지 못한 정보와 왜곡된 내용들이 사람들을 혼란하게 한다. 가령 마르크스의 진정한 의미를 알려면 먼저 자본(資本)을 봐야 한다. 자본 1권만 보더라도 왜 그런 선언이 나올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알 수 있게 한다. “하루에 14시간 넘게 노동한다. 안전장치 부실로 다치거나 죽어도 제대로 처리를 하지 않는다. 산업안전보건 기준을 어겨 각종 질병에 노출된다. 먹을 것조차도 깨끗한 음식이 아니라 오염된 음식을 사먹는다. 미성년자 그것도 이제 4살 된 아이를 고용해서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부려먹는다. 아동들을 부적절한 관계를 맺게 하여 14세 된 여자애가 엄마가 되고, 그 엄마가 된 소녀의 아이들은 다시 노동을 착취한다.”에서 현대에 살아가는 누구라도 이런 행위에 대해 납득할 수 없다.

아니 납득을 하는 인간이 더욱 이상하고 바르지 못한 존재이다. 그런데 그 당시 19세기 유럽에서는 이런 비정상적인 일들이 당연하게 여긴 것이다. 지나친 고통은 인간의 신체를 노화시키며, 정신적으로 파멸을 일으켜서 대부분은 오래 살지 못한 채 괴롭게 죽어가야만 했다. 이런 세계가 당연하다고 여긴다면 분명 문제가 있다.

이런 문제들은 마르크스가 지적한 것이 아니었다. 가령 칸트의 판단력비판이란 도서는 인간이 느끼고 표현하고 생각하는 미학에 관한 도서에서 빈곤의 문제에 기술했다. 본래 문구는

“나는 인민의 땀을 그처럼 불필요한 것들에 소비하는 권력자들의 허영을 꼭 루소(프랑스의 사상가 및 철학자인 장 자크 루소이며 대표서적으로 사회계약론)와 같은 투로 꾸짖을 수 있다.”에서 번역자 이렇게 주석을 이렇게 달아놓았다. “아마도 ‘굶주린 다수에게는 필수품도 없는데 한 줌의 사람에게는 사치품이 넘친다’는의 끝 대목을 염두에 둔 말 같다. 인간학강의 XXV, 1417"

어떻게 본다면 칸트의 생각에서도 당시 루소의 사상을 판단력비판에 인용하였고, 그 이전에 칸트는 순수이성비판과 실천이성비판을 저술하였다. 칸트는 교조적이고 회의적인 인간에 대하여 비판하였고, 특히 교조적(敎條的)으로 편협한 사고를 하는 인간의 이성을 비판했다. 하지만 이성의 비판에서 칸트는 논리(論理)의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윤리(倫理)였다.

윤리는 제1의 철학이라고 할 정도로 중요하다. 마르크스가 그토록 혁명을 외치던 것은 인간의 존엄성과 생존성이 달려있는 윤리적인 부분이었다. 사실 이런 부분은 현대철학에서도 중시된다. 가령 미국 하버드 대학 철학과 교수이며 공리주의(功利主義) 대가인 존 롤즈의 “정의론”에서는 인간의 인권에 대해 매우 중시했으며, 각 개인에 대한 자유와 사유재산을 중시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의 태생이 같을 수가 없으므로 최소수혜자에 대한 기본보장으로 통해 공리주의적인 면을 강조했다. 다소 공산주의와 공리주의는 다른 곳에 출발할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보는 것은 인간에 대한 인권문제이다. 사실 공산당선언과 마르크스의 자본은 매우 중요한 위치에 올라와있다. 인터내셔널(The Second International)의 조직으로 통해 그들은 인간 기본 권리를 보장했다.

지금에 와서 웃기는 사실이나 우리는 하루 일일 노동 및 근로시간 8시간 정도 규정한다. 그리고 그 이상의 노동에 대해서는 그것에 대한 수당이나 보상이 뒤따른다. 그러나 150년 전에는 그것이 아니었다. 지금 사회에서 이 선언은 어떻게 본다면 당연한 것을 말할지도 모른다. 선언이 일어난 시기에는 정말 목숨이 오고가는 일이었다.

지금 현재 내가 살아가는 현대사회를 돌아보면 마르크스라는 인물은 아직도 막강한 영향을 내리고 있다. 직접적인 마르크스주의자 이외에도 다양한 형태로 학문과 사상, 심지어는 예술과 내가 좋아하는 애니메이션까지 그의 사상이 녹아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위대한 화가인 파블로 피카소는 프랑스 마르크스주의자로 입체주의 미술을 펼쳤다. 그는 전쟁에서 억압받던 사람들을 보고 그들을 그려 전쟁의 잔혹함을 폭로했고, 또한 가난하고 굶주린 약자를 생각했다. 일본 애니메이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 역시 마르크스주의자로 그의 작품인 붉은 돼지는 파시즘에 대한 강력한 반발의사가 들어 있었다.

그렇지만 세계 근현대 역사의 마르크스가 꿈꾸던 공산주의는 사람들에게 허무한 유토피아만 주는 환상이 되었다. 물론 원론은 아니었으나 사람들이 옳지 않은 방향으로 그의 사상을 남용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일부 유럽국가에서는 마르크스의 유지를 이어 국가를 보전하고 발전시켰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책을 보면서 마르크스의 생각 중에 마음에 정말 드는 문구가 있다. 그것은 “이념 속에서 현실”을 찾는 것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이념”을 찾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원래 동양사상인 유교(儒敎)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유교는 종교적인 기능으로 누구를 믿는 것보다는 어떻게 정치를 잘하는 가를 다루는 사상이다. 그러나 조선시대 성리학의 오류로 인해 백성들은 가렴주구에 시달리고 탐관오리들은 하늘 무서운 것도 모르고 오만 패악만 일삼았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인 다산 정약용은 그런 성리학 안의 틀에서 나라를 보는 것이 아니라 직접 백성을 보고 그 안에서 나라를 다스리려고 했다. 이념은 인간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 것이었으나 이제는 이념 때문에 오히려 인간을 소외시켜야 했다, 그래서 그런가? 이미지가 매개로 인간사회가 나타나는 이른바 스펙타클의 사회(Society of the Spectacle)이 출현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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