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국립묘지를 지난 주말을 이용해 다녀왔다. 나에게 광주는 세 번째 방문이다. 3번을 찾아간 광주 속에 첫 번째 방문 때 518국립묘지를 찾아갔고, 두 번째는 광주비엔날레 행사를 갔을 때 녹두서점 재현을 관람했을 때이다. 이번 광주의 방문은 의미가 있었다. 처음에는 나 혼자 방문했고, 두 번째는 여자친구(현재의 아내)와 같이 갔으며, 이번에는 엄마와 아내까지 3명이 함께 찾아갔다. 어머니는 518에 대한 기억이 있다. 시골에서 인천으로 가려고 하는데, 광주에서 비극의 살육이 자행되고 있었다. 이때 광주를 중심으로 담양과 나주 등 주변 지역까지 교통이 통제되어 이동할 수 없었다.

 

당시 나를 뱃속에 임신 중이던 엄마는 버스를 타고 가던 중 그때 도로가 막혀 도로 다시 시골로 돌아갔다. 군인들이 통제했고, 그 군인들은 모든 민간인들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다. 19805, 늦은 봄의 따스한 햇살은 세상의 모든 생명에게 축복을 내리는 빛이 아니라, 햇빛 아래 짙은 그림자를 보여주는 기나긴 어둠이 되어버렸다. 이번에 광주에 찾아간 일은 여러 가지 해야 할 것이 있었다. 광주에 계시는 엄마의 친구에게 엄마를 모시고 가는 일이다. 엄마와 같은 마을에 담벼락 건너 동갑내기 소녀들은 이제 명절 때 손자를 맞이하는 할머니가 되었다. 나이가 들면 대부분 어른들은 몸이 불편하다.

 

엄마의 친구도 건강이 그래 좋지 않았고, 시골에서 오랫동안 같이 지내다 서로 결혼하여 떨어지면서 지내게 되었다. 엄마와 친구이나 엄마에게 집안 고모뻘이 되던 분이기에 엄마는 그 집을 방문하면서 엄마 친구의 어머니가 계신 노인요양원까지 방문했다. 물론 여수에 있던 노인요양원에도 엄마의 시골집 옆에 살던 분도 만나고 오셨다. 나이가 들면 건강이 불편해서 이제 걷는 것조차 힘들고, 치매에 걸려 기억도 흐릿해지고, 앞으로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분들이니 조금이라도 시간이 될 때, 여유가 될 때 찾아가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광주로 갔다. 광주로 가면서 처음 들린 곳이 망월518민주공원 묘역이었다. 나는 2번째이나, 엄마와 아내는 처음이었다. 518관련 도서를 보면 참으로 슬프고 끔찍한 일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치고, 사진으로 본 시신의 얼굴은 그 당시의 참혹함이 그대로 녹아있다. 어떻게 인간의 얼굴을 하고 사람을 저 지경까지 헤칠 수 있을까? 그냥 지나가는 버스에도 기관소총으로 사격하고, 마을저수지에서 물놀이하는 어린 학생에게 총을 겨누는 그들을 보며 더 이상 이런 비극은 되풀이 돼서는 안 된다고 여겼다.

 

518기념관을 방문하면서 당시의 기록이 남아있다. 하지만 가장 슬픈 것은 암매장된 시신을 발굴했을 때이다. 시신 유해 한 구가 2층 기념관에 놓여있다. 머리 한쪽이 약간 구멍이 뚫려있다. 총으로 머리를 맞은 것인지 아니면 곤봉으로 머리를 맞은 것인지 잘 알 수 없지만, 머리를 가격당하여 사망하여 그 시체조차 암매장되었으니 얼마나 비통한가. 시신 옆에 또 다른 뼈가 놓여있다. 우리 일행 말고 나이가 지긋하신 할아버지 몇 분이 관람하고 있는데, 1분이 뼈만 앙상하게 남은 유해를 보자 눈물을 훔치는 모습을 봤다.

 


그리고 518유족들의 증언으로 만들어진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에서 잊을 수 없는 영혼이 있었다. 뱃속에 8개월 된 태아가 있던 어느 여성이 길에서 남편을 기다리다 계엄군의 조준사격에 머리를 크게 다쳐 결국 숨이 끊겨져 버렸다. 뱃속의 아이도 결국 살리지 못한 채 어머니와 같이 한줌의 흙이 되어버렸다. 저수지에서 멱을 감던 아이도 머리에 총을 맞아 머리 반쪽이 날아간 채 죽어버렸다. 이미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리뷰에서도 언급했지만, 크게 확대한 사진 아래 그들의 사연을 보자니 가슴이 막막했다.

 

계엄군의 총은 시민군이든지 광주시민이든지 그냥 길 가던 어린 학생이든지 그 누구도 상관없었다. 보이는 사람이나 움직이는 그 모든 것에 사격을 가할 뿐이다. 지나가는 버스에도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니, 만일 그런 장소에 우리 엄마가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광주에 사는 부모님의 친구와 친지들이 그 철저한 시간에서 고통 받은 것을 생각하니 참 기가 차기도 했다. 전시관을 둘러본 후 나는 518묘역에 올라갔다. 작은 비석에 이름이 새겨져 있고, 그 옆에 희생자의 사진이 있었다.

 

전에는 묘역안을 그렇게 둘러보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둘러봤다. 1번 찾아봐야할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6-12묘역의 주인, 합수(合水) 윤한봉, 이분을 부를 때 합수라고 하는데, 합수를 물이 합쳐지는 게 아니라 똥과 오줌 그 밖의 오물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모든 더러운 것이 모여도 결국 땅에 흘러가면 거름이 되어 다시 윤택한 삶으로 이어지자는 의미로 불린 것이다. 합수 선생의 친지들과 우리 가족의 친지들은 대대로 계속 알고 지낸 사이였다.

 


엄마에게 윤한봉을 아냐고 물어볼 때 어디 TV에서 봤다고 할 정도지만,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물어보니 아주 독한 놈이다, 골병들어 죽은 놈 아니냐.”라고 말했다. 시골에 집안제사를 지내려 갈 때 내 친가쪽 식솔들은 모두 벽송마을에 찾아간다. 벽송마을 입구와 마을회관 인근에 윤한봉 선생의 집을 안내하는 표지판이 있었다. 벽송마을 집안제각에 가면 기념비가 세워져있다. 그 비문을 보면 아버지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그 이름을 어느 노인분이 찾아주었다. 윤한봉 선생의 친척이었을 것이다.

 

윤한봉 선생은 참으로 많은 일을 했다. 노동과 인권, 남북대화, 더 나아가 세계평화에 대해 고민하던 분이었다. 당시 많은 노동운동가, 인권운동가하고 같이 활동하던 분이었다. 그런데 막상 생각하니 이번 노회찬 의원이 자살을 하여 그 생을 마감했다. 노회찬 의원도 젊은 시절부터 계속 노동운동을 하셨고, 사회문제에 많은 참여를 통해 국민들에게 큰 호감을 가진 분이다. 그런 노회찬 의원도 윤한봉 선생을 찾아간 적이 있다고 한다. 왠지 노회찬 의원이 지금 다시 윤한봉 선생에게 찾아간 일은 너무 이른 것 같다.

 

지난 6월 노회찬 의원이 합수 윤한봉선생의 11주기를 맞이하여 광주를 방문했는데, 이제 1달 되었을 뿐인데, 정말 아까울 뿐이다. 5월의 슬픔은 아직도 피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게다가 그 피눈물을 흘리게 만든 군부세력은 쿠데타를 음모하고 있는데, 그렇게 세상일 등지니 허무한 느낌이 든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할 때보다 덜 슬프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만큼 안타까운 일이다. KTX 여승무원도 다시 직장으로 복귀하고, 삼성백혈병 환자의 문제도 조금씩 해결가고 있었다. 노회찬 의원이 노동문제에 많은 심혈을 기울였다. 사람이 살만한 바람이 불어오는가 하더니 그 바람 속으로 노회찬 의원이 사라졌다.

 

아직 광주의 5월에 대한 진실을 밝혀야 하고, 그들을 학살한 이들에게 단죄가 내려야 한다. 그리고 세월호의 진실을 밝히고, 국민을 적으로 간주한 군부쿠데타 세력도 들추어내야 한다. 빈곤에 허덕이는 가난한 서민과 희망을 버린 청년취업준비생에게도 희망을 넣어줘야 한다. 노회찬 의원이 할 일이 태산 같은데, 그렇게 가니 하늘이 무심한 것 같다. 기득권에게 저항한 그의 삶을 기억하며, 더 이상 이런 슬픈일이 일어나지 않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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