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헌법이 개정을 준비하려 한다. 하지만 헌법이 정말 개정될지 얼마나 그 취지에 맞게 바꿀 수 있을지는 모른다. 헌법전문에 한국의 역사에서 중요한 민중항쟁을 상기시키려 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상해 임시정부로 시작하여 4⋅19혁명만 아니라 5⋅18의 아픔까지 담으려 한 점이다. 최근 4⋅3사건에 대한 재판단이 이루어지려 한다. 4⋅3사건 당시 수많은 제주주민들이 학살당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역사는 민중에게 거의 학살과 착취 그리고 모욕의 역사에 가깝다. 가진 자와 권력만 추구하는 자에게 한국 그리고 조선은 철저하게 유린 당해온 것이다.
최근에 읽은 <호남의 한>과 <지워진 이름 정여립>에서 이런 내용이 나온다. 기축옥사는 조선시대의 광주사태다. 광주사태란 결국 5⋅18민주화 항쟁을 의미한다. 광주민주화운동을 군부에 의해 철저히 유린되고, 광주시민은 군인들의 총칼에 무참히 목숨을 잃었다. 지금도 그 가해자들은 어둠속에서 당시 피해자를 모욕하고, 최초 발포명령자는 나오지 않아 유족들은 그 원한에 사무쳐 매년 5월만 되면 그 고통의 눈물에 이기지 못한다. 나이가 60이 되어도 80이 넘어도 눈가에 투명한 피가 눈물이 되어 흘러내린다.
20세기 광주의 비극은 그때만이 아니라 이미 16세기 조선에도 있었다. 이 일은 모르는 이들에게 상관없지만, 그 땅에 살아온 자이나, 혹은 그 땅에서 살아온 후손에게 여전히 내려오는 하나의 역사이며 신화이다. 무의식적 속에 내려온 울분과 억울함에 현세에 나타나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다. 2018년 제주 4⋅3사건에 대한 추모영결식 기사를 보았다. 자신이 태어나기 전에 아버지는 서북청년단과 군경의 총칼에 잃은 분의 사연이 나왔다. 아버지의 얼굴을 볼 수 없었고, 아버지와 함께 죽은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형제들의 비극은 나이 60 중반의 할머니의 가슴을 찌르기에 충분하다.
인간의 한이란 그 억울한 죽음을 당한 본인만 아니라 후손까지 이어진다. 한이란 그런 것이다. 가족들과 후손은 평생 불순분자 내지 역적, 그리고 빨갱이란 이름을 받고 살아가야 한다. 기축옥사 역시 그렇다. 돌아가신 아버지는 송강 정철에 대해 무척 나쁘게 생각했다. 그리고 윤한봉이란 인물이 무척 독한 놈이라 했다. 송강 정철은 선조시대 활약한 정승이고, 윤한봉은 5⋅18 운동의 수괴로 지목된 인물이다. 송강 정철은 조선시대 서인의 영수이고, 윤한봉은 박정희와 전두환 정권시절 괴수로 지목된 인물이다.
미묘한 차이는 있지만 기축옥사나 5⋅18 모두 전남지역에 큰 상처를 주었고, 조선시대에는 역적이 나오는 곳이 호남이고, 20세기에는 반국가세력이 출몰하는 곳이 호남이다. 호남의 한은 쉽지 않은 모양이다. 우연히 어머니 친가인 장흥을 방문할 때 어느 산이 큰 공사를 단행하고 있었다. 그 공사가 끝나서 알고 보니 동학운동을 하던 농민을 기념하던 곳이었다. 호남은 농민의 착취와 눈물이 어린 곳이고, 정약용 선생이 강진 만덕산에서 유배할 적에 불쌍한 백성을 보고 그 안타까움을 잊을 수 없어 애절양(哀絶陽)이란 시를 남긴 곳이다.
애절양이란 시는 이미 죽은 시아버지, 갓 태어난 사내아이가 군적에 올라 세금을 바치라는 관아에 횡포를 고발하는 시조이다. 군납을 납부하지 못해 농민의 소를 끌고 가는 바람에 사내는 그 울분을 참지 못해 자신의 성기를 칼로 도려내고, 아낙네는 자신의 남편의 성기를 잡고 관아에 가서 제발 군납을 제대로 해달라고 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사나운 관졸의 목소리였다. 갈밭의 아낙네는 피가 철철 흐르는 남편의 성기를 잡고 그저 눈물을 흐르며 집에 돌아왔다는 이야기이다. 불과 200년 전의 사연이나 너무나 마음이 아프다. 그 정도로 착취가 심한 곳이 호남이다. 호남의 곡창지대는 탐관오리에게 재물을 늘릴 수 있는 기회의 땅이었다.
다산이 처음 강진에 올 때 모든 사람들이 그를 두고 천주학쟁이라 하여 두려워했다. 하지만 점차 마을사람들이 그에게 모여들고, 다산의 자신의 친구와 외가의 먼 친척의 도움으로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긴다. 다산초당, 산장의 주인은 윤구로의 아버지 윤단이었다. 윤단은 관찰사와 안동도호부사를 지낸 행당공 윤복의 후손이었다. 윤단의 손자는 다산 정약용의 제자였고, 윤단의 선조인 윤복은 귤정공 윤구의 동생이었다. 윤구의 후손 중에 고산 윤선도, 고산 윤선도의 후손 공재 윤두서, 공재 윤두서의 손녀는 다산 선생의 어머니다. 다산 선생이 강진에서 유배를 해도 그나마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그런 연유이다.
그리고 다산의 오랜 친구이며 사돈인 윤서유는 다산의 외가 조상 윤구의 아버지 어초은 윤효정의 형님인 윤효례의 후손이었다. 지금도 재미있는 일화지만, 다산 정약용 선생의 업적이 세상에 드러나는 것은 나주정씨의 영광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해남윤씨의 영광이기도 하다. 다산 선생이 친구이며 사돈인 윤서유의 묘비명을 작성했다. 그 묘비명에서 윤서유는 남인이기 때문에 박해를 당했다는 말이 나온다. 즉 정약용 선생과 윤서유, 그리고 다산초당의 주인은 모두 남인의 세력인 것이 나온다. 남인이 왜 중요한가?
다산 선생은 호남에 유배할 때 사류의 기운이 모조리 죽었다고 한다. 남도를 대표하는 사대부 가문은 3~4 정도이고, 그 나머지는 아무 의미가 없다 했다. 남도의 사류들이 몰락한 배경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기축옥사로부터 시작된 점이다. 다산초당의 주인인 윤단의 10대조 윤복은 안동도호부사를 역임할 때 퇴계 이황 선생과 교유를 나누었다. 그리고 자신의 아들을 퇴계 선생 문하로 보냈다. 퇴계 선생 문하에 이름난 인물로 서애 유성룡과 학봉 김성일 선생이 있다. 이들은 모두 퇴계의 수제자이기도 하나, 한편으로 임진왜란 당시 도체찰사와 초유사로 활약했다.
그리고 윤복의 아들인 윤단중과 그 후예들은 임지왜란 당시 의병으로 활동했다. 윤단중은 이순신 장군과 교분을 가지고 있었고, 그의 8~10촌 숙부 내지 형제들도 이순신 장군 휘하에 있거나 의병으로 활동했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의 적은 왜군만 아니라 조정의 당쟁이었다. 최근 읽은 <이순신과 임진왜란>을 읽으면 원균과 서인세력의 견제가 결국 이순신으로 하여금 경질되게 했던 원인으로 나온다. 그리고 충무공 이순신(李舜臣)과 더불어 활약한 무의공 이순신(李純信)은 학봉 김성일 문하생이란 점도 나온다.
이순신 장군의 주변 무관도 서인 내지 동인의 여력이 미치겠지만, 대부분 동인 특히 남인에 가까운 인물이 많은 점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도 역시 서인과 남인 그리고 북인으로 갈려 활약했다. 서인으로 조헌과 고경명, 최경회 같은 창의사들이 있었고, 북인으로 곽재우와 정인홍 같은 사류도 있었다. 당쟁은 의병활동에도 영향을 주었다. 서인과 동인으로 갈려져 지휘체계가 구성되었다. 이 모든 원인은 기축옥사의 영향이었다. 기축옥사 당시 가장 활약한 의병으로 곽재우가 있다. 곽재우는 남명 조식 선생의 마지막 제자였고, 그의 아내는 남명 선생의 외손녀였다. 게다가 남명 선생의 제자인 최영경과 정인홍 그리고 김면과 김우옹과 친분을 나누었다. 기축옥사 이후 최영경이 죽고, 정인홍이 파면되고, 남명학파 모두가 화를 입자 의령에 은거하다 정암진에서 왜군을 소탕했다.
최영경은 학문의 수준이 높았고, 언제나 고고한 인품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화를 입은 송강 정철이 자신과 만나기 원했지만, 송강이 주색이 강하고 성품이 너무 급하므로 보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가난하지만, 학문에 깊은 뜻을 둔 최영경은 기축옥사 당시 옥사를 치르다 죽고 만다. 그것도 농사만 짓던 동생이 먼저 억울하게 죽어 병을 얻게 되면서다. 기축옥사의 억울함은 동인세력에게 큰 타격을 주었고, 특히 남명학파에게 심한 상처를 주었다. 동인에서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진 이유도 역시 정인홍을 비롯한 조식 문하생들이 서인에 대한 원한이 깊었기 때문이다.
남인 역시 원한이 없는 것은 아니다. 최영경은 조식 선생만 아니라 퇴계 선생에게 학문을 연결되고, 퇴계의 문하생 조대중 역시 기축옥사 당시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사람 중에 하나이다. 더 심각한 이유는 동암 이발과 그의 동생 이길, 어머니와 어린 아들이 고문에 의해 죽었기 때문이다. 기축옥사는 1589년에 일어났고, 이미 7갑자(420년)이 지났지만, 그 한은 호남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아버지가 왜 정철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았을까?
오항녕 교수는 나름 설득력이 있는 말을 했지만, 그 말 자체가 설득이 없다. 기축옥사에 대한 기록에서 미수 허목과 고산 윤선도의 사료를 언급했다. 고산 윤선도의 고모할머니는 동암 이발의 어머니다. 자신의 집안에 화를 당해 그 원한으로 기축옥사를 추측했다는 말 자체가 논리모순이다. 자신의 책에 기축옥사 때 화를 당한 동암 이발의 가문 광산이씨의 족보 관련도서에 고산의 후손 윤영선 전 광주시장이 서문을 적었다는 내용을 언급한다. 중요한 사실 중에 하나가 동알 이발이 태어난 곳은 윤선도의 고향인 해남 연동마을이기 때문이다. 윤선도 본인은 서울 명례방(명동성당) 인근에 태어났지만, 동암 이발은 해남윤씨 득관조 어초은 윤효정이 살아있을 때 태어난 분이다.
21세기가 도래해도 광산이씨 문중이 해남윤씨 문중과 서로 교유가 가능한 이유는 바로 이런 이유다. 강진 도암면 강정리에 있는 해남윤씨 추원당은 고산 윤선도가 만든 제각이다. 그곳은 고산의 현조부(5대조)와 그 선대(6대조)를 위해 만든 곳이다. 여기에는 해남윤시 목각족보가 보존되어 있다. 강진에는 수암서원이라 하여 동암 이발을 모시는 서원이 있다. 강진은 동암 이발을 모시는 서원이 있지만, 이발의 외가 식구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곳이다. 이발의 어머니의 남동생인 윤의중은 귀양가던 중 사망했고, 그는 윤선도의 할아버지다. 그리고 윤의중의 사촌형제는 윤단중이다. 윤단중은 퇴계의 문하생이다. 조선시대 친인척들은 가까운 고을에 모여 살았고, 설사 조금 떨어져도 교류를 멈추지 않았다.
우리 집안에서 정철에 대한 원한이 깊이 남은 이유도 그렇다. 기축옥사 일어나던 시절 고산윤선도는 이제 어린아이지만, 내 직계 할아버지는 나이가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고, 고산 선생과 10촌 형제다. 지금의 10촌은 멀겠지만, 조선시대 10촌은 무시할 수 없다. 정여립의 모반사건으로 연루된 인물 중에 병조업무에 밝은 정언신이 있었다. 그는 정여립의 9촌 숙부란 이유로 고문당한 후 귀양 가고 결국 목숨을 잃었다. 정언신이 없었다면 이순신의 앞길에도 큰 문제가 있었다. 족보를 읽으면 기축옥사 이후로 벼슬에 나가는 사람이 많이 없어진 것은 사실이다.
기축옥사 당시 이발의 외가인 점에서 이미 큰 화를 당했고, 그 원한은 현세까지 이어진 온 셈이다. 오항녕 교수의 책에서 간과하는 점은 지금도 후손이 정철이 원망하나, 그것을 너무 작은 것으로 다루는 점이다. 추국과정에서 팔순 넘은 노모와 이제 10살 채 되지 않은 아이가 고문 중에 죽은 것은 조선시대 미증유의 사건이다. 원래 조선의 형별에서 여성과 어린이를 함부로 대하지 않고, 특히 나이가 많은 여성은 고문을 함부로 가하지 않았다. 기록에서 이발의 어머니와 아들이 고문을 당하자 옥졸이 너무 슬퍼서 울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나이가 팔순이 할머니가 압슬형을 당하자 너무 고문이 심하다는 말을 하고, 이제 10살 밖에 안 되는 아이는 자신은 역적이 아니며, 아버지는 오로지 충효에 충실히 하라는 말만 들었다고 한다. 이발의 아들을 말을 들은 선조는 그 아이가 괘씸하다며 머리를 터지게 해 죽였다. 그래서 기축옥사는 서인에게 승리의 역사이기도 하나, 모멸의 역사이다. 아무리 역모라고 해도 정여립과 관계는 된 인물은 이발로 충분하지, 굳이 그의 노모와 어린 아들에게 죽음을 강요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은 북인(이이첨)과 서인(노론)의 대립관계에 있는 기록이다.
기축옥사를 두도 한쪽은 서인 특히 정철을, 한쪽은 선조의 무자비함으로 이루어진 피비린내라고 말한다. 하지만 둘 다 틀렸다. 모두 자신들의 권력을 위해 서로 음모를 짠 잔인한 사건일 뿐이다. 정여립은 천하는 공물이라 한다. 주자 성리학에서 공맹의 수사학과 다르게 절대왕조를 위해 성리학은 왕조의 권력과 거기에 기생하는 권신들의 권력을 중시한다. 하지만 정작 공맹의 사상은 군주가 틀리면 백성은 자신의 군주를 선택할 수 있다고 한다. 왕도주의는 어디까지나 민본주의에 의거한 것이지, 권력자만을 위한 사상이 아닌 것이다.
정여립이 역적인지 아닌지는 어느 책에 따라 다르지만, 20세기를 지나 21세기 올라오면 어는 누구는 영국 크롬웰보다 더 이른 시기에 조선에서는 공화주의자가 있었다고 말한다. 정여립이 말한 대동사상은 당시 왕조시대 역모일 수 있지만, 백성에게 달랐다. 남녀노소를 떠나, 신분이 양반이건 노비이건 모두 공평히 글을 배우고 같이 술을 마실 수 있었다. 21세기 남녀노소 그 누구 어느 자이건 신분의 제재를 받지 않지만, 조선시대는 달랐다. 거기에서 벗어난 인간이 살고자 하는 마음은 분명 있었고, 정여립은 거기에 모든 것을 받친 사람이다. 역적이든 아니든 문제가 아니라 분명 그 마음을 가진 점이다.
E.H.Carr의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역사란 과거와 현재가 끊임없이 대화하는 장이라 한다면 정여립은 분명 조선 최초의 공화주의자이며 민주주의를 꿈꾼 사람이다. 그의 꿈이 침몰하고, 그와 조금이라도 관계있는 자라면 모조리 도륙이 나는 비극에서 우린 어떻게 보는 게 옳은 것인가? 임진왜란으로 기축옥사에 대한 정확한 기록문서가 유실되고, 실록과 그 외 당시 상황을 기록, 또한 기축옥사와 관련된 인물의 행장으로 알 수 있을 뿐이다, 오항녕 교수는 기축옥사의 기억을 두고 정철이냐 유성룡이냐는 말과 함께 당시 추국하던 시스템이라 하나, 그것은 억지논리이다.
집안 족보를 뒤져보며 찾은 것은 기축옥사 당시 억울하게 죽은 이발의 어머니는 퇴계의 제자 윤단중의 사촌누나라는 점이고, 서애 유성룡이 그것을 모를 리가 없고, 유성룡에 의해 천거된 수군 통제사 이순신에게 윤단중이 친분을 계속 유지한다면 앞뒤가 맞지 않는다. 다시 족보를 찾아보면 이발의 어머니는 윤구의 따님이고, 윤구는 기묘사화 당시 훈구세력에 의해 화를 당한다. 나의 직계 할아버지는 성균관 진사로 정암 조광조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고 있었으나, 기묘사화를 당한 후 향촌으로 내려온다. 윤구는 내 할아버지에게 자신의 할아버지의 사촌이다. 그 당시 할아버지의 작은 할아버지는 윤구 선생이 기묘사화를 당하자 여러모로 도움을 주었다.
오항녕 선생은 해남윤씨 집안이 광산이씨 집안과 지금도 친하게 지내고, 이발의 가족이 참극을 당한 것을 추측이라 하는 표현이 앞뒤가 맞지 않는다. 다른 서적에서 호남에서 모르는 물고기가 잡히며, 아낙네는 그 생선의 머리를 몽둥이로 때리면서 “증철아! 증철아!”라고 외친다. 송강 정철에 대한 원한이 민간에서 계속 내려온 점을 두고 온 점을 본다면 기축옥사의 폐해는 우연의 산물이 아닌 것이다. 송강 정철은 나름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믿고 살았지만, 문제는 주색이 너무 심했다. 그의 부정적 평가가 심한 책은 <이순신과 임진왜란>이다. 선조가 평양으로 파천할 때 평양유지들이 송강 정철을 불러 위기를 타파하라 한다.
그가 왕명을 받고 전쟁의 위기를 해결해야 할 때 빨리 이동하지 않고, 중간에 기생을 품에 안고 자신이 처한 신세를 한탄하며 시를 읊조렸다. 백성들은 왜군의 칼에 도륙 나고, 배고픔에 허덕일 때, 기생을 품에 안고 술을 마시며 풍류나 외던 그 모습을 보자니 참으로 답답하기 짝이 없다. 팔은 안으로 굽는 것은 어찌할 수 없지만, 오항녕 교수가 갑인예송을 두고 갑인사화라고 말하며, 그 원인을 윤선도라 말하는 것조차 오류이다. 기축옥사 피해자(할아버지가 귀양 가는 길에 죽으니 집안이 풍비박산 나는 게 당연하다)가 어느새 갑인예송의 가해자로 둔갑되었으니 말이다.
윤선도는 할아버지 윤의중의 죽음이 신원되고, 거기에 정개청의 죽음을 다시 신원하여 자산서원을 유지하는 게 목표였다. 하지만 자산서원은 남인과 서인이 교차하면서 언제나 분쟁거리로 되었다. 하지만 기축옥사 그 자체를 동서 양당의 갈등도 중요하지만, 그 당사자들과 주변인들이 당시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으로 어떤 업적을 했는지 역시 중요하다. 백성을 위해 자신의 재력을 나눠주고,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권력자에게 목숨을 걸고 대항했는지 말이다. 광해군을 두고 혼군이라 하고, 과거제도 엉망이라 했지만, 이미 선조시대부터 과거장은 엉망이고, 백성들은 배고픔에 허덕이고, 군역관리는 엉망이었다.
기축옥사로 천명에 가까운 선비가 화를 당했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그 선비와 같이 살아가던 조선의 민중에게 어떤 영향을 미쳐는 가이다. <기축옥사 재조명>에서 흥미로운 내용 중에 하나가 나주를 중심으로 동인과 서인의 서원장의 자를 두고 갈등한 내용이 있다. 조선은 향교가 향촌의 중심이 되어 농민을 관리하고 지도하는 역할을 했다. 부패한 시절 향교는 백성을 고혈을 짜는 곳이고, 청렴한 선비가 있으며, 백성의 생활을 어루 만져주고 다독여주던 곳이었을 것이다. 21세기 한국을 두고 헬조선이라 한다. 헬조선의 시작점은 역시 임진왜란이지만, 그 임진왜란 당시 유망한 사류는 기축옥사에서 대거 희생되고, 임진왜란 당시 상당수가 순국했다.
병자호란 당시 의병은 전국에서 일어나지 않았고, 관군조차 눈치만 보고 출진하지 않았다. 선비의 정신이 완전히 소멸한 시기는 결국 16세기이고, 17세기에 선비가 살 곳은 산속이었다. 만일 세상에 잘못 나오면 장형을 받고 죽거나 멀리 귀양 가서 고역만 치룰 뿐이다. 기축옥사는 당쟁론적인 상황에 놓여있지만, 그것을 당쟁론적인 것으로 치부한 결과 조선은 전쟁의 병화에서 큰 상처를 입었다. 그 역사의 상처를 반성하고, 당시 희생된 사람들의 무고를 풀어주고, 다시 시대에 부합된 정신을 찾는 것이 먼 후예들의 역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