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멩코 추는 남자 (벚꽃에디션) - 제11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허태연 지음 / 다산북스 / 2021년 9월
평점 :
품절



타이틀이 이미 화려한 소설이다.

제11회 혼불문학상을 수상했고,

출간 즉시 영상화 판권 판매가 완료되었다.

책을 읽으면서도 모든 장면과 인물의 태도, 얼굴까지 머릿속에 저절로 그려지게 만들었던 소설인 만큼 영상화 된다는 것이 기대된다. 과연 내 상상 속의 인물과 얼마나 비슷할까? 모든 인물보다 더 궁금한 것은 굴착기의 모습이기도 하고 말이다. 왠지 잘생기고 다부진 젊은 날의 남훈씨를 대변하는 듯한 굴착기이지 않을까 했다.

'플라멩코 추는 남자' 라더니 시작부터 '굴착기 모는 투박한 남성'이 등장해서 의아하게 읽어 가지만 흡입력이 대단해서 인지 놓을 수 없었고 그렇게 하루에 읽었고 이 글을 쓰며 기쁘게 더듬어 본다. 독자로 하여금 하고 싶은 말을 너무 많이 만들어 주는 탄탄한 소설이라서 문학 상을 받는구나 생각했다. 욕심 내서 리뷰를 다 읽어주길, 소설 전체를 읽어보길 또 바라게 된다.



굴착기 모는 67세의 남자 남훈씨는 거친 현장에서 잔뼈가 굵어지고 이제는 인정받는 베테랑으로 입소문이 나있다. 인내심 많고 다정한 아내가 있고 아내를 닮아 곱고 소중한 딸은 임용고시에 합격해 번듯하게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행복하지만 어느새 무뚝뚝한 가장이 되어 있는 남훈씨는 모녀의 대화에 잘 섞이지 못한다. 중년의 반란, 은퇴는 아니더라도 안식년의 이름으로 좀 쉬고 싶어 굴착기를 늙다리 총각에게 임대해주었다.

남훈씨는 굴착기를 애지중지 다루며 자신의 노동철학으로 관리했고 일하는 동안 클래식을 듣는 나름의 취향과 열정이 있었다. 그것이 이 소설의 인물 67세의 중년을 지난 아저씨 남훈씨를 매력적이게 만든다.

남훈씨는 굴착기에 생명력을 부여해 '피곤해보인다'고 느낄 만큼 애착이 크다보니 굴착기의 새주인을 아무렇게나 만날 생각이 전혀 없다. 마치 사위감이라도 고르듯이 굴착기를 사갈 세명의 후보를 만나봤지만 다 성에 차지 않았다. 그러다 팔지 않고 잠시 임대하는 것으로 완전한 은퇴는 유보한다.

가장 일을 하겠다는 의지가 보이던 늙다리 청년이 그래도 괜찮아 보인다. 그의 필체가 그의 성품을 말하는 것 같아서 임대하게 된다.

그 과정이 왜 박진감 넘치는 건지 알 수 없지만 인물들의 모습과 함께 글로 써지지 않은 인물의 자라온 배경까지도 너무나 자연스럽게 연상 되는 것은 저자의 큰 그림이겠지.


낯선이와의 만남으로 자신을 깨닫게 되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남훈씨가 배움을 얻은 세 명의 인연이 바로 굴착기 기사로 살아온 남훈에겐 산신령이 건져준 금도끼, 은도끼, 동도끼쯤 되리라 혼자만의 해석을 덧붙여 보기도 한다.



p 38

장식장 깊이 숨겨둔 '청년일지'를 꺼내 남훈씨는 들춰보았다. 노트의 절반 정도가 부끄러운 여백으로 남아 있었다. 큰 숨을 들이켜고, 그는 매일의 기록 속에서 수행할 과제를 그러모았다.




이제 은퇴를 하고 젊은날에 써둔 청춘일지 뒤적이며 못다이룬 꿈을 실현하는 모습으로 자기를 완성하고 싶은 남훈씨에겐 끊어진 이야기가 있었다. 청춘일지에 담긴 잊고 살던 절대 잊기 싫은 아주 소중한 것들이다.

한 번의 이혼, 알콜 중독, 병원에서 죽는다는 말을 듣고서야 정신 차리고 다시 삶을 살아내기 위해 썼던 일기에는 그가 스스로 다짐했던 7개의 버킷리스트가 있다.

그것 하나 하나를 만나가는 것이 이 소설의 묘미이기도 하고 하나씩 이루어 갈 때마다 동그라미 해가는 남훈 씨를 따라 독자도 성취감도 느낀다. 그리고 거기에 하나를 더하며 진짜 가족을 찾게 되는 소설이다.

지나온 생의 잘못도

그렇게 메울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플라멩코 추는 남자 p 106

남훈 씨가 마흔이 넘어서야 재혼해서 얻은 딸 선아가 있고 벌써 마흔이 넘은 또 다른 딸 보연이 있다. 그 딸을 찾아보는 것은 들추어진 일기장에서의 자신을 향한 당부이기도 했다.

이야기의 끝에서 당신은

'진짜 가족'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소설은 저자가 열여섯 이른 나이에 떠나보낸 마흔 두 살이던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고 아버지의 이름을 그대로 담았다. 자신이 아버지의 나이 쯤 되고서 아버지가 돌아가시지 않고 살아 계신다면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이 소설을 썼다고 한다.

결에 있어야 아버지죠

궂은 날도 좋은 날도

그러니까 소설 속의 보연은 아버지를 너무 일찍 떠나 보낸 저자 자신에 가깝다. 이제와서 아버지라는 사람이 불쑥 나타나 보자고 하면 당연히 보는 거냐고 쏘아 말하던 보연의 상처는 세월을 지나며 덧나고 흉지고 무덤덤해져 있기도 했지만 결코 지워지지 않는 새김이었다.

그러나 소설의 마지막 부분 보연이 아버지에게 쓴 편지 글이 깊이 남는다. 그리고 가족은 태생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가는 것이라는 말을 떠올려보게 된다.

p 216

두 팔을 들고 남훈 씨는 우아하게 스텝을 내디뎠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고, 내가 한 번도 맡아본 적 없는 냄새가 날 겁니다. 그게 완벽한 플라멩코는 아닐지라도, 예!나는 행복할 거요. 사실 난 완벽한 플라멩코 같은 건 생각도 하지 않아요. 그냥 플라멩코를 추고 흥분된 감정을 나누고 싶을 뿐. 그때 광장서 본 사람들은 돌아서면 그만일테지만, 이따금 가족에게 말할 겁니다. '아, 그 동양 노인네 플라멩코를 추데. 진짜 신기한 광경이었어.' 그런 장면을 상상만 해도 나는 좋아요. 근데 진짜 끝내주는 게 뭔지 압니까, 선생? 그게 상상으로만 그치지는 않을 거라는 거요.예, 나는 갈 겁니다. 스페인으로, 그게 바로 스페인어 문법이오. 주어-동사 목적어' 순서로 말하는 거지."



P 56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많은 국가가 현재 화려하게 발전하고 있습니다. 어떤 언어 형식을 배운다는 건 새로운 관계를 준비하는 것과 같지요. 이 언어는 미래의 언어입니다. 멋진 기회와 새로운 만남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어요. 기억하세요. 새로운 언어 형식이 새로운 관계를 만듭니다.”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오는 내내, 남훈 씨는 스페인어 강사의 말을 몇 번이나 곱씹었다.

♡ 이대목이 암시하는 것은 새로운 언어와 새로운 관계였고 이 소설을 관통하며 모든 이야기를 잇는 접착제가 되기도 한다.

외국어 배우기. 그래서 고르고 고른 외국어는 스페인어. 스페인에 가서 아무 거리에서나 멋지게 플라멩코 춤을 추고 싶은 67세 남훈 씨는 배움의 재미를 느낀다. 그리고 그 로망은 새로운 관계로 향한다. 잊혀진 딸과의 재회가 되어 둘이서 함께 가는 스페인 여행으로 이어진다. 새로운 언어와 춤, 그리고 새로운 장소에서 시작하는 관계의 시작이 그려진다.

P 246

˝아빠가...... 공부한 거야. 너 알려주려고.˝

그러나 다시 만났고 가장 가까운 부녀 관계이지만 아직 멀리 있는 관계다. 우연히 놓친 스페인의 골목길에서 뒤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가는 아버지를 보며 나를 사랑하지는 않는 아버지를 느끼는 보연은 그런 아버지를 그냥 놓치고 만다.

아버지의 마음은 그게 아니지만 떨어져 있던 시간의 거리만큼의 거리감이었다.

책을 읽던 중에 접한 다른 얘기가 여기에 와서 붙는다. 그러면서 내가 점점 크게 느끼는 것은 '가족은 만들어가는 것'이라던 어느 입양아의 말이었다.

가족이란 무엇인가?

가족이 형성하는 라포르는 무엇인가?

이런 저런 생각들을 하게 하면서도 67세 남훈씨의 버킷리스트들을 함께 이루는 심정으로 꿈을 응원하게 되는 멋진 소설이었다.

혼불문학상, 이런 글이 받는구나 ~ 끄덕였다.

♡ 소설을 읽다보면 지루함이 전혀 없다. 적절히 생략되고 점프하는 것들이 오히려 여운을 더하는 멋진 글이었다.


변한 것은 굴착기의 레버가 아니라 자신이었던 것이다.



(책을 지원받이 감사히 읽고 쓴 리뷰입니다.)

어떤 언어형식을 배운다는 건 새로운 관계를 준비하는 것과 같지요. 이 언어는 미래의 언어입니다. 멋진 기회와 새로운 만남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어요. 기억하세요. 새로운 언어형식이 새로운 관계를 만듭니다."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오는 내내, 남훈 씨는 스페인어 강사의 말을 몇 번이나 곱씹었다. - P56

지나온 생의 잘못도 그렇게 메울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 P106

‘어디선가 바람이 불고, 내가 한 번도 맡아본 적 없는 냄새가 날 겁니다. 그게 완벽한 플라멩코는 아닐지라도, 예!나는 행복할 거요. 사실 난 완벽한 플라멩코 같은 건 생각도 하지 않아요. 그냥 플라멩코를 추고 흥분된 감정을 나누고 싶을 뿐.

그때 광장서 본 사람들은 돌아서면 그만일테지만, 이따금 가족에게 말할 겁니다. ‘아, 그 동양 노인네 플라멩코를 추데. 진짜 신기한 광경이었어.‘ 그런 장면을 상상만 해도 나는 좋아요. 근데 진짜 끝내주는 게 뭔지 압니까, 선생? 그게 상상으로만 그치지는 않을 거라는 거요.예, 나는 갈 겁니다. 스페인으로, 그게 바로 스페인어 문법이오. 주어-동사 목적어‘ 순서로 말하는 거지." - P216

굴착기에 앉아 네 가지 레베와 작업 핸들을 잡아 돌리며 남훈 씨는 모처럼 일에 대한 환희를 느꼈다. 그것은 스페인에서 플라멩코를 췄을 때만큼이나 그에게 커다란 만족감을 줬다.

변한 것은 굴착기의 레버가 아니라 자신이었던 것이다.

- P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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