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공포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에리카 종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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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치광이로 판정되버린 첫 남편 브라이언, 미성숙하고 불결한 지휘자 찰리, 정신과 의사 두번째 남편 베넷, 어느날 욕망의 대상이 되는 맨스플레이너 에이드리언.

한 여자의 사랑의 궤적을 따라 가다 보면, 이 여자는 어쩔 수 없는 사랑 지상주의자 처럼 보인다.
상대방의 자아를 북돋워주는 역할에 몰두하다 문득 돌아보면 ‘아, 나는 사회복지사인가’ 싶은 한숨을 쉬게 되는 사랑중독자.
나를 지우고 사랑에 헌신하는 일이 더 이상 유용한 무엇이 아니라는 걸 깨닫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원점이 되고 마는 사람.

하지만 우습게도 사랑에 목매는 주인공 이사도라는 냉소가 가득한 사람이다. 사랑에 열렬히 빠져든 순간 조차 매력적인 냉소가 빛나는 지성을 가진 사람,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한심하고, 사랑스러운 사람.
도발적으로 세상의 시선에 고개를 쳐들어도, 결국 그 자신의 내면의 변화 이외에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고뇌하는 여자.

이 자전적 소설이 1970년대에 발표되었고, 소설의 배경은 50년대이다.

프로이트를 대놓고 비웃지만 프로이트상을 받았다는 점은 전후라는 그 시대의 전복적 시각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결코 채워지지 않는 갈망덩어리 화자가 말하는, 결혼, 임신과 출산이라는 것, 다채로운 인종들과 새로운 가족을 이루는 유대인 이라는 정체성의 전복같은 것 말이다.
얼핏 콩가루 집안 처럼 보이는 이사도라의 가족들의 존재가 그녀의 정신적이고 학문적인 자양분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에이드리언과 유랑하는 생활을( 그의 표현을 빌면 분노의 포도의 유랑민처럼) 하면서 툭하면 그들이 길을 잃는 설정은 맹목에 대해 에둘러 가르쳐주는 것 같았다.

회상과 현재를 반복하고, 갈팡질팡하고 목적지 없이 흘러가는 듯한 이야기는 결국 “여성”이라는 단어를 남기는 모래글자놀이 같다.


나는 결혼 자체를 반대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사실 나는 결혼의 의미를 믿었다. 적개심으로 불타는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려면 한 명의 단짝 친구 정도는 둘 필요가 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저버리지 않을 한 사람, 무슨 일이 있어도 나를 저버리지 않을 한 사람. 그러나 결혼 생활이 나의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할 때 고개드는 이 갈망은 어쩌란 말인가? - 27

나는 나 자신의 배신을 경멸하고 나 자신을 경멸한다. 나는 이미 주정을 저질렀고 단시 소심해서 실행에 옮기지 못한 것뿐이다. 덕분에 나는 부정한 여자이자 소심한 여자가 되었다. 만약 에이드리언과 실제로 섹스를 했다면 부정한 여자로 끝났을 것을. - 76

문제는 결혼이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가?’가 아니라, ‘언제 한번이라도 옳았던가?’이다. - 153

그러나 누가 억압되었는가? 피아와 나는 ‘자유로운 여성’이었다.(따옴표가 없으면 아무 의미도 없는 말이다.) 피아는 화가였고 나는 작가였다. 우리 삶에는 남자 외에도 무언가가 있었다. 우리에겐 일이 있었고 여행이 있었고 친구가 있었다. 그런데 왜 우리 삶은 남자를 향해 부르는 서글픈 노래의 연속이어야 하는가? 왜 우리 삶은 남자 사냥으로 전락했는가? 진정으로 자유로운 여자는 어디에 있는가? 이 남자에서 저 남자로 전전하지 않는 여자, 남자가 있건 없건 완전함을 느끼는 여자는 어디에 있는가? 왜 매번 미덥지 않은 남자들에게 도움을 청하는가? 보라. 시몬 드 보부아르조차 ‘사르트르는 어떻게 생각할까’를 항상 염두에 두지 않았던가? 릴리언 헬먼은 대시엘 해밋이 그녀를 사랑해주기를 원했기에 남자가 되고 싶어했다. 그리고 도리스 레싱의 <황금 노트>의 여자 주인공 애나 울프는 지극히 드문 경우지만 사랑에 빠져 있지 않으면 극치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 외의 여성 작가들, 여성 화가들 대부분은 수줍었고 위축되었으며 정신분열증을 앓았다. 삶에 있어서는 소심했고 오직 예술 세계에서만 대범했다. 에밀리 디킨슨이 그랬고 브론테 자매가 그랬으며 버지니아 울프가 그랬고 카슨 매컬러스가 그랬다. 플래너리 오코너는 공작새를 키우며 엄마와 살았다. 실비아 플라스는 오븐에 머리를 처박고 죽어서 전설이 되었다. 조지아 오키프 만이 사막에 홀로 남았고 진정한 생존자였다. 참으로 대단한 집단 아닌가. 그들은 자신에게 혹독했고 자살했으며 기이했다. 여성 초서는 어디에 있었던가? 음액과 기쁨과 사랑과 재능을 모두 지닌 열정적인 여자는 정녕 한 명도 없는가? 누구를 본보기 삼아야 하는가? 풍성하게 머리를 부풀린 콜레트? 거의 알려진 바가 없는 사포? ‘나는 굶주리고 또한 갈망한다’라고. 내가 어설프게 번역한 문장 속에서 그녀가 말한다. 우리가 숭배하는 모든 여성들은 노처녀이거나 자살했다. 과연 그게 우리가 가야할 길인가? - 192

그래서 나는 남자에게서 여자를 배웠다. 나는 남성 작가의 눈으로 여성을 보았다. 물론 나는 그들을 남성 작가들로 여기지 않았다. 그들을 작가로, 권위자로, 신처럼 모든 걸 알고 있는자, 완전히 신뢰할 수 있는 대상으로 여겼다. 당연히 나는 그들이 말하는 모든 걸 믿었다. 비록 그게 나의 열등함을 의미할지라도. - 293

다른 사람은 결코 나를 완성하지 못한다. 우리 자신이 우리를 완성하는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 완성할 힘이 없을 때, 사랑을 찾는 건 자살행위이다. 그럴 때 우리는 자기 희생이 곧 사랑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한다. - 553

19세기 소설은 결혼으로 끝난다. 20세기 소설은 이혼으로 끝난다. 그 외에 다른 결말도 가능할까? 나는 고지식한 나 자신을 비웃었다. - 569

2018. m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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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올해의 문제소설 - 현대 문학교수 350명이 뽑은
한국현대소설학회 엮음 / 푸른사상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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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편의 올해의 문제? 소설.

이 중 이미 반은 읽은 작품이었다.

한국현대소설학회라는 단체가 있는지는 이번에 처음 알았고,

무엇보다 올해의 문제 소설을 선정하고 엮어내기 전에

이 책의 디자인과 타이틀은 좀 문제가 있지 않나.... 생각했다.

좀 후졌...고, 일단 만듦새라는 것이 좀 그렇다.

여전히 좋았던 작품은 좋았다. 난 진짜 요즘 한국문학 좋아하는 것 같음...

멀리 보이는 첨성대를 등대 삼아 그 길을 걷노라면, 들판에 내려앉은 어스름 너머로 황남동 인가의 불빛들이 나지막이 반짝이는 것이 보입니다. 그쪽을 바라보며 계속 걸어가면 빈 들판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멀고 가까운 무덤들이 서로 겹쳐졌다 멀어지지요. 그 풍경을 바라보는데,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더군요. 달은 천 년 전의 달과 똑같은데, 사람은 한번 헤어지고 나면 영영 다시 만나지 못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렇게 걸어가는 발걸음에 따라 서로 겹쳐졌다 멀어지는 무덤들을 바라보며 어스름 속을 걷는데, 시원한 저녁 바람에 기분이 좋아져 하하하 호호호 서로 농담하고 웃는 관광객들 중에 내가 우는 걸 눈치 챈 사람은 아무도 없더라고요. 그래서 좋았다는 거예요, 내 말은. 아무도 내가 우는 줄을 몰라서. 여러분들도 울고 싶으면 마음껏 우셔도 됩니다. - 저녁이면 마냥 걸었다, 김연수

망각했으므로 세월이 가도 무엇 하나 구하지 못했구나. - 몰 : mall :沒 , 임성순

2018. m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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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디 계속해주세요 - 한일 젊은 문화인이 만나다
문소리 외 지음 / 마음산책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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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문화인의 대담집.

소설가와 건축가와 배우와 감독과 사진작가, 연출가, 일러스트작가 들이 각자의 나라에서 한번씩 두번의 대담을 나눈다.

기본적으로 둘 사이의 대화이지만, 관객을 염두에 둔 것이니 흥미로운 부분이 없지 않다.

소설가의 대담이 특히 관심있는 부분이었고, 좋아하는 작가의 일면을 알게 되어 좋았다.

그나저나 김중혁 작가 인터뷰 스킬이 상당하다고 느껴졌다.

역시 방송을 많이 해야... 인지도:)

밑의 글은 언제고 한번 써먹어 볼까 하는 생활의 지혜. ㅋㅋㅋ

저한테는 아주 긴장될 때 하는 마인드컨트롤이 있는데, 머릿속으로 ‘나는 금동반가사유상이다. 금속이다, 배고 안 아프고 땀도 안나고 아무 생각 없이 평온한 금동반가사유상이다’하고 중얼거려요. 혹시나 사람들 앞에 설 때 많이 긴장하시는 분들이 있을까 싶어 말씀드려요. - 정세랑. 217

2018. m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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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방범 (리커버 특별판, 양장 합본)
미야베 미유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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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권으로 나눠 있던 모방범이 합본으로 리커버 출간되었길래 샀는데...

두둥 극사실주의 벽돌 두개 부피의 책이 왔다.

이렇게 할말이 많은가 싶은 기분이었는데,

서사의 방식을 보니 충분히 납득할만한 분량이다.

범죄자의 시점, 피해자의 시점, 유가족의 시점, 저널리스트의 시점, 경찰의 시점 ....

외에도 까메오 출현에 불과할 듯한 캐릭터에도 사연과 볼록한 환경을 만들어 놓은

그야 말로 미미 월드.

개인적으로는 범죄자의 시점이 주가 되는 2부는 짜증스럽고 지루했는데,

이것은 평소 범죄사건을 바라보는 내 시각이 드러나는 부분 같다.

구구절절 범법자, 가해자의 변명을 듣고 싶어하지 않는(우리는 너무 많은 변명을 들어주고 있는게 아닐까 생각한다) 성향.

결국 지지 않아야 한다는 말을 하려고 이 긴긴 말을 한 것일까.

재미는 있었지만, 범죄자와 가해자의 가족 분량은 어쩔 수 없이 짜증이 솟구쳤고, 결말은 취향은 아니었다.

아니 뒤집어서 말하면, 그런 막연한 사회적인 분위기에 호응해 이런유의 범죄가 일어나는 게 아닌가 하고 다케가미는 생각했다. 오해를 각오하고 말하자면, 범죄란 ‘사회가 갈구하는’ 형태로 일어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 106

선생, 나는 놈들이 그런 식으로 죽어서 오히려 덕을 봤다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저도 그렇습니다.
아사이 유코는 눈동자에 분노의 빛을 띠며 말했다.
구리하시와 다카이의 사고사를 천벌이라고 평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저는 그 의견에는 절대로 반대입니다. 놈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죄에 걸맞는 벌을 받지 않았습니다. 뻔뻔스럽게도 벌도 받지 않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잊혀지고 말 겁니다. 그건 정말 옳지 않아요. 정말로 천벌이라면 그래서는 안 될 겁니다. 천벌이란 그렇게 부당하지 않아야 합니다. - 1054

사건이 이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파괴해버린 것이다. 지금 여기 이렇게 앉아 있는 노인의 발치에는 그가 성실하게 일하며 지켜온 인생의 파편이 우수수 떨어져 있다. 한 걸음을 뗄 때마다 이 사람은 그 파편을 밟고, 그것이 부서지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 1108

만일 정말로 진범 X가 따로 있다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물러나지 않는 기자에게 미야케 미도리의 아버지는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했다.
만일? 난 만일이란 표현을 그런 식으로 사용하지 않아요. 만일 미도리가 살아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뿐이요. 그게 아닌 만일은 생각해볼 여유도 없습니다.
신이치는 마에하타 시게코에게 유족의 심정에 대해 말한 적이 있었다. 미야케 미도리의 아버지의 그 발언은 바로 그런 심정을 그대로 나타내는 것이었다. - 1271

2018. m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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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희와 나 - 2017 제17회 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집
이기호 외 지음 / 다산책방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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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적 폭력, 지속적인 재난.

한국 문학 단편들을 보면 아무래도 사회적 문제에 집중되어 있는 주제들을 접할 수 밖에 없다.

개인의 삶을 이야기 하는 작품이 없는게 아닌데도 임펙트있는 이야기가 그 방향이기 때문일까.

학교폭력, 여성혐오, 희망없는 중산층, 나락에 가까운 저소득층, 인재라고 불리우는 재난들.

황순원 문학상 수상작품집은 이에 앞서 읽은 몇권의 단편집들과 겹치는 부분이 많았다.

그래서 조금 흥미가 떨어졌지만, 이는 이 책을 나중에 읽었기 때문이지 재미가 없어서는 아니다.

구병모의 <한 아이에게 온 마을이> 섬찟하게 좋았다.

내겐 환대 라는 단어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어느 책을 읽다가 ‘절대적 환대’라는 구절에서 멈춰 섰는데, 머리로는 그 말이 충분히 이해 되었지만, 마음 저편에선 정말 그게 가능한가, 가능한 일을 말하는가, 계속 묻고 또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신원을 묻지 않고, 보답을 요구하지 않고, 복수를 생각하지 않는 환대라는 것이 정말 가능한가, 정말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않는 일이 가능한 것인가, 그렇다면 좌와 사람은 어떻게 분리될 수 있는가, 우리의 내면은 늘 불안과 절망과 갈등 같은 것들이 함께 모여 있는 법인데, 자기 자신조차 낯설게 다가올 때가 많은데, 어떻게 그 상태에서 타인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가...... 나는 그게 잘 이해가 되질 않았다. 나 자신이 다 거짓말 같은데...... - 33

그 어떤 불편도 부작용도, 정주가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장소에서 원하는 모습으로 원하는 사람과 함께 있지 못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정주는 문득 러시아워에 어깨를 부딪치거나 서로 발을 밟고 밟히는 사이였던, 다시 스쳐갈 일 없으며 형상이 떠오르지 않는 수천수만의 얼굴들이 그리워졌다. 누구도 정주를 알지 못하며 정주 또한 그들을 모르는 세계에서의 불안과, 서로에 대해 잘 안다고 믿어 의심치 않으나 실상은 아는 것이 없는 세계에서의 안식 가운데 선택을 요하는 문제에 불과했다. 환멸과 친밀은 언제라도 뒤집을 수 있는 값싼 동전의 양면이었고, 이쪽의 패를 까거나 내장을 꺼내 보이지 않은 채 타인에게서 절대적 믿음과 존경과 호감을 얻어낼 방법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 113

2018. m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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