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피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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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겁고 비릿한 느와르.

늘 부족하고 늘 허기진 건달 희수 이야기.

정말이지 뻔하디 뻔한 건달 느와른데, 캐릭터의 대사들이 묵직하고 힘있게 이끌어 간 이야기다.

불과 얼마전 또 다른 건달 이야기를 읽어서 내심 시큰둥하는 마음과 추천이 많아서 내심 기대하는 마음이 복닥복닥 섞여 시작한 책인데, 아무래도 마음에 드는 구석이 많은 것이다.

일단은 주인공이 쌩양아치는 아니라서 인지(그 기준이 뭐냐 물으면 애매하지만...)
비정한 정서 때문인지...

좁아터진 동네에서 그들에게 ˝비밀은 없고, 마음은 아타깝고, 피는 뜨겁다.˝(저자의 말이다.)

편하게 읽을 수 없는 폭력이 생생하지만, 그래서 인지 영화 한편을 본 듯한 기분이 든다.

결국 남은 자에게 남은 것은 그저 돌아보면 뼈저리게 아픈 후회 뿐인 정서.

좋아하는 류의 소재도 아닌데 재미가 상당했다.

덧붙여, 농약 먹고는 살아도 나이 먹고는 못산다는 대사가 조금 슬펐다. ;ㅂ;

2017. Jan.

내가 늘 말하잖아. 건달은 그저 쥐죽은듯이 조용히 지내는 게 성숙하고 아름다운 자태라고. 건달이 폼나면 뭘 할거며 유명해져서 이름을 날리면 또 뭐할 거고? 건달이 양복 입고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나고 나면 갈 데라곤 감옥밖에 없는 기라. 그리고 까놓고 말해서 할 짓이라고는 건들거리는 것밖에 없는 건달한테 양복이 대체 왜 필요하노? - 12

니는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라는 게 뭔지 아나? 그게 전생에 돼지로 태어났다가 다음에 인간으로 태어났다가 뭐 이런다는 게 아니고 인간이 아둔해서 한번 빙신짓을 하면 죽을 때까지 빙신짓만 되풀이한다는 뜻이다. - 88

"니랑 인숙이 사이가 똥구덩이다. 지난 이십 년 동안 안 그랬나? 둘이 좋다고 허우적거려봐야 그냥 똥구덩이 안이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합니다. 내가 바봅니까?" 희수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니 바보다. 와 이제 와서 인숙이고? 지금 할 거면 이십 년 동안 와 안 했노."
할말이 없어서 희수는 잠시 멍하니 앉아 있었다. 영감 말이 맞을 것이다. 이 사랑은 똥구덩이일 것이다. 냄새나고 지저분하고 추악한 사랑, 온갖 열등감과 치욕에 사로잡힌 사랑일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 220

양동이 바닥으로 담배를 집어던지고 구둣발로 꽁초를 문질렀다.
"희수야, 니한테 뭐가 없는 줄 아나?"
양동이 다시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다. 라이터 불에 비친 양동의 얼굴이 비정했다.
"니는 씨발 정신이 없다."
씨발 정신은 또 뭐냐는 듯 희수가 양동을 쳐다봤다.
"니는 너무 멋있으려고 한다. 건달은 멋으로 사는 거 아니다. 영감님에 대한 의리? 동생들에 대한 걱정? 사람들이 너에 대해서 하는 평판? 좆까지 마라. 인간이란 게 그렇게 훌륭하지 않다. 별로 훌륭하지 않은 게 훌륭하게 살려니까 인생이 이리 고달픈 거다. 니가 진짜 동생들이 걱정되면 손에 현찰을 쥐여줘라. 그게 어설픈 동정이나 걱정보다 뱁배 낫다. 니는 똥품도 잡고 손에 떡도 쥐고 싶은 모양인데 세상에 그런 일은 없다. 우리처럼 가진 게 없는 놈들은 씨발 정신이 있어야 한다. 상대 앞에서 배 까고 뒤집어지고, 다리 붙잡고 울면서 매달리고, 똥꼬 핥아주고, 마지막에 추잡하게 배신을 때리고 우뚝 서는 씨발 정신이 없으면 니 손에 쥘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세상은 멋있는 놈이 이기는 게 아니고 씨발놈이 이기는 거다."
"그렇게 씨발스럽게 이겨서 얻는 게 뭔데요?"
양동이 이 새끼가 아직도 말귀를 못 알아처먹었네, 하는 표정으로 희수를 잠시 쳐다봤다.
"그래야 입에 풀칠이라도 한단 말이다."
양동은 체념이라도 한 듯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 305

너는 자신을 경멸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부러워하지 않거든. 그런 인간이 갈 곳은 딱 두 군데밖에 없다. 저 바닥으로 계속 추락하거나 아님 저 위로 하염없이 올라가서 왕이 되거나. 둘 다 존나게 쓸쓸하고 무의미한 곳이지. 그래도 사람이 죽을 순 없으니까 어딜 가긴 가야 하잖아? 나는 이왕에 떨어지기 시작한 거 저 밑바닥까지 가보려고. 희수 니는 올라가서 왕이 되어라. 더이상 자신을 속이지 말고. - 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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