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의 생
에밀 아자르 지음, 김남주 옮김 / 마음산책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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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부연되어야 할 것같은 기분이 계속되니 이 책을 안 읽을 수가 없게 된다.

애잔하고 역설적이기로 치면 외딴 바닷가에서 펼쳐지는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에 비할 수 없고, 정교한 세공을 자랑하기로는 `류트`를, 진정성과 유머를 담은 문학적 비망록으로는 `새벽의 약속`을 당할 수 없으며, 감동으로 치면 `자기 앞의 생`에 자리를 내주어야 하고, 작가를 전체적으로 조망하기로는 도미니크 보나의 전기 `로맹 가리`에 미치지 못하는 이 책.(옮긴이의 말 중)

이라고 소개된 이 책을 말이다.

일생을 정체성을 찾아 방랑했다고도 표현할 수 있을 만한 작가이기에, 이 소설(이라지만 자전적 회고?에 가까운) 안에서의 병적인 자기 분열이 충분히 이해되는 바이다.
철저히 가면을 쓴 세상 속에서 위장하는 것이야말로 삶의 실상(p.10)이라고 선언하는데 말해 뭐하겠는가.

지속적인 이명을 만들어 자신 위에 또다른 자신을 덧씌우는 과정이 페르난두 페소아를 떠오르게도 한다.
로맹 가리도 정치적인 입장과 끊임없는 자기 부정의 과정에서 분열적 자아를 창조해내는 것이었을까?

작가적인 자존감이 엄청난 사람이었음에도 틀림없고, 그 만큼 남들의 이목에 섬세하게 반응하는 셀럽이었음에도 틀림없다.
이 둘 사이에서의 고뇌가 익명에 대한 염원?이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다만 환각과 현실이 혼재하는 글안에서 무엇을 믿고 이해해야 하는지가 난감할뿐.

그래서 다 읽고 난 후에도 잘 모르겠다. 이 책을 소설로`만` 읽어야 할지.


나는 익명으로 남고 싶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익명의 시골 익명의 마을에서 익명의 여자와 익명의 사랑을 나누어 역시 익명의 가족을 이루고 익명의 인물들을 모아 새로운 익명의 세계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 들어가는 말

내게는 타고난 언어감각이 있다. 침묵에 귀를 기울이면 침묵의 말까지 알아들을 수 있다. 침묵은 특히 끔찍한 동시에 가장 알아듣기 쉬운 말이기도 하다. 오히려 생생하게 살아 울부짖는 말이야말로 무관심 속으로 떨어져 아무도 듣지 않는다. - p. 19

두번째에다 다시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을 썼다. 그 편이 설득력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서명하고 체념해버렸다. 이제 그 일을 그만둘 수가 없었다. 그 일은 나를 매혹시켰다. 위장꾼, 허풍쟁이, 편집광, 그리고 과대망상증 환자까지 된 것이다. 나는 이제 안전했다. - p. 79

성냥하나에 불을 붙이자마자 내 환각은 사라지고 그 대신 그리스도가 모습을 나타냈다. 그의 옆에는 모모, 다시 말해서 구트 도르 가의 유태계 아랍 꼬마 모하메드가 있었다. 구트 도르, 구트 도르, 구트 도르, 그러니까 알다시피 `자기 앞의 생`에 나오는 그 구트 도르가 말이다. 무엇이 인종차별주의인지, 무엇이 유태인 배척주의인지 모르는 이들의 말에 따르면 이 작품은 인종차별적인 동시에 유태인 배척적이라고 한다. 그들이 유태인 배척주의나 인종차별주의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에게는 그런 생각이 호흡처럼 자연스럽게 내면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신이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법이다. - p. 82

넌 광장한 재능이 있어.
아마 유전일 거예요.
그가 시가를 빨았다.
네 작품에 대한 평이 무척 좋아.
내가 아니라 내 책을 좋게 평한 거죠. 사람 자체가 쓰레기라도 좋은 책을 쓸 수는 있으니까요. - p. 108

나는 비단뱀이 되었다가 그다음에는 어딘가에 덜 소속되기 위해 책이 되었다. 나는 스스로를 통제하고 장악하고 저작권을 챙겼다. 내 안에는 서로 싸우는 두 사람, 내가 아닌 인물과 내가 되고 싶지 않은 인물이 있었다. 죄의식은 명백한 증거를 들이대며 줄곧 나를 압박했고, 주위에서는 일상성과 익숙함이 계속되었다. 나는 나 자신에게서 좀 더 멀어지기 위해 날마다 나 아닌 존재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 p. 154

2016. Ap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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