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문학과지성 시인선 460
이제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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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의 나무

나무는 숲으로 이르고 숲은 바람으로 이른 아침 여위어가는 얼굴로 바람이 말한다 사물들을 가만히 두어라 아무것도 움직이지 말아라 그저 가만히 놓아두어라 이미 그러하다 이미 그러했다 말라가는 가지들처럼 마른 바람이 불어온다

나무의 나무는 곧고 나무의 나무는 휘어진다
나무의 나무는 어둡고 나무의 나무는 혼자다

어느 날의 꿀맛 같은 잠
어느 날의 돌아오고 싶지 않은 마음

나무의 나무가 흔들릴 때 나무의 나무의 계절은 흐르고 나무의 나무는 조금 늙거나 나무의 나무는 조금 더 짙어지는 것인데 어제의 손이 더 차갑거나 더 뜨겁게 느껴지는 것은 오늘의 혈관 속을 흐르는 혈액의 비밀 때문인지도

녹음이 우거진 지평선
만지면 만질수록 엷어지는 몸

순간의 감정을 대신할 또 다른 감정을 찾기를 포기하라 사물들을 가만히 두어라 아무것도 움직이지 말아라 그저 가만히 놓아두어라 그저 가만히 놓여있어라 보이지 않는 입이 있어 보이지 않는 그림자가 있어 무수히 되뇌었던 말들을 다시 소리 내어보는 것인데

그때 우리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그때 우리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우리는 아무것도 갖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로 놓여 있지 않았다 아무것도 아무것으로 놓여 있지 않았다 이미 그러하다 이미 그러했다

사선으로 흩날리는 빗방울
흩어지다 모이는 최초의 구름

나무는 숲으로 이르고 숲은 나무로 이른 아침 나무의 나무는 나무의 나무로 흔들리며 시간의 틈을 얼피시 열어 보여주는 것인데 어느 날의 작고 어린 개가 있어 어늘 날의 희미한 양 떼와 검은 모자가 있어 나무의 나무는 하나인 채로 여럿이고 나무의 나무는 고요하고 나무의 나무는 가깝고 나무의 나무는 다시 멀어지는 것인데

아마도 그러하다 아마도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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