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을 막는 제방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87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윤진 옮김 / 민음사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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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모든 의욕이 말살된 듯한 첫 문단을 읽고, 아... 이 이야기도 몹시 마음을 허하게 만들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독서가 시작된다.

식민 국가만이 아닌 식민지 정착민 조차 수탈하는 구조를 지닌, 그야말로 수탈을 위해 존재하는 식민지에서의 생활을 뜨겁게 그려냈다.
나아질 희망은 늘 그렇듯 본래 있는 자들에게만 있는 것인 그런 구조.
경작을 위한 불하지는 경작이 가능한지의 여부는 물론 지역을 고를 수도 없고 게걸스런 토지국 관리들의 탐욕은 어차피 충족시키기 힘든 조건이다. 뒤늦게 잘못된 불하지를 받았음을 알아차렸지만 발을 들인 이상 앞으로도 뒤로도 물러설 수 없는 덫에 이미 빠져들고 만 것이다. 

희망을 차마 놓을 수 없는 어머니와, 그런 어머니를 버릴 수 없는 두 자식의 이야기.

꽃이 피는 데 100년이 걸린다는 용설란을 심고 눈물을 흘리며 나무를 바라보는 어머니와 그걸 뽑다 내다 버리는 조제프.... 암울하다.

불행을 잘 꺼내어 보란 듯 펼쳐놓는 엄청난 재능이랄까.

뒤라스를 딱히 좋아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매번 작품을 만날 때마다 깊이 남는 면면들이 사실은 몹시 좋아하는 작가가 아닐까 생각한다.

- 셋 모두 그 말을 사는 게 좋은 생각이라고 보았다. 그래 봤자 조제프의 담뱃값을 버는 게 전부였지만 말이다. 우선 어쨌든 생각이었으니 세 사람이 아직 생각을 할 수 있음을 증명해주었다. 나아가 그 말을 통해 바깥 세상과 이어지니 덜 외로웠고, 어쨌든 이 세상으로부터 무언가를, 설사 보잘것없고 형편없다 해도 이전에는 자신들 것이 아니었던 무언가를 끌어내서 소금기에 전 이곳 평야의 자기들 땅으로, 권태와 회한에 전 자기들 셋에게로 끌어올 수 있을 것 같았다. 원래 운송이 그렇다. 설령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 사막이더라도 다른 곳에 사는 사람들, 세상에 속한 사람들을 지나가게 함으로써 무언가 나오게 만들 수 있다. - 11

- 의사는 제방이 무너진 충격을 발작의 원인으로 진단했다. 아마도 틀린 생각이다. 어머니가 품고 있는 그토록 깊은 원한은 아주 서서히, 한 해 한 해, 하루하루 쌓여 온 것일 수밖에 없다. 한 가지 이유만 있는 게 아니다. 천 가지 이유가 있다. 무너진 방조 제방, 세상의 불의, 냇물에서 헤엄치는 두 자식의 모습도 그중에 포함되었다. - 21

- "그러니까......" 쉬잔이 말했다. "우리가 산 건 땅이 아니었어요."
"물이었지." 조제프가 말했다.
"바다였어. 태평양." 쉬잔이 말했다.
"똥이었지." 조제프가 말했다.
"제정신이면 안 샀을 텐데......" 쉬잔이 말했다. - 59

- 더는 어머니를 원망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삶을 무한히 사랑했고, 삶을 향한 지칠 줄 모르는 치유 불가능한 희망이 지금의 어머니를 만들었다. 어머니는 바로 그 희망에 절망했다. 그 희망이 어머니를 마멸시키고 부서뜨리고 발가벗겼다. - 145

- 카르멘은 어머니를 보면 주변을 집어삼키는 괴물이 떠오른다고 했다. 어머니는 평야에서 살아온 농부들의 평화를 무너뜨렸다. 심지어 태평양에 맞서 이기려 했다. 카르멘에 따르면 조제프와 쉬잔은 어머니를 경계해야 한다. 어머니는 너무 많은 불행을 겪으면서 강력한 마력을 지닌 괴물이 되어 버렸다. 자식들은 어머니의 불행을 위로하느라 곁을 떠나지 못하고, 어머니의 뜻에 무조건 따르고, 어머니에게 그대로 삼켜질 위험에 놓여 있었다. - 188

2023. dec.

#태평양을막는제방 #마르그리트뒤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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