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들의 땅
천쓰홍 지음, 김태성 옮김 / 민음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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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흥을 꿈꾸던 시골 용징의 천 씨 일가에 얽힌 이야기.
용징이 왜 귀신들의 땅인지, 초반의 분위기는 비현실적 이미지로 마술적 리얼리즘 같은 느낌을 풍기다가 점차 색채가 돌아오는 것처럼 사건과 인물들이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다섯 딸과 두 아들의 이야기는 어느 하나 희망적이지 않지만 불행도 순응하는 가족의 대서사시는 흥미로운 막장드라마 같다.
용징이라는 장소 자체가 초기 간척민들 사이 종족 투쟁이 잦았고, 화재와 수재가 그치지 않았던 땅으로, 지명에 '징'자를 넣음으로써 안녕과 태평을 기원했다는 설명이 있다. 바람과는 달리 천 씨 일가에게는 끊임없이 불어닥치는 폭풍 같은 땅으로 재현되고, 용징 자체도 허무한 꿈같이 스러져가는 쇠락한 곳이다. 

급변하는 세상에 겁이라도 먹은 듯 언제나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던 아버지, 반면에 제대로 배우지는 못했지만 언제나 바람에 말을 실어 날리듯 떠들던 어머니.
집에서 벗어나고자 공장 노동자로 도시에 나갔지만 결국 집과 가장 가까이 붙어 벗어나지 못한 큰언니, 자신의 존재를 지우기라도 하듯 조용히 공무원으로 살아가는 둘째, 고향의 흔적을 지우려 좋은 대학 최고의 배우자를 선택했지만 폭력 속에 갇혀사는 셋째, 늘 시기의 대상으로 여기던 다섯째의 혼처를 가로챘지만 광인으로 어둠 속에 살아가는 넷째, 가장 아름다웠지만 언니의 배신으로 자신을 해한 다섯째. 마침내 얻은 큰아들은 그다지 머리가 좋지 않아 고향의 유지에게 휘둘려 분수에 맞지 않는 향장까지 지내지만 끝내 부패한 관리로 옥살이를 하고, 작가로 성장한 막내는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고향에서 배척당해 타지를 떠돌다 살인자가 되고 옥살이를 한 끝에 귀향한다. 
그야말로 지리멸렬한 가족들이다.

가족 구성원 들의 사연들 만으로도 구구절절 한 세월이지만, 이 가족과 얽혀있는 주변 인물들의 사연 또한 구구절절하기에.
이 소설 속 모든 인물들이 살아있든 죽어나갔든 귀신같은 존재 그 자체이다.

정치적으로 암담한 시절을 거치고, 본격적인 현대화 물결에 올라타 경기 호황을 거치면서 얼떨떨해하며 허겁지겁 변화의 흐름을 쫓는 군중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귀신들이 도처에 몸을 숨기고 있을 이유, 환경이 충분히 조성되어 있는 곳이 타이완이라는 곳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귀신들의 땅이라니 대만에 대해 많은 것을 알지는 못하지만 다중 식민지였던 나라, 중국의 극심한 견제와 국민당의 독재를 거친 극변의 동아시아 역사의 고난을 많이 겪은 점은 알고 있었다. 차를 배우면서 얻어들은 역사 정도랄까. 친구가 유학을 갔던 시기에 대지진을 겪었기에 자연재해에서도 빠지지 않는 나라라는 점도.
식민지였으면서도 꽤 많은 대만 사람들이 일본에 우호적인 느낌을 받았던 것은 이상하다 여기고 있었는데, 많은 국민들이 식민지 근대화에 대한 긍정적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고 듣기도 했다. 중국이라는 강대국과 대치하고 있다는 점이 친 일본적 성향을 설명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 T에게 자신이 이런 귀신들의 땅에서 왔다는 사실을 어떻게 말해야 했을까.
자신의 황당한 신세를 어떻게 말해야 했을까. 누나 다섯에 형 하나, 좀처럼 말이 없는 아버지, 이러쿵저러쿵 끊임없이 얘기를 늘어놓는 엄마, 뱀 잡는 이웃, 빨간 반바지 차림의 징쯔총, 물웅덩이, 혼례, 추풍나무, 백악관, 하마, 용싱 수영장, 지하실, 양타오 과수원, 청자오마, 밍르 서점, 은색 물탱크 탑을 어떻게 설명해야 했을까. (...) 어른이 된 그는 귀신을 믿지 않게 되었고 두려워하지도 않게 되었다. 귀신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가장 잔인한 것은 인간이었다. - 19

- T가 귀에 대고 물었다면 그는 한 줄로 나란히 서 있는 타운 하우스를 가리키며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나는 이 귀신들의 땅에서 왔어. 여기가 나의 고향이야. 오늘은 중원절이라서 모든 귀신들이 돌아오지. 나도 돌아가야해." - 20

- 둘째 누나는 편지에서 삼합원이 결국 보이지 않게 돼서 정말 좋다고 했다. 그것이 보이지 않으니 유년이 존재했다는 증거가 사라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아무것도 볼 수 없다. 망각이 더 확실해졌다. 그는 있는 힘을 다해 유년을 지워 버리려 노력했지만, 날이 어두워지고 눈을 감으면 삼합원이 반짝반짝 빛나고 타운 하우스는 수정처럼 맑았다. 전혀 사라지지 않은 것이다. 철거했다 해도 실체의 증거만 사라졌다. 지진을 두려워하면서 그것에 탄복하듯이, 기억 속에서는 완전한 파괴가 불가능했다. 몇 초 안에 철저히 붕괴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 하지만 오늘 그는 돌아왔다. 그에게는 해답이 없었다. 사람은 왜 집으로 돌아오는 것일까? 어디가 집인가? 그가 돌아온 것은 속죄를 위해서도 아니고 참회를 위해서도 아니었다. 해답을 얻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귀향은 의무였다. 귀향은 그를 질식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돌아와야 했다. 달리 갈 수 있는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


- 누구나 아픈 기억과 상처가 있으면 이를 덮어 버리거나 묻어 버리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과거는 그림자 같고, 지나간 일들은 다시 반복된다. 과거가 있는 한 귀신은 존재한다. 인간 세계 곳곳에 귀신들이 도사리고 있다. 어쩌면 우리 모두 귀신인지도 모른다. - 작가의 말 중

2024. Feb.

#귀신들의땅 #천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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