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엔원년의 풋볼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유하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책장에 꼿혀있었던 시간이 상당한 이 책은 작가의 사망 소식을 듣고서야 읽게 되었다.

전후의 황폐함과 새로운 세상에 대한 불완전한 기대가 가득한 시절.
존재하는 것 자체의 무의미함과 삶에 대한 무기력감으로 사로잡힌 미쓰사부로. 그럼에도 여차저차 인간이 해야할 생의 주기 과업들은 하나씩 해놓았다. 결혼도 하고 직업도 갖고 아이도.
이 부부의 냉소와 무기력이 장애를 가진 아이로 부터 기인한 것인지, 원래 기질이 그러한 것인지, 세상이 그저 그렇게 돌아가고 있기에 그런것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모든 상황들이 어우러져 이야기의 분위기는 우중충하기 그지 없다.

사건의 중심에 있으면서도 외부인이 되기를 갈망하는 화자 미쓰.
과거의 농민 봉기에 영감을 받아 새로운 혁명을- 그러나 터무니없는 방법으로- 다카.
폭력적인 선동으로 부조리를 부조리하게 들이받는 이 과정은 바로 전에 겪은 전쟁과 그다지 다르지 않게 느껴진다.

일제 강점기 하에 강제 동원되어 일본에서 노역을 하던 조선인 부락이 이야기의 주요한 무대이고, 전후 일종의 보상안으로 조선인들에게 불하해준 토지를 독점 매입해 부를 이룬 조선인 남자를 슈퍼마켓 천황이라고 부르는 것은 묘한 감상을 갖게 한다.

우리나라로 치면 해방 직후의 시절인데, 주인공 부부는 집에 온실을 갖추고 고무나무나 몬스테라를 키우는 장면이 있다. 새삼 이런 단편적 묘사에서 원예강국의 이미지를 느끼게 되네... 식덕이라 어쩔 수 없는 감상의 일부.

장남이 아니면 잉여적 존재로 전락하는 형제들에 대한 이미지가 근대 일본도 짙게 드리워져 있다는 점도.

극도의 허무함이 주 정서인데, 그 와중에 온갖 자극적 사건들이 나열되어 있어 혼란스럽다는 인상을 받았다.


- 눈뜰 때마다 잃어버린 뜨거운 ‘기대’의 감각을 찾아 헤맨다. 결여감이 아니라 그 자체가 적극적인 실체인 뜨거운 ‘기대’의 감각. 그것을 찾아낼 수 없음을 깨닫고 나면 또다시 수면의 비탈길로 자신을 유도하려 한다. 잠들라, 잠들라,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 10

- 단순해, 미쓰. 골짜기 사람들은 이십 년 전에 강제로 끌려와 숲으로 벌채 노동을 나갔던 조선인들한테 이젠 경제적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거라네. 그러한 감정이 암암리에 쌓여서 일부러 그를 천황이라고 부르는 원인이 된 거지. 골짜기는 말기 증상을 보이고 있다네! - 175

- 나는 폭력에 대해 생각하면 언제나 내 조상들이 그들을 둘러싼 폭력적인 것에 대항해 잘도 살아남았고, 나라고 하는 자손에게 생명을 전해주었구나 하고 이상하게 생각해요. 그들은 무서운 폭력의 시대를 살았으니까요. 여기서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 뒤에서 나와 이어지는 사람들이 도대체 얼마만큼의 폭력에 대항해야 했을지를 생각하면 아찔해요. - 269

- 작가? 분명히 그 사람들은 진실에 가까운 말을 하고서도 맞아 죽지도 않고 미치광이가 되지도 않고 살아남을지도 모르지. 그 작자들은 픽션의 틀로 사람들을 온통 기만하지. 그러나 픽션의 틀을 덮어씌우면 아무리 끔찍한 일도, 위험한 일도, 파렴치한 일도, 자신의 신변은 안전한 채로 말해버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작가의 작업을 본질적으로 취약하게 만들고 있어. - 294

2023. mar.

#만엔원년의풋볼 #오에겐자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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