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저하는 근본주의자 민음사 모던 클래식 60
모신 하미드 지음, 왕은철 옮김 / 민음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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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국 파키스탄에서 비교적 풍요로운 경제상황에서 균형감과 예의바름을 가지고 자란 청년이 미국의 교육과 혜택을 받고 미국 사회로 무난하게 편입하는 듯 하지만, 911테러를 기점으로 힘이 없는 나라의 국민으로서의 현실을 깊이 자각하게 되는 찬게즈의 이야기.

트레이드센터의 붕괴를 바라보는 이중적 감정을 묘사하는 부분에서 공감하는 마음과 윤리적으로 불편한 마음이 생긴다. 어쩔수 없는 감정일거 같다.
미국의 파워게임에 좌지우지되는 나라의 국민이니까.
고작 몇백년의 역사를 가지고 수천년의 문명의 시간들을 쉽게 파괴하는 모습들을 보자면 나에게도 근본주의자의 마음이 있는게 아닐까 싶으니까.

가장 진보한 인류 문명의 성취를 누리는 시대에도,
그것을 누릴 여건이 되지 않는, 그것을 누릴 여건을 주지 않는 강대국들의 입김에 좌절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은 잊을만 하면 깨우쳐지는 감정이다.

그런 지점의 이야기를 아주 능청스럽고 처연한 톤으로 말하는 찬게즈는 과연 무사할까?

열린 결말로 끝이 나는 이야기는 가끔은 좋지만, 대체로 좋아할수 없다.

- 나 같은 학생들한테는 비자와 장학금을, 그것도 전액 지원 장학금을 주고 능력주의에 초대한 거죠. 그에 대한 보답으로 우리한테, 우리 재능을 당신들 사회, 그러니까 우리가 합류하고 있는 사회에 기여하라고 했던 거죠. 우리는 대부분, 기꺼이 그렇게 하려고 했어요. 나는 분명히 그랬어요. 적어도 처음에는 그랬어요. - 9

- 하지만 혼란에 빠지는 순간들도 있었어요. 특별히 기억나는 일이 하나 있어요. 나는 동료들과 리무진을 타고 가고 있었어요. 교통 체증 때문에 차가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했어요. 그런데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니 불과 몇 미터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승합차 운전자가 나를 쳐다보더군요. 그의 표정에는 노골적인 적개심이 있었어요. 나는 이유가 뭐지 전혀 몰랐죠. 전에 만난 적이 없었거든요. 그건 확실해요. 몇 분 지나면 우리는 아마 서로를 다시 볼 일도 없었을 거예요. 그런데 그의 미움이 너무 노골적이고 너무 사사로워서 나는 괴로웠어요. 나도 화가 나서 그를 노려봤죠. 당신이 여기에 무물며 보았겠지만, 라호르에서는 노려본다는 게 심각한 의미거든요. (...) 그런데 내 동료 중 하나가 나한테 문가를 물었어요. 내가 그에게 대답을 하려고 몸을 돌렸을 때, 아주 이상한 일이 일어났어요. 나는 그 - 금발에 옅은 색 눈, 그리고 무엇보다도 세부적인 일에 몰두하는 표정- 를 바라보며 생각했어요. 너는 정말로 이국적이구나. - 62

- 당신한테 이미 얘기한 것처럼, 나는 가난하게 자라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일종의 동경을 품고 자랐지요. 내 경우에는 내 가족이 결코 갖지 못했던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졌다가 잃어버린 것에 대한 동경이었죠. - 65

- 텔레비전을 켰을 때 처음에는 영화가 나오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계속 보니까, 영화가 아니고 뉴스더라고요. 뉴욕 월드 트레이드센터 쌍둥이 건물이 하나둘 무너지더군요. 그때, 나는 미소를 지었어요. 그래요, 혐오스럽게 들릴지 모르지만, 나의 첫 반응은 놀랍게도 즐거움이었어요.
당신은 혐오스러워하는군요. 당신은 아마 의식하지 못하겠지만, 주먹을 쥐고 있군요. 그 큰 손으로 말이죠. 하지만 나는 비사회적 인격장애자는 아니에요. 내 말 믿으세요.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무관심하지도 않아요. (...) 그래서 내가 무고한 사람 수천 명이 살육당하는 걸 보고 기뻤다고 하는 건 당혹스러운 느낌과 더불어 하는 말이에요.
하지만 그 순간, 나는 그 공격의 희생자들을 생각한 게 아니에요. 텔레비전에서는 어떤 허구 인물이 죽으면 마음이 많이 움직이죠. 여러 일화를 통해 내게 친숙해진 인물이 죽으니까 그런 거죠. 그런데 그 순간은 그게 아니었어요. 나는 그 모든 것의 상징성에 빠져들었던 거죠. 누군가가 그렇게 가시적으로 미국의 무릎을 꿇렸다는 사실에 그랬던 거죠. 아, 내가 당신을 더 불쾌하게 하는 모양이군요. 물론 이해합니다. 자기 나라의 불행에 다른 사람이 흡족해하는 걸 보는 건 가증스러운 일이지요. 하지만 당신도 그런 감정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할 거예요. 당신은 미국 무기가 적의 건축물을 폐허로 만들어 버리는, 최근에 상당히 유행하는 비디오클립을 보면 즐겁지 않나요?
하지만 당신들은 전쟁 중이라고요? 맞아요, 일리 있는 말이죠. 나는 미국과 전쟁 중이 아니었으니까요. 전쟁과는 거리가 멀었죠. - 67

- 사실 나는 그 역할이 마음에 들었어요. 주제넘게도 내 인생은 그렇게 예정되어 있었고, 내가 그렇게 거창한 환경에서 정말로 부유한 사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살게 되어 있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죠. 에리카는 내 가치를 보증해 줬어요. - 78

- 나는 그날 밤, 내 처지를 생각하면 밤을 새웠어요. 사실, 의심의 여지가 없었어요. 나는 근대적이 예니체리였어요. 미국이 나와 같은 혈족인 나라를 침략하고 또 내 나라가 전쟁 위협에 직면하도록 공모하는 상황에서, 미국이라는 제국의 하인 노릇을 하고 있었으니까요. 물론 나는 몸부림쳤죠! 물론 마음이 찢긴 상태였고요! - 134

- 맞아요, 내 생각은 황량했지요. 미국이 세계에서 행동하는 방식에 내가 늘 분개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당신네 나라가 다른 나라 일에 계속 관여하는 건 참을 수 없었어요. 베트남, 한국, 타이완 해협, 중동, 그리고 이제는 아프가니스탄까지 말이죠. 미국은 우리 아시아 대륙을 둘러싼 갈등 대부분과 교착 상태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어요. 게다가 나는 파키스탄인으로서의 경험을 통해 미 제국이 힘을 행사하는 주된 수단이 재정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원조와 제재를 번갈아 하면서 말이죠. 그런 지배의 과업을 돕는 일을 하지 않겠다고 한 건 옳은 일이었어요. 놀라운 게 하나 있다면, 내가 이런 결론에 도달하는 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는 거였어요. - 138

2022. dec.

#주저하는근본주의자 #모신하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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