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시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03
저메이카 킨케이드 지음, 정소영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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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글픔과 비슷하지만 그보다는 더 묵직한 감각으로 읽었다.

무해한 1세계인들의 얼굴을 볼 수 있다.
타인에게 다정하기도하고 그러나 무지하고 무식한, 필요 이상을 알려고도 하지않고 알 필요도 없는 안락한 삶에 안착한 이들의 모습으로 말이다. 대체로 이런 모습이 1세계와 그 외 세계의 격차이기도 하지만 요즘은 같은 국가 안에서도 빈부의 따른 격차이기도 하다. 지리적 거리감이 있는 전자의 경우보다 후자의 경우가 더 가시적인 사회적 문제를 유발 하는 것 같다.

루시의 분노, 적의는 이유가 충분하다.
왜 감사할 줄 모르냐고 묻는 가부장적 가족주의와 ,제국주의, 인종주의, 계급주의에 대해 의문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너희들이 무엇이기에 감히 나에게 감사를 요구하냐고.

˝화가 많은˝ 수만은 유색인 여성들은 이 의문을 공감할 것이다.

짧고 강렬한 책.

- 현실과 마주해 실망하는 일이 이번이 처음도 아니고, 마지막도 아닐 터였다 - 10

- 3월 초 어느 날 아침에 머라이어가 내게 말했다. ˝넌 봄을 본 적이 없지?˝ 다 알고 묻는 거라 대답은 들을 필요도 없었다. 봄이 친한 친구라도 되는 듯한, 큰맘 먹고 오랫동안 먼 길을 떠났다가 곧 돌아와 뜨거운 재회의 기쁨을 안겨줄 그런 친구라도 되는 듯한 말투였다. 그녀가 말했다. ˝수선화가 땅 위로 솟아 오르는 모습을 본 적 있어? 엄청나게 많은 꽃들이 활짝 피어서는 산들바람이 불어오면 앞쪽으로 길게 펼쳐진 잔디를 향해 꾸벅 절을 해. 그런 거 본 적 있어? 그 광경을 볼 때마다 나는 살아 있다는 게 참 기뻐.˝ 그 말을 듣고 난 생각했다. 그러니까 머라이어는 산들 바람에 몸을 숙이는 꽃을 보면 살아있는 게 기쁘구나. 어떻게 사람이 저럴 수가 있지? - 19

- 봄이 시작된다는 그날 세찬 눈보라가 찾아왔고, 그날 하루에만 겨우내 왔던 눈보다 더 많은 눈이 내렸다. 머라이어는 나는 향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늘 이렇다니까.˝ 그렇게 말했는데 다른 사람에게 막 배신이라도 당한 투였다. 난 웃어 주었지만, 사실은 정말 알 수가 없었다. 어떻게 날씨가 마음을 바꿨다고, 날씨가 자기 기대에 어긋났다고 비참한 기분에 빠질 수 있지? 사람이 어떻게 그렇지? - 21

- 여하튼 이번에 눈이 내렸을 때는 나도 뭔가 다르다고 느꼈다. 어딘지 모르게 아름다웠다. 매일 일상에서 바랄법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일단 아름다움이 넘치도록 많을 때라야 음미 할 수 있는 그런 아름다움. 해 지는 시간이 늦어져 낮이 길어지고, 저녁 하늘은 평소보다 낮게 내려 앉은 듯 보였다. 반숙계란의 흰자 같은 색깔과 감촉을 지닌 눈으로 덮인 세상은 부드럽고 사랑스럽고, 뜻밖에도 나를 보듬어 주는 기분이었다. 내가 사는 세상이 부드럽고 사랑스럽고 따뜻하게 보듬어 준다는 것을 견딜 수 없어서, 난 길에 서서 울었다. 앞으로 살면서 무엇 하나 더 사랑하는 일이 없기를 바랐고, 내 마음이 수천 수만 갈래로 찢겨 발밑에 널부러지는 일이 없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 23

- 머라이어는 내가 생전 처음 수선화를 보고 기뻐서 그러는 거라고 오해하고는 팔을 뻗어 나를 안으려고 했다. 하지만 나는 몸을 뒤로 뺏고, 그러자 입이 떨어졌다. ˝아줌마는 내가 열아홉이 될 때까지 실제로 보지도 못할 꽃을 노래한 시를 열 살의 나이에 암기해야했다는 사실을 알기나 해요?˝ 말을 내뱉자마자 난 그녀의 사랑스러운 수선화를 그녀 자신이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그런 환경에 집어던진 것을 후회했다. 피정복자와 점령지, 야수들이 천사를 가장하고 천사들이 야수로 묘사되는 환경말이다. 나를 거의 알지도 못하는 이 여인은 나를 사랑했고, 자기가 사랑한 이것 - 활짝 핀 수선화가 무리지어 넘실대는 수풀- 을 내가 사랑하기를 바랐다. 마치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듯이, 뜻밖의 고된 노동을 한 뒤 이제 좀 쉬려는 사람처럼 그녀의 눈이 흐릿해졌다. 그녀의 잘못이 아니었다. 내 잘못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가 아름다운 꽃을 보는 그곳에서 나는 비통함과 원한만을 본다는 사실은 어떻게 해도 달라질 수 없었다. 우리가 그 장면을 똑같이 보고 함께 눈물 흘릴 수도 있겠지만, 그 눈물의 맛은 다를 것이었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집으로 걸어 같다. 끔찍한 수선화가 어떻게 생겼는지 마침내 보게 되어 기뻤다. - 28

- 머라이어는 ˝내게 원주민의 피가 흐른다˝라고 했고, 장담하건대 그 말은 무엇보다 마치 전리품을 가지고 있다는 선언 같았다. 대체 어떻게 정복자가 동시에 피정복자일 수도 있다는 주장을 할 수가 있지? - 37

- 여기서 보낸 여름을 떠올려 보았다. 겉으로는 달라 보이는 것들 사이에서 통일성을 발견했다. 무척이나 행복한 순간들을 맛보았고 내 미래를 상상해보고픈 갈망이 생겼지만 동시에 환상이 깨지며 대단한 실망감을 맛보기도 했다. 하지만 삶이란 이래야 하지 않을까? 한없이 나를 끌어내리는 위험하기만 한 저류가 아니라 이렇게 기복이 있는 게 맞지 않을까? - 75

- 폴은 차를 몰며 대양을 건넜던 위대한 탐험가들이 이야기를 해 주었다. 단지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유를 위해서였고, 그렇게 자유를 찾아 나서는 것이 인간의 조건이라고 했다. 그에게 그런 취미, 그러니까 자유라는 취미가 있다는 건 그때 처음 알았다. - 103

- 엄마는 날 잘 알았다. 자기 자신을 아는 만큼이나 잘 알았다. 당시 나는 우리가 아주 똑 닮았다고 보았다. 그런 엄마가 아들이 앞으로 해낼 일이 얼마나 자랑스러울지 하는 생각이 빠져 눈에 눈물이 그럴해질 때마다 내 심장에는 칼이 꽂히는 심정이었다. 자신을 똑 닮은 자식인 나와 관련해서는, 약간이라도 비슷한 상황을 예상하는 인생의 시나리오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난 속으로 엄마를 ‘여자 유다‘라고 불렀다. 그러면서 그때조차 완전한 절연이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엄마와의 절연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 104

- 난 사회적 지위도 없고 내가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돈도 없었다. 내겐 기억이 있고, 분노가 있고, 절망이 있었다. - 108

- 나는 이 세상에서 혼자가 되었다. 그것만 해도 상당한 성취였다. 그걸 이루려 애만 쓰다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행복하지는 않았지만, 그것까지 바라면 과하지 싶었다. - 129

2021. nov.

#루시 #저메이카킨케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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