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의 페미니즘×민주주의
정희진 외 지음 / 교유서가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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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에 방점이 찍힌 이야기.
한겨레에서 주최한 강연을 글로 엮은 책이다.

젠더 권력, 한국 남성, 대중문화, 정치, 민주주의안의 여성, 혐오에 대한 8개의 강연이다.

좋은 내용의 이야기지만, 다양한 청중을 고려하는 강연이어서 일까, 강도, 심도가 얕다고 느껴진다. 스피치라는 것은 아무래도 현장성이 중요하니 더 그럴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지금, 여기라는 방점도 급변하는 여성운동의 흐름에 비춰보면 조금 올드하다고 여길만한 지점들이 곳곳에 있다.

그래도 사 읽는다. 왠지 모를 의무감이 들어서.


한국사회에서, 아니, 모든 가부장제 사회에서, 젠더 문제와 관련해 가장 흔히 하는 말은 아마도 “사소하다”가 아닐까 합니다. ‘여성이 억압받고 있다/아니다’ 이런 이야기보다, 여성이 성차별의 피해자든 ‘여성 상위 시대’든 간에 어쨌든 ‘여성’만 들어가면 ‘사소하다’, ‘개인적인 문제다’, ‘집안일이다’ 등등의 담론이 대세를 이루죠. - 16, 정희진

페미니즘의 가장 기본적인 주장 중 하나는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 The personal is the political”죠. 이 말이 뭐냐면 남성에게는 퍼스널한 문제가 여성의 입장에서는 폴리티컬하다는 거예요. 여성에게는 공적 영역도, 사적 영역이라고 간주되는 영역도 모두 정치의 장입니다. - 24, 정희진

이 세상의 모든 범죄 중 피해자를 욕하는 범죄는 드뭅니다. 심지어 보이스피싱도 피해자를 욕하지 않아요. 그런데 성범죄는 피해자를 욕하는 거의 유일한 범죄입니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네가 끝까지 저항했으면 성폭력은 불가능했을것이다’, ‘네가 만만해서 그랬을 것이다’라고 성범죄 피해자들 탓을 합니다. - 37, 서민

작가들은 여성인물뿐만 아니라 남성인물에게도 어떤 결함과 장애를 줍니다. 그런데 제가 남성인물에게 문제를 발생시켰을 때는 거기 부딪히고, 해결을 시도하고, 문제를 극복하거나 좌절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이야기이자 작품의 목표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여성인물에게 주어진 상황은 그저 전시되고 끝나는 경우가 많았죠. 제 무의식적 우선순위가 들통났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인식이 여기까지 도달하지 못하면 작가들은 이런 불평을 하기 쉬워요. “이야기 안에서는 살인도 하고, 전쟁도 일어나는데, 여성혐오는 왜 안 돼?” 판단 착오입니다. 작가가 작품 안에서 세계의 문제를 드러낼 때는 보통 그것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계를 모형으로 만들면서 일종의 ‘문제적’ 대상화를 하지요. 문제의식이 있는 작가들은 거기서 작업을 끝내지 않습니다. 대상화된 인물들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싸우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그게 바로 ‘이야기’입니다. 그 과정이 완결되면 작가의 의도대로 이 세계가 작품 안에 ‘투사’ 된 것입니다. 여성혐오라고 비판받는 영화는 세계의 문제를 투사하는 게 아니라 재생산하는 데서 멈춥니다. 단지 여성이 두들겨맞는 장면이 영화에 나왔다고 ‘여성혐오’라고 말하는 여성관객은 없습니다. 그건 관객의 수준을 무시하는 거예요. 관객들은 맥락을 본능적으로 구분해냅니다. 영화가 여성인물이 당면한 문제를 전시하고 지나가는지, 아니면 작가의 문제의식이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중인지. (중략) 여성이 치명적 위협으로 느끼는 상황이 작가적 고민이 느껴지기는 커녕 ‘툭’하고 장면으로 떨어진 채 지나간다면 관객들은 불쾌감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창작자가 그 상황에 윤리적으로 적극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더라도, 무의식적인 가치의 우선순위가 반영이 된 거예요. - 72, 손아람

박찬욱 감독은 이에 대해 좀 반성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는 <아가씨>(2016) 개봉 즈음에 JTBC <뉴스룸>에 나와 “<올드보이>(2003)를 찍었을 때 강혜정이 연기한 여성캐릭터만 진실에서 소외된 상태로 남겨놓은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걸 해결하려는 것이 <친절한 금자씨>(2005)나 <박쥐>(2009), <스토커>(2013)로 이어지는 것 같다”라는 이야기를 하는데요, 그런 의미에서 <아가씨>는 박찬욱 자신이 큰 영향력을 행사한 감독으로서 일정 정도 책임을 져야 하는 ‘한남 시네마틱 유니버스’에 대한 어떤 반성문과도 같은 영화가 아닌가 싶습니다. - 193, 손희정

2018. j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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