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에게 가는 길 - 일곱 살에 나를 버린 엄마의 땅, 스물일곱에 다시 품에 안다
아샤 미로 지음, 손미나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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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글을 읽게 된 동기에 손미나 아나운서의 번역이라는 점이 십분 작용했다는 것을 숨길 수가 없다.

'스페인 유학시절 휴지통을 옆에 끼고 펑펑 울며 읽었던 책'이라는 광고는 이 책에 대한 관심을 한껏 증대시켰고 설레는 마음으로 읽었다.

 

이 글을 읽으면서 아주 오래 전에 책으로도 보고 영화로도 보았던 <수전 브링크의 아리랑>이 떠올랐다. 어린 시절 스웨덴에 입양된 수전이 양부모의 학대에 자살을 기도하지만 실패하고 집을 나온 후 방황을 하다가 아이를 낳고 혼자서 살아가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이 영화는 당시에 해외 입양에 대한 사회의 관심을 불러일으켜 입양후에 아이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추적하는 프로그램들을 만들게 하기도 했었다. 그 영화에서도 보다시피 해외에 입양된 우리나라 아이들이 양부모와의 불화나 인종차별로 고통스런 삶을 사는 경우도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일곱살에 인도에서 스페인으로 입양된 꼬마아이 아샤는 다른 사람과는 다른 자신의 용모때문에 특별한 어려움을 당한 것 같지는 않다. 흔히들 한국에서 입양된 아이들이 겪는 인종차별따위는 심하게 겪은 것 같지는 않아보였다. 자신을 무척이나 사랑하는 양부모와 같이 입양된 동생인 파티마와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기 때문인지 이 책의 주인공 아샤는 자신에 대한 긍정과 낙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듯 보였다. 

20년이 흐른 뒤 아샤는 자신을 버린 나라 인도를 방문하게 된다. 너무나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돌아간 인도의 모습은 그녀를 놀라게 하기도 했고, 그녀를 아프게 하기도 했으나, 어린 시절의 기억을 찾아 자신이 자란 고아원을 방문하기도 하고 키워준 수녀님들을 만나서 자신의 출생을 알게된다.

 

아샤는 내가 흔히 알고있던 입양아들보다는 자신에 대한 정보를 아주 많이 갖고 있었다. 살던 곳, 그 때의 사진과 그녀의 기억들은 그녀가 자신의 엄마에게 가는 길을 쉽게 했다. 한편으로는 한국인 입양아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부모를 찾고 싶은 마음에 한국에 왔다가 상처만 받고 돌아가는 많은 젊은이들의 모습을 너무 많이 본 탓일까?

 

인도를 바라보는 아샤의 눈은 인도인도 아니고 유럽인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아마 아샤도 인도에서도 스페인에서도 이방인처럼 느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샤의 이 길이 평생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그 근원적인 외로움을 달래주었기를 바란다.

 

아샤의 마음에 공감이 잘 안된 것은 사실이다.

자신이 자란 고아원과 수녀원을 찾는 아샤의 설레고 떨리는 여정에 왜 난 충분히 공감할 수 없었을까. 아샤의 엄마처럼 늙어보이는 아샤의 언니와의 해후에 왜 함께 눈물을 흘리지 못한 것일까.

마치 아샤의 일기를 옮겨놓은 듯 맥이 끊기는 이야기들이 나를 아샤의 마음에서 멀어지게 한 것은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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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적뒤적 끼적끼적 : 김탁환의 독서열전 - 내 영혼을 뜨겁게 한 100권의 책에 관한 기록
김탁환 지음 / 민음사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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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풍광 두 개가 겹친다. 하나는 1987년 봄, 허름한 지하 술집 앉은뱅이 탁자 앞에서 황석영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를 읽는 대학 신입생 김탁환의 놀란 눈동자이고, 또 하나는 1791년 겨울 광통교 골방에서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꺼내 펼치는 성균관 상재생 이옥의 떨리는 손가락이다.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위험한 순간이다."

 

                                                                                  본문 20쪽 '책 한 권의 기적' 중에서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 책깨나 읽었다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독서편력을 훔쳐보기를 좋아한다고 나는 믿는다. 나의 경험적 사실에 근거하면 말이다. 어린 시절부터 책을 좋아해 남의 집 책장까지도 나의 것으로 생각하던 나는 다른 사람들은 어떤 책을 읽었는지 항상 궁금했고 혹시나 내가 안 읽은 책을 읽었거나하면 그게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그런 책 중의 하나로 김현(저자 김탁환도 언급한 )의 <행복한 책 읽기>라는 책을 가지고 있다. 아끼고 아껴서 읽은 책이라서 꽁꽁 감춰두고 남에게 빌려주지도 않던 책이다. 최근에 읽은 책으로는 앤 패디먼의 <서재 결혼 시키기>가 있다. 공감하고 부러워하고 깔깔거리며 읽었던 책이다. 그런 책들을 읽으면서 느끼는 점은 나는 언제쯤 여기 언급된 책을 다 읽을까 하는 부러움과 이들처럼 나도 내가 읽은 책을 좀 정리해 두었으면 좋았을 것을 하는 후회다.

이제는 예전에 읽었던 책을 또 구입할 정도로 기억력도 믿을 수 없고,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마음의 움직임을 책장을 덮자마자 잊어버리기도 한다. 책을 읽자마자 그 감동의 여운이 사라지기 전에 좀 적어둘 것을 ...... 인생이란 것이 이리도 짧고 내일을 기약할 수 없다는 것을 젊었을 때는 몰랐다.

 

김탁환의 <뒤적뒤적 끼적끼적>은 그 후회와 부러움을 또 다시 불러 일으켰다.

위에 인용한 글에서의 김탁환처럼 나 역시 그 해 봄에 어두운 방에서 황석영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를 읽으면서 전율했던 기억을 갖고 있다. 그는 그 순간에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고 한다. 한 권의 책이 사람의 인생을 바꿀수도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그러나 같은 책을 같은 시간에 읽고서도 나와 그의 인생이 이리도 다른 것을 보면 그 뒤에 어떤 삶을 만들어가는가가 더 중요한 것 같다. 그것의 주체는 물론 사람이다.

아마도 살아온 시대가 같아서였겠지만, 총 10개의 장으로 나누어 소개된 100권의 책중에는 내가 이미 읽은 책들도 언급되었고, 제목만 들었거나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를 들은 책들도 많다. 목차를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책의 내용과 함께 그 책들과 보낸 나의 시간들이 떠올라서 마치 오래된 친구를 만난 듯 반갑고 또 기뻤다. 그 중에는 읽으려고 사 두고 아직도 책꽂이에 꽂아두기만 한 헨리 필딩의 <톰 존스>도 있다. 저 두꺼운 책을 올해가 가기전에 꼭 읽어야겠다. 많은 책들의 제목과 지은이를 메모하고 독서 계획을 모처럼 세울 수 있었다. 편독이 심한 나와는 달리 그의 독서는 광범위했다. 예술과 사회와 문학과 과학이 골고루 포진한 그의 독서 세계는 한없이 넓고 깊어보인다. 그의 책들이 그리도 흡인력이 있고 탄탄한 것은 아마 이 뛰어난 독서가 그 바탕일 것이다.

 

문득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를 한바퀴 둘러본다. 이미 바래서 누리끼리한 표지들도 있고 갓 나와서 반짝거리는 표지들도 보인다.  좁은 자리를 차지하고 서재의 한 귀퉁이에 놓여있으나 그 한권 한권이 하나의 인격이라고 생각한다. 오늘은 누구를 만나볼까? 읽지못한 채 쌓아둔 많은 책들에게 그 저자에게 그 주인공에게 문득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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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요나라 사요나라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노블마인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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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소설 속에서 나에게 말을 거는 사람은 여러 명이다. 한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라 슌스케, 가나코, 와타나베 이렇게 세 사람이 각자 자신의 이야기를 내게 전달한다. 그들이 말을 거는 이유는 자신을 이해하고 싶어서이다. 얼핏보면 내게 자신의 이야기를 함으로써 스스로의 정당성을 알리고자 하는 듯이 보이지만, 실은 이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자기 스스로 믿으려고 애를 쓴다.
 
어느 무더운 여름, 한 계곡에서 아이의 시신이 발견된다. 그리고 그 범인으로 지목된 사람은 다름아닌 아이의 엄마, 히토미이다.
이렇게 시작된 소설은 히토미가 아이를 살해하게 된 경위를 파헤치는 심리소설로 생각되기 쉽다. 그러나, 이 소설의 핵심은 히토미와 공동주택의 이웃인 슌스케와 가나코의 사연, 그리고 어린 시절의 상처를 간직한 전직 럭비선수인 기자 와타나베의 사연이었다. 그리고 그 사연들이 지금 여기 모여서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다.
히토미를 집중 취재하던 기자 와타나베는 어딘지 옆집의 슌스케에게 관심이 갔다. 그의 요염한 아내인 가나코 역시 흥미로운 인물이었다. 그는 어떤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그들의 뒷조사를 한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을 세상에 발표하면 특종감이지만 그들의 사연에서 어린 시절 자신의 상처를 발견하고 그것을 치유하는 계기를 얻게 된다.
 
누군가의 어떤 행동은 그냥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모습은 그저 우연에 의한 것이 아니다.
이렇게 될 수 밖에 없는 어떤 필연이 기억의 저편에 있는 것이다.
슌스케가 좁고 지저분한 집에서 고통받으면서도 더 나은 삶의 조건을 찾지 않는 이유도 슌스케의 과거의 어떤 무엇이 그 원인이고, 와타나베가 아내와 별거 아닌 별거를 하는 이유도 어린 시절 받았던 충격 때문이란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와타나베는 그들의 그 비정상적인 삶의 모습에서 무엇인가 동질성을 느꼈기 때문에 그들의 삶에 다가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의 감정은 도대체 그 형체가 무엇일까?
상대에게서 나의 어떤 점을 발견할 때 우리는 무조건적인 신뢰를 그에게 준다.
결국에 사람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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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말해줘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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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사람이 누군가를 특별하게 생각하게 되면 감각이 예민해지는 것 같다. 그 사람에 관계된 것들에 더욱 특별해지는 것이다.

그가 관계된 물건, 그와 알고 있는 사람들, 그가 하는 일 심지어 그가 입었던 옷의 색깔 (나의 경우라면 그가 읽은 책에 더욱 관심이 갈 것 같다.)까지도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는 특별하게 다가오고 의미있는 대상이 되는 것이다. 마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어야 그가 나에게 와서 꽃이 되듯, 내가 대상을 의미있게 바라볼 때 그 대상은 나에게 오래도록 무엇인가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어쩌면 푸른 빛의 스웨터나 어쩌면 흔한 커피 한 잔도 사랑에 빠진 이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되고 간절하고 설레는 대상이 될 수 있다. 또 하나 사랑에 빠진 이의 가장 특별한 능력은 어느 곳에서라도 상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점이다. 어떠한 소음 속에 있더라도 대상의 목소리를 신기하게도 알아듣는 것이다. 엄마가 아이의 목소리에 반응하듯이, 차를 아끼는 사람이 엔진 소리만으로도 구별하듯이 말이다.

이 소설 <사랑을 말해줘>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세상과의 소통을 위해서 위험한 분쟁지역을 찾아다니며 다큐멘터리를 찍는 남자.

그는 세상의 숨겨진 진실들을 널리 알리기를 소망한다. 그의 다큐멘터리가 세상 사람들의 눈과 귀를 열어주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그가 사랑하는 교코는 귀가 들리지 않는다.

그들은 필담을 나누거나 교코가 입술을 읽어서 의사를 소통한다.

남자는 여자에게 자신의 기분을 시시때때로 전하지 못한다. 급격한 감정의 변화가 있더라도 글로 표현하면 걸러지는 바람에 건조하거나 예의바른 내용이 되고 만다. 글로 쓰다보면 맥빠지는 내용이 되는 경우가 많아서 지레 포기하는 경우도 있다.

사람과 사람이 가까워지는 데 목소리는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일까?

거치지 않는 소통, 자신의 뜻과 생각을 바로 전달할 수 있는 대상과 필담을 통해서 의사를 주고 받는 대상과 가까워지는데 혹은 의사를 전달하는 데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사랑한다.

소리를 내지 않아도 서로가 하는 말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 어떤 소음 속에서도 당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음이 사랑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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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판타지
김별아 지음 / 북스캔(대교북스캔)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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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소설가의 산문을 보는 일은 언제나 내겐 혼란스럽다.

이미 읽은 그 작가의 소설에서 나는 나름대로 그 작가에 대한 편견들을 구축해 놓고 어찌보면 멋대로 작가의 일상생활을 상상해 두곤 한다. 사실 소설이라는 게 아주 아무것도 없는 맨땅에서 만들어내는 것이라기 보다는 작가의 경험과 생활에서 나온다는 나 나름의 생각으로 소설 속의 어떤 일상들을 작가의 실제 생활과 혼동해서 그럴 것이다. 소설 속의 여러 번 이혼한 그 여자는 아마 작가의 삶의 모습일 것이고 소설 속에서 학교를 그만두고 방황하다가 자살을 기도하는 젊은 영혼은 작가의 젊은 시절의 고백에 다름 아니라는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다가 느닷없이 맨살 그대로의 그야말로 생생한 작가의 삶을 산문 속에서 만나면  '아하, 그건 소설이지.' 하는 반성을 하기도 한다. 그저 나름대로 상상하고 사랑하는 즐거움에 살고 싶어서 소설가의 산문은 주로 피하고 싶다. 그러나, 이 책 <가족 판타지>는 나에게 김별아라는 작가를 좀 더 가까이 느끼게 했다. 그녀 역시 이 시대 우리 세상을 살아가는 한 사람의 엄마로서 딸로서 죄충우돌 갈등과 방황을 겪고 스스로 성숙하는 과정을 보는 것은 마치 나의 삶을 다른 사람이 객관적으로 보는 듯해서 부끄럽기까지 했다.

 작가 자신은 어린 시절 부모에게 무조건 반항하는 까탈스런 딸이었단다. 작가와 비슷한 세대인 나 역시도 책 속에 묘사된 상황처럼 심하게는 아니었지만, 공연시리 엄마를 괴롭게 한 시간이 있었다. 지금 공연히 불퉁거리거나 입술을 내밀고 숟가락질을 하는 사춘기인 딸 아이를 보니 그 시절의 내가 생각나서 혼자 웃곤한다. "너도 괜히 짜증나니?"하는 말을 물어보고 싶기도 하다. 섣불리 묻지 못하는 것은 그 아이가 심각하게 나올까봐 겁이 나서이다. 아무리 이해를 하려해도 누구도 설명할 수 없는 그 사춘기의 공연한 불안을 다시 마주할 자신이 없어서이다. 내 아이도 30년쯤 후엔 나같은 생각을 할까? 오늘 엄마가 이런 생각을 했던 것을 알까? 우리 엄마도 30년쯤 전에 이런 생각을 한 것일까?

그러나, 이 책은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잊고 살았던 사람들을 생각하게 한다.

그들이 있음으로 해서 지금의 내가 있고, 그들과의 얽힌 애증이 오늘의 우리를 있게했음을 알면서도 어쩐지 쑥스러워서 마음을 드러내지 못했던 시간들이 오늘은 못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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