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뒤적뒤적 끼적끼적 : 김탁환의 독서열전 - 내 영혼을 뜨겁게 한 100권의 책에 관한 기록
김탁환 지음 / 민음사 / 2008년 12월
평점 :
품절
"문득 풍광 두 개가 겹친다. 하나는 1987년 봄, 허름한 지하 술집 앉은뱅이 탁자 앞에서 황석영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를 읽는 대학 신입생 김탁환의 놀란 눈동자이고, 또 하나는 1791년 겨울 광통교 골방에서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꺼내 펼치는 성균관 상재생 이옥의 떨리는 손가락이다.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위험한 순간이다."
본문 20쪽 '책 한 권의 기적' 중에서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 책깨나 읽었다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독서편력을 훔쳐보기를 좋아한다고 나는 믿는다. 나의 경험적 사실에 근거하면 말이다. 어린 시절부터 책을 좋아해 남의 집 책장까지도 나의 것으로 생각하던 나는 다른 사람들은 어떤 책을 읽었는지 항상 궁금했고 혹시나 내가 안 읽은 책을 읽었거나하면 그게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그런 책 중의 하나로 김현(저자 김탁환도 언급한 )의 <행복한 책 읽기>라는 책을 가지고 있다. 아끼고 아껴서 읽은 책이라서 꽁꽁 감춰두고 남에게 빌려주지도 않던 책이다. 최근에 읽은 책으로는 앤 패디먼의 <서재 결혼 시키기>가 있다. 공감하고 부러워하고 깔깔거리며 읽었던 책이다. 그런 책들을 읽으면서 느끼는 점은 나는 언제쯤 여기 언급된 책을 다 읽을까 하는 부러움과 이들처럼 나도 내가 읽은 책을 좀 정리해 두었으면 좋았을 것을 하는 후회다.
이제는 예전에 읽었던 책을 또 구입할 정도로 기억력도 믿을 수 없고,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마음의 움직임을 책장을 덮자마자 잊어버리기도 한다. 책을 읽자마자 그 감동의 여운이 사라지기 전에 좀 적어둘 것을 ...... 인생이란 것이 이리도 짧고 내일을 기약할 수 없다는 것을 젊었을 때는 몰랐다.
김탁환의 <뒤적뒤적 끼적끼적>은 그 후회와 부러움을 또 다시 불러 일으켰다.
위에 인용한 글에서의 김탁환처럼 나 역시 그 해 봄에 어두운 방에서 황석영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를 읽으면서 전율했던 기억을 갖고 있다. 그는 그 순간에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고 한다. 한 권의 책이 사람의 인생을 바꿀수도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그러나 같은 책을 같은 시간에 읽고서도 나와 그의 인생이 이리도 다른 것을 보면 그 뒤에 어떤 삶을 만들어가는가가 더 중요한 것 같다. 그것의 주체는 물론 사람이다.
아마도 살아온 시대가 같아서였겠지만, 총 10개의 장으로 나누어 소개된 100권의 책중에는 내가 이미 읽은 책들도 언급되었고, 제목만 들었거나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를 들은 책들도 많다. 목차를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책의 내용과 함께 그 책들과 보낸 나의 시간들이 떠올라서 마치 오래된 친구를 만난 듯 반갑고 또 기뻤다. 그 중에는 읽으려고 사 두고 아직도 책꽂이에 꽂아두기만 한 헨리 필딩의 <톰 존스>도 있다. 저 두꺼운 책을 올해가 가기전에 꼭 읽어야겠다. 많은 책들의 제목과 지은이를 메모하고 독서 계획을 모처럼 세울 수 있었다. 편독이 심한 나와는 달리 그의 독서는 광범위했다. 예술과 사회와 문학과 과학이 골고루 포진한 그의 독서 세계는 한없이 넓고 깊어보인다. 그의 책들이 그리도 흡인력이 있고 탄탄한 것은 아마 이 뛰어난 독서가 그 바탕일 것이다.
문득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를 한바퀴 둘러본다. 이미 바래서 누리끼리한 표지들도 있고 갓 나와서 반짝거리는 표지들도 보인다. 좁은 자리를 차지하고 서재의 한 귀퉁이에 놓여있으나 그 한권 한권이 하나의 인격이라고 생각한다. 오늘은 누구를 만나볼까? 읽지못한 채 쌓아둔 많은 책들에게 그 저자에게 그 주인공에게 문득 미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