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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으로 하는 작별
룽잉타이 지음, 도희진 옮김 / 사피엔스21 / 201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골목길 구석의 잡초가 천 년의 세월을 담은 풀포기가 아니라고,
황량한 들판의 야생화가 온 세상을 담은 꽃 한송이가 아니라고,
단언할 자 그 누구인가?
본문 184쪽
참으로 많은 작별이 있는 이 오월에 이 책을 만난 것은 어쩌면 우연은 아닐 것이다. 생각만 해도 아픈 이별에 눈물이 흐르는 이 날. 룽잉타이는 내게 우리의 삶이란 것이 늘 이별하는 것임을 알려준다. 우리는 어제와 이별하고 지금과 이별하고 또 내일과 이별할 것이다.
어린 시절 병원 침대에 실려서 수술실로 들어가던 엄마의 모습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아직 학교도 들어가기 전이던 때였으니 무엇인들 제대로 기억할까마는 그 무섭고 두렵던 마음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보다 더 어렸을 때는 엄마를 잃어버리고 길에서 울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그 길고 길던 골목길이 하얗게 빛나던 기억이라니......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억지로 떼어 놓아야 했던 단풍잎 같던 아이의 손과 뒹굴던 아이의 동그랗던 어깨가 아직도 가슴이 아리다. 내 손을 놓고 교실로 들어가던 그 작은 뒷모습이, 친구들이 가득 찬 버스에 웃으며 달려가던 그 뒷모습이 이제는 다시는 내게 돌아오지 않을 아름다운 기억들이다. 어린 시절 그리도 잘 안기던 큰 아이가 지금은 뽀뽀라도 할라치면 웃어버린다. 늘상 내 손을 잡고 걷던 작은 아이가 어느 날 갑자기 집 앞에서 내 손을 놓는다. 저 길 건너에 친구가 오고 있다. 이제 곧 엄마가 길에서 안아주면 부끄러워 하겠지?
"부모와 자식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점차 멀어져 가는 서로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며 이별하는 사이가 아닐까."(본문18쪽)라는 작가의 말과 같이 부모와 자식이라는 것은 그런 사이인가 보다. 내 차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우리 엄마는 서성거린다. 아이가 탄 스쿨버스가 우리 아파트를 돌아나갈 때까지 나는 내려다 본다.
저자의 조국이 처한 역사적 상황이 우리네 그것과 비슷한 점이 있어서인지 저자의 부모가 겪는 이산의 아픔과 두고 온 고향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의 표현은 남의 나라 이야기 같지 않았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다 비슷한 것이다. 생김새가 다르고 먹는 음식이 다를 지언정 느끼고 생각하고 원하고 원망하는 그것들은 다 부처님 손바닥 안이니 말이다. 에머슨이 지었다는 '붉은 진달래'와 왕양명의 가르침과 김춘수의 '꽃'이 만나는 지점이 바로 여기라는 이 놀라움이 바로 우리네 삶이 아닌가 싶다.
장미와 아름다움을 겨루는 자여
어떤 인연이기에,
네가 피고 지는 이 곳에,
내가 찾아와 이렇게 널 보고 있을까.
에머슨. 룽잉타이 역, 붉은 진달래
"당신이 이 꽃을 보지 않을 때, 꽃은 당신처럼 외로워 지지만,
당신이 이 꽃을 바라보는 순간 꽃의 빛깔이 선명해지니, 꽃은 당신의 마음 밖에 있지 않습니다. "
왕양명(王陽明, 중국 명나라 중기의 유학자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 꽃
삶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과 해박한 중국 고전에 대한 지식들이 작가의 아름다운 감수성과 함께 읽는 내내 나를 기쁘게 했다. 또한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과 적절한 인용은 좋은 글을 읽는 기쁨이 바로 이런 것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한다. 읽는 도중 " 그렇지." 하는 마음으로 밑줄을 치고 옮겨 적는다.
"처음엔 이상주의자를 믿지만, 나중에는 이상주의자도 권력의 유혹에 종종 굴복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일단 권력을 쥐게 되면, 스스로가 본래 목숨 걸고 반대하던 '악(惡)'이 되어 버리거나 현실의 매서운 주먹에 엉망진창으로 두들겨 맞고 링 밖으로 쫓겨 나게 된다. 이렇게 되면 그의 이상을 실현할 기회란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이상주의자는 품위를 가질 때 권력에 의해 타락하지 않고, 능력을 가질 때 이상을 실천에 옮길 힘이 생긴다. 그러나 품위와 능력을 겸비한 이상주의자란 극히 드물다. "
본문 4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