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즉흥적으로 떠올린) 이 글의 제목은 ‘글 쓸 거리만 많고 본격적으로 쓴 글은 없어 우리 동네 도서관에 대해서라도 쓰자는 마음을 먹고 쓴 글’이었다. 사람들은 첫 문장을 읽고 생각할 것이다. ‘개그 센스가 되게 특이하네’. 또는 ‘되도 않는 개그 치네’. 내가 대학 다니면서 제일 많이 들었던 말의 변주다. ‘ㅇㅇ야(ㅇㅇ선배). 너는 안 웃겨(요).’
여튼, 처음에 떠올린 제목은 나의 심경을 잘 반영한다. 책과 글에 할애할 시간은 적은데 뭐라도 읽고 쓰고 싶고, 그 와중에 무엇을 쓰게 된다면 잘 쓰고 싶고. (날로 먹겠다는 심보 아니냐?) 아니, 책 한 권을 읽고 어떤 식으로든 쓰지 않으면 어떤 식으로든 그 책에 대한 인상이며 내용이며 다 잊는다는 그간의 경험칙상, 뭐라도 써야 할 텐데, 이런 생각이 들자 나중에는 글쓰기가 숙제처럼도 여겨졌다. 숙제, 숙제라. 매 시간마다 제출해야 하는 숙제를 거의 안 해서 F 받고 결과적으로 졸업이 한 학기 늦어지도록 만들었던 졸업필수강의가 생각난다.
그렇다. 숙제는 안 해 가면 페널티를 받지만 자발적인 글쓰기는 무기한 연기할 수 있다. 무기한 연기의 끝은 대부분, 경험칙상, ‘아무 것도 하지 않음’이다. 아무리 내가 아마추어지만, 이대로 백년 천년 아무 것도 안 쓸 수는 없다. 글쓰기의 감각은 계속 갈고 닦지 않으면 퇴화되니까. (어떤 강의의 숙제든 성실히 해 가고, 글쓰기 숙제면 심지어 즐겨서 했던 1n년 전의 글이 때때로 지금의 그것보다 더 나아 보인다.)
최근에 읽은 책, 혹은 읽으려고 빌린 책을 일별해 보았다. 마음 속 판단: ‘주제적인 측면에서 유사성 없음. 큰 주제로 글쓰기는 못 함’. 그렇다면 이 책들을 가지고 무슨 글을 쓸 수 있을까? 오래 생각해 보았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 발상의 전환. 내용이 아닌 형식을 보자. 이 책들은 다 어디서 왔나? 내가 아껴 마지않는 우리 동네 도서관에서. 도서관 이야기도 언젠가는 쓸 것이었으니, 오늘은 간략하게라도 적자.
우리 동네 도서관을 내적으로 아끼는 가장 큰 이유는, ‘면학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지 않아서이다. 무슨 소리일까? 열람실 어디를 보아도, 취업이나 자기계발을 목적으로 ‘시험 공부’를 하고 있는 사람을 찾을 수 없다. 도서관에서 아예 금지를 해 놓았기 때문이다. 우리 동네 도서관 열람실에서는 수험서를 볼 수 없다.
더 많은 주민, 특히 조용히 공부할 환경이 필요한 이들에게 개방되어야 할 ‘공공기관’으로서의 책무를 무시하는 것은 아닌지, 얼마 전까지 ‘취준생’이었던 입장에서는 그런 생각이 든다. 한편, 한 사람의 독서인의 입장에서는 ‘독서 환경을 조성하고 독서 문화를 보급하는’ 도서관 본연의 모습을 갖춘 곳이 의외로 드물지 않나, 그런 측면에서는 오히려 반길 만한 곳이라는 생각도 든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취준생이었을 때에도 오롯이 독서를 위한 도서관이 있어 반가웠다는 생각을 했다. 집에서 취업 준비를 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던 생각이다.
이 도서관에서 나는 비로소 ‘사회에서 탈락한 잉여존재’가 아닌, 한 명의 오롯한 ‘독서인’이 되는 것 같다. 불완전하고 흠 많지만 나름의 세계를 가지고 있는, 책 읽는 사람.
우리 동네 도서관은 반납일까지 책을 반납하지 못하면 두 가지의 후속조치를 선택할 수 있다. 그냥 연체한 일수만큼 책 못 빌리기. 또는 연체한 일수*책 권수*하루당 연체료를 계산해서 연체료를 내고 책 빌리기. 나는 후자를 주로 선택한다. 책 욕심이 없어지는 시기에는 전자를 선택하기도 한다. 이 글을 쓰는 오늘(9/28)은 반납일을 하루 넘긴 시점이다. 하루 연체료*3부터 시작되겠다.
3주 전에 빌린 책은 총 세 권이다. 『헌법 쉽게 읽기』, 『소년의 레시피』, 그리고 제목을 밝힐 수 없는 한 권. 제목을 못 밝힌 이유는 뒤에서 적을 것이다.
『헌법 쉽게 읽기』는 원래 대출 계획이 없던 책이었다. 그냥, 한때 공시생이었던 나의 눈에 띄어 빌리게 되었다.
다른 시험의 법 과목도 그럴 것이라고 예상되지만, 공무원시험에서의 법 과목은 처음부터 끝까지 ‘암기’가 성패를 좌우한다. 조문도, 판례도, 그 배경을 알면(‘이해하면’) 좋겠지만 그 ‘이해’도 나중은 다 ‘암기’를 위한 것이고, 그렇게 암기된 것은 시험에서 정오를 빠르게 판별하는 데 도움이 된다. 다르게 말하면, 조문이나 판례를 둘러싼 역사적, 사회적 맥락은 소거하는 편이 수험 공부에 도움이 된다. 사실은 다들 그렇게 하고 있다. 통합진보당 해산 판결은 그에 대한 비판만 책 한 권이고(『통합진보당 해산 결정, 무엇이 문제인가?』, 김선수 대표 집필, 도서출판 말, 2015), 지금은 ‘사법농단’의 대표적 사례로 거론되고 있지만, 공시생에게는 그저 ‘위헌정당해산심판청구의 유일한 판례’로 기억될 뿐이다. 개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 극복의 가능성이 있지만, 선발 시험이 공직자 또는 공직후보자를 맥락맹으로 만드는 데 기여하는 구조로 작용하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을 가질 만하다.
한편으로는 공시를 준비하면서 법에 대한 개인적인 관심도가 높아졌다. 법은 쓰는 말 자체가 어렵다. 그렇다 보니 정보의 불균형이 극심하게 일어나는 분야이기도 하다. 소수의 ‘법 기술자’들이 보편적인 법 감정을 무시하고, 그것을 ‘니네가 법을 잘 몰라서 그래’라고 합리화하는 풍경을, 그간 많이 봐 오지 않았나. 아는 게 곧바로 힘이 되지는 않지만, 힘의 가능성은 품게 할 수 있다. 공시생이 아닌 지금의 처지에서도 그렇게 생각한다.
『헌법 쉽게 읽기』는 제목에서도 쉬이 짐작할 수 있듯, 대한민국 최고의 법이지만 이것이 우리 실생활과 어떤 식으로 연관을 맺는지 가늠하기 어려운 대다수의 보통 사람들을 위해 쓰여진 헌법 교양서다. 대한민국 헌법 제1장과 제2장의 조문 중 일부를 그 조문이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사례와 함께 설명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완독한 지 3주 가까운 시간이 흘러, 책을 읽었던 당시의 감정을 정밀하게 복각하는 것은 어렵다. 아래는 그 희미한 기억 속에서도 방점을 찍었던 사례 두 개.
로스쿨 입학을 준비하던 엄 모 씨는 각 학교의 입학 전형을 살피던 중 이화여자대학교의 입학 전형을 보고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남성인 그는 이화여자대학교 로스쿨에 지원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화여자대학교 로스쿨의 정원은 100명인데, 매년 100명의 여성만 이화여자대학교 로스쿨에 입학할 수 있고 그만큼 남성의 자리가 줄어든다는 생각에 견딜 수가 없었다. 엄 모 씨는 이화여자대학교 로스쿨 입학 전형이 남성의 평등권을 침해했다며 헌법 소원을 제기했다.
헌법재판소는 엄 모 씨의 청구를 기각했다. 평등권의 침해 요소는 있지만 전체 로스쿨 정원 2,000명에 비해 이화여자대학교 로스쿨의 정원은 100명으로 비율이 매우 낮고, 엄 모 씨는 이화여자대학교 외에도 나머지 1,900명의 정원에 지원할 수 있기 때문에 기본권 침해 정도가 매우 미미하다고 판단했다(헌재 2013.5.30. 2009헌마514). 평등권을 침해받기는 했지만 참을 만한 수준이라는 것이다.
헌법이 규정하는 평등은 절대적 평등이 아닌 상대적 평등이다. 모든 차별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합리적 근거가 있는 차별은 가능하다. (...) 차별을 정당화하는 또 다른 합리적 근거는 ‘적극적 우대 조치Affirmative action’다. 불평등한 상황을 바로잡기 위한 일시적 불평등 조치는 불평등이 아니라는 것이다.
(...) 매년 남성에 못지않은 비율로 여성 법조인이 배출되고 있지만 2017년 9월 현재 대법관 13명 중 여성은 3명, 헌법 재판관(현재 1명 공석) 8명 중 여성은 1명에 그친다. 고위 법관과 검사 사정도 비슷하다. 이처럼 여성의 지위가 현저히 낮은 법조계에서 25개 로스쿨 중 1곳, 2,000명의 로스쿨 학생 중 100명을 여성에게 부여한 것을 남성에 대한 역차별이라 주장하기는 어렵다.
(p.82~85, 「여성만 들어갈 수 있는 로스쿨은 차별일까?」 중)
‘역차별’ 운운하는 ‘일부’ 남성들의 특징 중 하나는, 자신들의 사회적, 경제적 지위가 보장될 것 같은 직업에 종사하는 여성의 수가 많아지면 거기에만 ‘역차별’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교사, 공무원, 법조인, 등등. 노동 환경이 상대적으로 열악한 직군에 여성 종사자 수가 많다고 거기에 남성도 더 뽑아달라고 이야기하는 경우를 자주 보는가? 그 ‘일부’들이 자주 간과하는 것 중 하나가 ‘빈곤의 여성화’이다. 참고로 빈곤의 여성화는 1970년대부터 제기된 개념이다.
다소 거북스러운 표현이지만 “군대에서 죽으면 개죽음”이라는 말이 있다. (...) 군대에서 죽었을 때 적정한 보상을 받을 수 없는 것은 헌법 규정 때문이다. 헌법 제29조 제2항은 군인 등이 전투나 훈련 중 사망해도 국가를 상대로 배상을 청구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는 매우 특이한 조항이다. 같은 조 제1항이 국가에 대한 배상청구권을 인정하고 있는데, 바로 다음 항에서 군인은 배제하기 때문이다. (...)
유독 군인만 국가배상청구권에서 배제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헌법이 형식에 어긋나면서까지 군인의 국가배상을 직접 제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의문은 헌법 제29조 제2항의 연혁을 살펴보면 쉽게 풀린다. 헌법 제29조 제2항은 1972년, 제8호 헌법에 처음 도입되었다. 제8호 헌법은 소위 유신헌법이라 불린다. (...) 1972년이라는 시대적 배경도 중요하다. 당시는 1965년부터 시작된 한국군의 베트남전쟁 참전 막바지였다. 이듬해인 1973년 한국군은 베트남에서 철수했다.
한국은 베트남전쟁 파병으로 미국의 상당한 경제원조를 받는 등 경제 특수를 톡톡히 누리고 있었다(한국의 베트남 파병의 결정적 계기가 된 브라운 각서의 주요 내용은 미국의 경제원조였다). 그런데 예상하지 못한 일이 발생했다. 베트남전쟁 상이군인이나 전사자의 유가족이 국가를 상대로 배상을 청구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한국은 베트남에 32만 명에 달하는 군인을 파병했다. 이 중 5,000여 명이 전사했고 1만여 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들이 모두 국가배상을 청구한다면 적지 않은 금액을 지출해야 했을 것이다.
박정희 정권은 한국이 베트남전쟁에 본격적으로 참전한 직후인 1967년, 국가배상법을 개정해 군인 등의 국가배상을 제한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해당 조항이 헌법에 위배된다고 판단했다(대법원 1971. 6. 22. 선고 70다1010 전원합의체 판결). 헌법재판소가 1988년 개소開所했기 때문에 당시에는 대법원이 위헌 법률 심판을 맡고 있었다. 대법원의 결정까지 무시할 수 없었던 박정희 정권은 고민에 빠졌지만 곧 묘수를 찾아냈다. 법률이 헌법에 위반된다면 법률 자체를 헌법에 넣어버리면 되는 것이었다. 헌법이 헌법을 심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헌법 제29조 제2항(당시는 제26조 제2항)은 1972년, 유신헌법과 함께 헌법에 들어오게 되었다.
(p.240~244, 「군대에서 죽으면 개죽음인 이유」 중)
물론 군인의 부상이나 사망 시 보상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관계 법률이 따로 있다. 하지만 그 법률을 통해 보상을 받으면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청구는 불가능하다는 것. 이유는 위에서 인용한 대로, 유신 그 분 덕분.
왜 나는 이 부분에 방점을 찍었을까. 오늘은 일단 개인과 구조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앞으로도 계속 이야기할 계획이 있다는 것만 밝혀둔다.
『소년의 레시피』는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처음 보고, 한 번 읽어봐도 괜찮겠다 싶어서, 바로 그 자리에서 사지는 않고, 나중에 도서관에서 빌렸다. 다행히 도서관에 소장본이 있었다.
지은이는 남편, 그리고 아들 둘과 함께 살고 있다. 지은이는 요리를 못 한다. ‘안’은 의지 부정이고 ‘못’은 능력 부정이라고 학교 국어 시간에 배운다. 처음에 ‘안’이었다가 나중에 ‘못’이 된 것도 아니고 그냥 처음부터 ‘못’이었고 쭉 ‘못’이다. 집안의 식사는 처음에 줄곧 남편이 담당해 왔고, 이제는 첫째 아들 ‘제규’가 지은이 집안의 저녁 식사를 책임진다.
‘제규’가 저녁 식사를 하게 된 이유는 간단하다. 첫째, 무의미한 ‘야자’를 하기가 싫었다. 둘째, 자신이 저녁 식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 단순하지만 분명한 이유를 가지고 ‘제규’는 고등학교 입학 세 달만에 야자를 그만두고 집안의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일을 하게 된다.
여기까지 읽는데 뭔가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야자를 빠지겠다는데 그 단순한 이유를 듣고 선뜻 허락한 담임선생님도 그렇고, ‘제규’가 무슨 일을 하겠다고 하든 마음속으로부터 인정하고 공부를 닦달하지 않는 지은이와 지은이 남편도 그렇고. 내가 너무 갇힌 세계에서 모범생처럼 살다 보니 이러한 삶을 사는 이들에 대한 상상력도 없어졌나 싶어 마음이 복잡해졌다. 아이를 키우다 보니 끊임없이 다른 사람, 특히 내 아이와 비슷한 시기를 지나고 있는 다른 아이와 특질이나 성격을 비교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기도 해서 ‘나는 이것밖에 안 되는 걸까, 나는 왜 내 고유한 육아 철학이 없을까’ 하고 이 책을 읽는 동안 이 가정을 내내 부러워하고, 내 스스로를 자책하기도 하고 그랬다.
문장은 짧고 평이하면서 나름의 탄력이 있다. (누구의 글처럼) 늘어지지 않는다. 그 짧은 문장들 사이로 지은이의 유머 감각이 내비친다. 정도가 일관된 나머지 ‘일상이 너무 휙휙 지나간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지만, 뭐 내 일상도 나한테나 의미 있지 구구절절 쓴다고 남이 의미 있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다만 레시피 부분은 근본적인 문제가 있는데, ‘제규’의 오리지널 레시피 노트가 이런 식인지, 아니면 ‘요알못’인 지은이가 ‘제규’를 인터뷰하고 정리하는 과정에서 축약이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재료의 ‘분량’이 없다. 이건 꽤 치명적이다. 이러면 레시피로써의 기능을 못한다.
여하튼 ‘제규’는 꽤 멋진 사람이다. 친구들과 다 놀러 다니면서도, 자신의 요리에는 집중할 줄 아는 그 모습도 그렇고, 요리에서 ‘자기만족’과 ‘다른 사람을 위하는 마음’을 모두 발견한 것도 그렇고. 나는 그맘때쯤 야자는 야자대로 하면서 집이 학교에서 가깝다는 이유로 학교 식당에서 석식 안 먹고 굳이 집까지 와서 라면 끓여먹고 그랬었는데. 철딱서니가 없었다.
각설하고, 글 전반에 흐르는 풍요롭고 밝은 기운이 플러스(+)가 되었다가, 레시피의 ‘비실용성’ 때문에 마이너스(-)가 되어서, 이 책을 최종적으로 구입할지 안 할지는 ‘잠정 보류’ 상태다.
요리 얘기가 나왔으니 내 개인적인 이야기로 사족. 어제(9/27)는 요새 체력적으로 힘들어하는 배우자와, 요새 부쩍 고집이 세진 아이가 같이 먹을 수 있도록 점심으로 나주곰탕을 했다. 고기와 향신 채소를 물에 넣고 한 시간 20분을 끓이면 된다, 는 부분만 기억한지라 정오가 다 되어서야 장을 봐 왔는데, 문제가 있었다. 핏물 빼는 시간이 1~2시간이라는 부분을 내 뇌가 선택적으로 기억 탈락시킨 것이다. 다행히 아주 늦지는 않게 곰탕을 끓여 세 식구가 사이좋게 먹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나주곰탕의 꽃말은 ‘오래 끓인 고깃국’이다. 배우자는 ‘고기가 부드러워서 좋다’고 이야기했다. 고기야 뭐... 어떻게 먹어도 맛있을 테니까(배우자와 나 모두 결혼 전엔 고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결혼 후에는 둘 다 이상하다 싶게 고기를 자주 찾는다. 덕분에 아이도 고기 채소 가릴 것 없이 다 잘 먹던 시기를 지나 채소는 뱉고 고기만 찾아 먹는 아이로 크고 있다).
제목을 밝힐 수 없는 책은 SNS에서 언급이 된 것을 보고 도서관에서 빌렸다. SNS에서 비혼모 당사자 이야기가 화제였던 때였다. 이 책은 그 흐름에서 언급되었다. 비혼모 당사자 이야기를 다룬 참고사례라고.
결론을 먼저 이야기하자면 이 책은 읽지 않았다. 조금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서문을 쓱 들추어보고는, 읽기를 포기했다.
이 어린 친구들이 제대로 못하는 것이 있으니, 바로 줄긋기입니다. ‘키스, 성관계, 동거’와 같은 항목은 ‘짜릿함, 행복’ 같은 내용하고만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임신, 출산, 불행’ 같은 내용과도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지 않습니다. 더욱이 ‘에이, 그런 일이 설마 나한테 있을라구’ 하고 근거 없는 낙관론을 펴기도 합니다.
이 책에서 만나게 되는 많은 소녀들은 그런 실수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좋아하는 사람과 솔직한 성관계를 가졌다는 실수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 사소한 행동 하나가 몰고 올 수 있는 폭풍 같은 결과들에 대해 무심했던 것이 실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그들에게 가르쳐 주지 않았던 냉혹한 현실들에 대해 증언하고 있습니다. (...)
우리의 미래인 청소년들이 자신의 행동과 결과에 책임질 줄 알고, 인간 경시 풍조에 물들지 않고 서로를 존중하며 살아나가는 행복한 사회의 주역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엮은이-
(p. 4~7, 「책머리에」 중)
SNS에서 본 비혼모 당사자의 이야기 중에서 인상적인 지점이 하나 있었다. 비혼모 공동체와 페미니즘은 사실 친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페미니즘에 적대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고. 책임이 일방에 과도하게 지워지고, 그 책임을 어떤 식으로 수행해 가든 지속적으로 지탄과 조롱, 몰이해의 대상이 된다면, 그럴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을 한다. 개인의 삶을 지탱하는 것조차 버거운 개인은 어떤 지점에서는 사회적 맥락에 어두워질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 개인을 돕고 그 개인과 연대하는 사람들이 맥락맹인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내가 책을 읽지 않은 이유다.
이 책의 초판은 15년 전에 나왔고, 개정판이 나온 지도 10여 년이다. 비성년 임신 문제에서 ‘남자 책임’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던 시절이다. 지금은 그때보다야 나아졌겠지만, 어떤 측면에서는 오히려 후퇴한 것도 같고, 아직도 갈 길은 멀다.
서울지방조달청 옆에 있는, 여성가족부 산하 양육비이행관리원이 문득 떠오른다. 그 기관의 일은, 잘 진행이 될까. 책임을 지지 않고 오히려 큰소리치는 전(前) 양육자들을 지긋지긋하게 보다 지친 실무자들이, 어느 순간에 맥락맹을 자처하지는 않을까. 그런 생각도 든다.
새벽에 두 시간이 넘도록 글을 쓰다 잠을 잤다. 글이 너무 길어져서. 오후에 글을 다시 쓰니 글이 더 길어진다. 이러다 글을 매듭지을 수는 있을까? 오늘이 지나면, 연체료가 두 배가 된다. 예약도서가 어제 도착했다는데, 빨리 책을 반납하자. 연체료를 낸 다음, 도착한 책을 빌리자. 새 독서를 시작하고, 적당한 시간을 둔 뒤 또 새로운 글을 쓰자.
그나저나 이렇게 긴 글을, 누가 금요일 저녁에 읽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