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립 중등학교 교사 임용 후보자 선정 경쟁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 소위 ‘임용고시생’에게 새해는 전혀 반갑지 않았다. 필기 전형인 1차 시험의 합격자 발표가 새해 연초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정을 조금 당겨줘도 될 텐데, 그 얄궂은 일정은 변할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못 붙은 사람이 패배자니 일정 정도의 문제는 사소하다는 건가. (임용시험 ‘바닥’을 떠난 지금 찾아보니 1차 합격 발표 일정을 연말로 당긴 모양이다. 수험생들에게는 다행일 따름이다.) 새해 벽두부터 오지랖 넓은 누군가로부터 ‘안녕? 너는 패배자란다. 올 한해도 한번 잘 해 보렴!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식의 인사를 듣는 기분이었으니, 자연스레 새해를 의식하지 않는 삶을 살게 되었다. 새해고 자시고 뭐가 된 다음에 시간을 구분하는 삶을 살든지 하자, 이런 마음가짐으로.
그런데 막상 회사에 들어오고 나서도 새해를 왜 굳이 구분하는가 하는 생각은 사라지지 않는다. 물론 회사 특성상 시간을 구분하는 일 자체가 매우 중요하므로, 일을 1인분만큼 하기 위해서는 시간의 구획에 익숙해져야 한다. 마치 예전부터 쭉 그렇게 생각했던 것처럼. 그리고 나는 적어도 지금으로서는 일을 일부러 못 해야겠다는 마음이 없으니, 하루, 일주일, 한 달, 일 년의 단위를 소중히 여기는 것처럼 굴 것이다. 회사에서는.
그러나 한 편으로는 ‘중간에 하루 쉬고 또 일 나가는데 새해라니, 너무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드는 것이다. 회사 다닌 지 1년이 채 안 되었는데, 나는 벌써 소진이 된 것인가.
한 해를 마감하는 시점이 다가오고 나서야 마감을 주제로 글을 쓴다. 솔직한 이유를 들자면, 내가 이런 글(=블로그에 올리는 글) 쓰기에 우선순위를 두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사내 글쓰기 공모전에 낼 글은 적어도 ‘당선이 되면 최하 얼마이니 이건 마감을 무조건 지켜야 돼!’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니, 비록 끝은 벼락치기의 형식을 띠었지만 어쨌든 마감을 지켜 응모를 할 수 있었다. (뜻하지 않게 좋은 결과를 거두긴 했으나, 글 잘 쓰는 사람이 천변 자갈 수보다도 많은 인터넷 세상에서 나는 그저 평균보다 조금 더 나은 수준일 뿐이라고, 글을 등록하기 위해 알라딘 서재에 들어오며 마음을 다잡는다.) 그러나 이 글을, 일과 가정의 균형을 다시 조정하면서까지 굳이 써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사회 초년생으로서 ‘워라밸’을 조정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읽고 쓸 시간과 체력은 늘 ‘엥꼬’ 상태였고, 읽은 것이 적어지니 자연스레 할 말과 쓸 글이 줄었다. 남에게 쉽게 드러내지 못할 생각만 늘었는데 그것을 굳이 글로 적어야겠다고 한다면 블로그가 아니어도 괜찮을 것이다. 마감의 중요성과 꾸준한 글쓰기의 필요는 곽재식 작가가 그의 글쓰기 책에서 훌륭히 강조한 바 있다. 이 책을 다 읽자마자 그의 다른 책을 얼른 찾아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겨날 정도로 훌륭했다.
아직까지 돈을 받고 글을 써서 넘기는 원고 청탁이나 계약을 하지 못한 사람에게조차도 역시 마감은 중요하다. 그런 경우에도 언제까지 무슨 글을 쓴다거나 하루에 얼마만큼씩 글을 쓴다는 마감을 스스로 정해놓고 지키기 위해 노력하기를 추천한다. (중략) 취미로 재미 삼아 틈틈이 일상이나 경험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면 어떤 주기로 최소한 어느 분량의 글을 쓰겠다는 원칙을 세우고 그것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중략)
마감을 어기는 것은 비극이다. 그렇게 마감까지 어기고 쓴 글이 과연 『안나 카레니나』나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인가?
-「마감에 강한 작가 되기」 中, 중략 및 강조는 인용자
‘마감 하루 전에 확 몰아서 쓰면 원고지 80장 충분히 다 쓰지, 뭐. 매일 원고지 15장 분량씩 써야 하지만 오늘은 피곤하니까 글 쓰지 말고 놀자. 대신에 미뤄놨다가 주말에 마음잡고 확 다 쓰면 되지. 전에는 하루에 150장 쓴 적도 있으니까.’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지옥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그리고 지옥에 마감은 없다.
-「글 쓰는 데도 분위기가 중요하다」 中, 강조는 인용자
사실은 자발적으로 마감 기한을 설정한 글이 하나 있었다. 한 출판사에서 ‘내가 시를 읽는 이유’에 대한 독자 투고 글을 올 연말까지 공모했는데, 결국 올해를 이틀 조금 넘게 남겨 둔 지금까지 쓰지 못했다. 사실 글을 썼더라도 그 글은 기만으로 가득 찼을 것이다. 몇 년 전에 비해 시를 현저하게 덜 읽는, 그리하여 거의 안 읽는 수준에 있는 지금의 내가 ‘왜 시를 읽는지’에 대한 글을 써서 대외적으로 ‘시 사랑꾼’의 인식을 얻는다니, 이것이야말로 ‘기만’이자 ‘모순’이다. 몇 년 전, 그러니까 대책 없는 문청 시절의 나였다면 누구보다도 ‘내가 시를 읽는 이유’에 대해 잘 쓸 수 있었을 텐데. 역시 인생은 타이밍이다.
글을 못 쓴 데에는 여러 이유를 댈 수 있지만, 이전에 시를 쓰던 경험을 생각해보건대 그런 식의 이유는 대면 댈수록 구차해진다. 그러므로 새해에는 차라리 두세 문장짜리 일기라도 매일, 안 되도 주기적으로 써 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며 ‘새해 목표’의 하나로 설정을 한다. ‘1번: 꾸준히 글쓰기’
(곽재식의 책에서도 블로그나 SNS 글쓰기를 꾸준히 쓴다는 측면에서 실험하기 좋은 글쓰기로 소개한다. 자세한 것은 「책 말고도 쓸 것은 많다」 편을 참조하시길.)
글쓰기가 꾸준히 안 되었던 이유의 하나는 체력 문제도 있었다. 체력이 안 되니 배우자에게도 아이에게도 너그럽지 못했던 나날이 많았고, 회사에서는 조금의 일 가지고도 힘들고, 이런 상태에서 글쓰기는 그저 언감생심일 뿐이었다. 그래서 조금이나마 지속가능한 운동의 형태는 뭐가 있을지 생각하며 또 하나의 새해 목표를 세운다. ‘2번: 운동’
새해와 작년의 구분 없이 살던 것과 별개로, ‘어차피 실현 안 될 계획 왜 세우나’ 식의 냉소를 쭉 마음 한편에 간직해 왔던 고로 여태껏 새해 목표 없이 잘 살아 왔다. 아이 태어나기 전에 금연한 것 빼고는 그랬는데, 이렇게 나로 하여금 새해 목표를 ‘자발적으로’ 세우게끔 하다니, 회사의 힘이란…….
그렇게 평소에 나와는 거리가 멀었던 ‘새해 목표’를 하나둘씩 헤아려 보던 중에, 정희진 선생님의 칼럼을 ‘시의적절하게’ 보게 되었다. (칼럼 링크)
글 전체가 핵심이지만 그 중에서도 핵심적으로 찌르고 들어온 부분.
“새해 모든 이의 소망이 다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연말 즈음 또 하나의 재앙 담론이다. 건강, 돈, 취직, 국회의원 당선… 사람들의 소망은 비슷하다. 점입가경, 소망을 대의로 포장하는 사람도 있다. 세상이 지옥인 이유는 모든 이들이, 자기 소망을 동시 달성하려고 경쟁하기 때문이다. 최소한, 의미 없는 대립이 계속된다. 바로 올해처럼.
10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랬고, 정희진 선생님의 글을 읽다 보면 ‘산통 깨는’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그 ‘박살’은 ‘시의적절’하다. 그 깨진 틈으로부터 새로운 사유가 피어오른다. 지금의 구태를 내려놓은, 지금과는 다른 사회를 바란다면, 우리에게는 익숙한 사유의 ‘부수고 깨고’가 가장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적이고 세속적으로 충족 가능한 희망을 대신할 수 있는, 내일모레부터 시작될 내년에 가지고 있을 나의 ‘소망(또는 욕망)’을 이야기하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나는 그저 가족과 회사, 사회에서 조금 더 나은 사람으로서 역할을 맡기 바랄 뿐이다. 사람과 사회에 대한 너그러움의 선이 내가 지향하는 최소한의 가치를 무너뜨리지 않도록, 기계적 중립이 아닌 역동적 균형을 이루기 위해 분주하고 싶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한 줌의 위로나 휴식이 없어 지나치게 빨리 소진된 탓으로 타인에게 필요 이상으로 예민해지지는 않았으면 한다. (따뜻한 카페에서 이 글을 쓰느라 이런 생각이 갑자기 든 것일 수도 있다.)
책은 올해 19권 읽었다. ‘취준’할 때보다는 많이 읽었으나, ‘백수’ 시절보다는 적다. 그러나 많고 적음이 중요하지는 않다. 기록이 중요하다. 나날이 조금씩 써 보고, 그 중에 공개해도 되겠다 싶은 글은 블로그에 올리는 쪽으로 가닥을 잡을까 한다. 내년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