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에서 개신교라는 지극히 합리적인 종교가 기복 신앙과 철저하게 결합해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한국 주류 부르주아의 내면세계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가 비합리적이라는 건, 삼성의 재벌총수가 '관상'을 보고 직원을 뽑았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에서 확인할 수가 있다.

 

당대비평의 편집위원이기도 했던 김진호 목사는 이런 지점을 파고 들어서 한국 사회의 비합리성을 기독교의 부실성에 찾고 있는데,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 주장이다. 타워팰리스에 사는 이들이 구룡마을에 있는 맹인 지압사에게 건강을 의탁하기 위해 외제 승용차로 장사진을 치며 줄을 서서 기다리는 장관을 한국 이외에 다른 어느 '근대국가'에서 찾을 수 있겠는가.   - 이택광 <강용석과 장희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무신론자인 내가 왜 신학에 관심을 갖는가. 이유는 철학이나 역사처럼 신학도 인문학의 한 범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문학을 좋아하고, 철학서를 읽듯이 단지 지적 관심사 가운데 하나인거다. 신학서를 가까이한 때문인지, 간혹 교회에 다니는 친척들, 이웃들은 나를 예배당으로 끌어들이려고 안간힘을 쓴다. 무신론을 자처하는 터에 겨우 신학서 몇 권 읽는다고 교회에 나갈수 있을까? 

무신론자인 내가 볼때, 칼 바르트의 하나님론(신론), 그리고 예수론(기독론), 교회론은  서구형이상학이 그렇듯 완벽한 픽션이다. 단지 오랜세월 공을 들인 정교한 허구적 체계, 지적체계의 산물이라는 것. 신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설사 칼 바르트가 제 아무리 방대한 조직신학 체계를 세웠더라도,  문학적 상상력과는 유형이 다른 허구적 언설체계의 하나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내가 조직신학, 즉 어떤 종교라는 이름아래 체계화된 논리들, 특히 칼 바르트의 <교회 교의학> 등에 관심을 갖는건, 한 지식인의 진지하고 정교한 종교적 상상력의 세계를 엿보고싶고, 그 상상력의 결과가 어떤 글로 나타나는가 궁금하기 때문이다. 일종의 지적 즐거움을 맛보고 싶어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역사를 공부하면서 나는 순결하게 고유한 종교의 영역이 있다고 믿지 않게 됐다. 기독교만 하더라도, 교회의 역사는 곧 정치화한 종교, 종교화한 정치의 역사였다.”

“한국 개신교의 역사는 가장 종교적으로 보이는 현상도 정치·사회적 차원을 가지며, 종교적 신념과 이데올로기적 신념은 놀라우리만치 친밀도가 높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 류대영 <한국 기독교와 근현대사>에서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378675.html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어떤 불신자 프롤레타리아가 "예수는 좋은 사람 중 하나였다"고 말한다면 이게 무슨 의미일까? 그것은 예수를 불신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이 프롤레타리아는 예수가 하나님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좋은 사람 예수라는 말은 적어도 자유 세계의 한 시민이 예수는 하나님이라고 할 경우 보다 더 많은 의미를 나타낸다. 하나님이란 이런 시민에게는 교회에 속한 어떤 것일 따름이다. 그러나 예수는 공장에서는 사회주의자로 현존할 수 있고, 정치현장에서는 이상주의자로, 프롤레타리아적 현존에서는 좋은 사람으로 현존할 수 있다. 그 대열에서 그는 원수인 자본주의자와 싸운다.    -  디트리히 본 회퍼(신학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종교는 그 성격상, 아울러 그 말의 어원이나 그 체제의 역사상, 워낙 자유가 없는 곳이다. 그곳은 자유의 반납으로 인해 가능해지는 특이한 종류의 쥬이상스를 체계의 맹점으로 지니는 곳이기 때문이다. '종교의 자유'라는 헌법상의 권리는 사실상 종교와 종교 사이의 자유, 요컨대, 종교가 없는 빈 곳 속에서의 자유를 말하는 것으로 여기는 게 낫다.  

 

강군이 싸우는 문제는 미션계 대학들에서도 똑같이 재론되고 있다. 심지어 일부 교수들조차 그 강압에서 자유롭지 못한 실정이다. 물론 한국의 종교사회와 그 엘리트 관료들은 이 10대의 소년이 성취한 정신적 자유와 결기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않을 것이다. 2005년, 종교의 자유를 '내가 내 종교를 믿을 자유'로 해석하는 짓을 넘어설 때도 되었다. 우선적으로 그것은 '내 이웃들이 내 종교를 믿지 않을 자유'를 말하는 것이다.   -  김영민(철학자)

*******
한국 사회를 살아가자면 온갖 유형무형의 폭력을 감수해야 한다. 가령, 강압적인 종교 권유도 그중 하나인데, 가까이는 가족, 친척, 이웃들로부터, 거리에서 만난 낯선 사람들까지 시도때도 없이 교회에 나가라고 성화다. 올해 일흔 나이인 고모님은 만났다하면 오만상 찌뿌리며 일갈한다.

 

 "얼른 교회 나가야지, 집안을 구원해야 할 장남이 이게 무슨 짓이냐. 죽으면 지옥 갈텐데 두렵지도 않냐? 아이구, 너 통도 크다!" 그러고는 짐짓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마무리한다. "결국 큰 일을 당해야 교회 나갈거야. 요즘 네 얼굴빛이 평화롭지 않고 우울해보인다. 다 교회 안 나가는 탓이지".

아래 층 K 목사로부터 거의 석 달동안 교회 나오라 권유받다 이제 겨우 끝났다. 으~ 지겨운 인간! 어느 날 의료원에 문병다녀오다 황당한 일을 당했다. 문병을 끝내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1층에 막 도착할 무렵, 50대로 보이는 남자가 앞을 턱 가로막더니, "예수 믿고 구원받으세요, 할렐루야!" 라며 귀에대고 속삭였다. 졸지에 당한 일이라 깜짝 놀랐다. 병원 문을 나서려니 나도모르게 볼맨소리가 나왔다. "별 미친놈 다봤네!" 

사실 종교의 자유가 지켜지지 않는 곳은 바로 가정이다. 상당수 초등학생은 물론이고 고교생들까지 부모들로부터 종교의 자유를 침해받고 있다. "교회 가봐야 어차피 졸다가 와요" "가기 싫은데 엄마가 강제로 떠다밀어요"  " 엄마 몰래 피시방에 있다가 교회 끝나는 시간에 집에 가거든요" 등등. "그래, 조금만 참아라, 대학생이 되면 그때는 안 나가도 되니까?" 이쯤되면, 지금 우리 학생들은 입시지옥과 종교지옥이라는 두 개의 지옥(감옥) 속에 갇힌 형국이 아닐까.  짜샤! 내가 좋으면 너도 다 좋은거야, 어떤 부모가 자식에게 나쁜짓 시키겠냐. 잔말말고 디립다 믿어, 믿고 천당가라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