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7

 

오후가 되자 가뜩이나 무더운 날씨에 졸음이 오고 온몸이 나른하다. 옆 사무실 동료가 커피를 마시러 왔다. 커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퇴직하면 뭘 하겠냐고 동료가 물었다. 그래서 늦은 나이지만 공부를 좀 제대로 해보고싶다고 대답했다. 물론 내가 하려는 공부는 인문학이다. 그러자 다시 물었다.

- 공부라는게 다 때가 있는 법, 젊어서 해야지 나이들어 한다고 되나? 주변에서 학위딴다고 땀흘리는 사람들 보면 참 이해가 안 가더구만. 괜히 폼잡으려고 하는거 아닌가?

- 학위니 뭐니 하는 건 필요없고, 그냥 공부가 좋아서 하려고...

- 거 책 많이 읽어봐야 소용없어요. 잔뜩 읽어봐야 오히려 사람 이상해지더구만. 책 한 권 안 읽어도 지혜가 깊고, 사리를 더 잘 분별하더라니까. 세상살이도 마찬가지...

- 옳은 말씀. 사실 거의 책을 읽지 않는 아내를 봐도 당신 말이 옳다고 생각해. 글쎄, 아내 앞에서 부끄러울때가 한 두 번이 아니라니까. 오히려 세상살이 지혜가 더 깊고, 사리 분별력도더 뛰어나고.....그래서 책 줄이나 읽었다는 내가 부끄럽고 자괴감이 들곤해. 오죽하면 책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 것부터가 민망하다니까.

- 근데 왜 정작 당신은 나이 들어서도 책을 놓지 못하고 맨날 책, 책 하는구?

- 그러게,......이런 내가 나도 이해할 수 없구만. 굳이 말하면 당신이 술을 좋아하고, 당구를  좋아하듯이 나도 책이 재밌고, 좋아서 그러는게지.

- 글쎄, 아무리 그래도 책 읽는다고 지혜가 깊어지고 인격 향상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니까.

- 누가 아니래나. 그러니까 내가 책, 책 하는 것은 당신이 걸핏하면 술, 술 하는 거나 다름없어요. 술마시는데 무슨 목적이 있나? 그냥 마시고싶어서, 술 생각이 나서 그러는 것처럼, 책 역시 어떤 목적이 있어서라기보다 그냥 재밌어서 읽는거요. 공부도 그래, 그걸 해서 뭐 어떻게 한다기보다 그냥 재밌어서. 아무 이유도 없이 트럼펫 불면 그냥 즐겁듯이, 즐기려고 그러는거요. 당신은 산에 왜 오르나? 물으니, “산이 거기에 있으니까.” 라고 대답한 등산가 힐러리 경처럼..

- 평생 줄기차게 읽은 것도 모자라, 퇴직 후에도 책 읽고 공부하고싶다는데, 그렇게해서 뭐 좀 얻어진게 있나? 어떤 일을 10년, 20년, 수십 년씩 하다보면 분명 뭔가 있을텐데........책도 그런거 있을까?

- 글쎄, 뭐가 있을까. 지식이 좀 늘었을까? 에이, 지식도 굳이 책 많이 읽는다고 늘어나는건 아닐거야. 더구나 요즘처럼 인터넷이다 스마트폰이다 해서 간단히 검색하면 뭐든 알 수 있는 세상인데, 머릿 속에 저장해본들 그 지식이 얼마나 될까. 그래서 어떤 지식을 많이 안다고 자랑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렇담 뭐가 있을까. 아하, 이런게 있겠네. 책을 좀 읽다보니 이런 건 알겠더라구.

내가 모르는게 너무 많다. 어느것 하나 제대로 아는게 없다. 내가 참 무식하구나! 도무지 어떻게 해야할지, 어떻게 살아야할지도 잘 모르겠고. 남들은 잘만 아는데, 나는 되려 모르겠으니.....이즈음은 말수까지 줄어들기도 하고....암튼 잘 모르겠어. 모르니까 아마 더 알려고 읽는걸까? 물론 우선은 재밌어서 읽는거지만......

- 뭘 알기위해 책을 줄기차게 읽었는데 더 모르겠다? 거참 아이러니하구만...그럴바에 차라리 안 읽는게 낫겠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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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어느 여자분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정보지에서 독서회 회원 모집광고를 봤다고.

- 저기요, 독서회 가입하려고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요?
- 실례지만 연세가....
- 아이가 초등학교 다니는데요, 대화도 나누고 좋은 이야기 해주고 싶어서......책 읽으면 참고가 많이 되겠지요?

순간 뭐라 대답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렸다. 자녀 때문에 읽겠다고하니 마땅한 답이 떠오르지 않았던 거다. 대충 얼버무리긴 했지만, 대답이 시원치 않았는지 결국 이분은 독서회에 나오질 않았다.

전화 끊고 나서 곰곰이 생각해봤다. 독서를 하면 교양있고, 지혜롭게 살 수 있을까? 행복해질까? 자녀에게 유익한 이야기를 해줄 수 있나? 자녀가 독서를 하면 정말 인격이 향상되고, 지혜로워질까?

- 독서를 하면 인격이 향상되고 지혜로워지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독서는 단지 책을 읽는 행위에 불과해서 이를 실천에 옮기지 않으면 말짱 꽝이거든요. 인격이니 지혜는커녕 더 어리석고 오만해질 수도 있습니다. 차라리 책을 멀리하고 읽지 않는 게 더 지혜로워지지 않을지.....제 아내는 거의 책을 읽지 않아도 살아가는데 아무 지장이 없고, 책깨나 읽은 저보다 훨 지혜롭게 살아갑니다. 그러니 책과 인격, 지혜 따위와는 별 상관이 없어 보이는군요.

- 독서를 하면 행복해질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행복은커녕 불행하다는 생각이 더 들고, 심지어 자괴감으로 괴롭기도 하지요. 책은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 온갖 주문이 많은데, 정작 사는 것은 비루하고 졸렬하기 짝이 없단 말이죠. 책은 단지 관념 속 지식에 불과해서 지식과 정보는 늘어날지 모르지만 실천에 옳기려면 쥐꼬리만큼도 잘 안 됩니다. 읽은 것 십 분의 일만 실천에 옮겨도 좋을 텐데 단지 생각뿐이지요. 그래서 반성이랄까, 자괴감만 들고, 차라리 모르면 그냥 살 텐데 책 읽은 것이 떠오르고, 사는 건 형편없고, 그래서 불행하다는 생각이 더 듭니다. 따라서 만약 당신이 행복하게 살고 싶다면 절대 책을 가까이해서는 안 되지요. 암만요!

- 자녀에게 책 읽기를 권하면 좋을까요?

차라리 권하지 않는게 좋을겝니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바르게 살라는 둥, 어찌어찌 살아야한다는 둥 미주알고주알 주문과 굴레가 많아집니다. 세상살이가 어데 그리 만만하던가요. 책대로 살자면 너무 힘들어서 단 하루도 살 수 없습니다. 차라리 읽지 않는 게 더 원만하고, 무리 없이 살 수 있지요. 뿐만 아니라 책은 오히려 정신적 스트레스로 작용할 확률이 큽니다. 그렇지 않아도 세상살이 온갖 스트레스가 많은데, 거기다 책까지 덤터기 씌워지면 정말 쌩병나고 말겁니다. 즐겁고, 유쾌, 발랄한 자녀 키우고 싶다면 결단코 책을 권해서는 안 됩니다. 결정적으로 중요한건 책에 빠지면 학교 성적이.......이건 제 경험으로 하는 말이니 믿으셔도 됩니다.

- 독서를 하면 인생이 즐겁고 풍요로워지나요? 책 속에 과연 길이 보이고 진리가 있을까요?

천만에요, 풍요롭기는커녕 꾀죄죄해집니다. 모두가 아는대로 사람의 행복과 즐거움은 대부분 경제형편에 달려있으니 책 따위에 시간을 허비하기 보다 차라리 돈 버는데 치중하는 게 낫습니다. 초지일관 열심히 돈을 버는 게 현명하지요.

분명히 말하지만 즐겁고 풍요로운 인생은 절대 정신적인 것(책)에 있지않고, 맛좋은 커피, 맛좋은 음식, 멋진 옷, 우아한 차 등에 있습니다. 이건 제 말이 아니라 임어당이 <생활의 발견>에서도 한 말이거든요. “인생의 즐거움은 감각적인 것에 있다.” 얼마나 솔직하고 진실합니까. 괜히 책 속에 길이 있느니, 진리, 행복 따위가 있느니 하는 말을 쉽게 믿으시면 안 됩니다. 그보다는 차라리 돈 속에 길이 있고, 행복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답이 참 실망스러운데 한 말씀만 더 여쭤보겠습니다. 그렇담 당신은 왜 책을 읽으시나요?

글쎄요, 말씀드리기 전에 한가지 여쭤볼게요. 당신은 왜 꽃을 기르세요? 왜 등산을 좋아하세요? 마찬가지예요. 그냥, 뭐 딱히 어떤 목적이 있어서라기보다 좋아서, 그냥 좋아서......꼭이 말하란다면 소크라테스의 말로 대신하겠습니다. “여보게, 숙고하지 않은 삶은 살 가치가 없는 것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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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건강이 좋아서 앞으로 17년을 더 살수 있다면 내 나이 여든. 파삭 늙어버린 나이에 무엇을 할까마는 상상으로나마 여든 고개의 미래를 그려본다.

 

돋보기 도움을 받으면 드문드문 글이야 읽을 수 있겠지? 하지만 너무 나이들었으니 기억력은 감퇴되고 읽는 속도도 더딜 것이다. 이해력 떨어지고 건강 역시 좋지않겠지만 그렇다고 평생해온 독서와 공부는 중지 할 수 없다. 사실은 책 읽는거 말고는 달리 할게 없고 즐겁지도 않으니 선택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더구나 공부는 죽는 순간까지 해야하니.     

 

60즈음에 시작한 단테읽기를 반복하고 스피노자를 읽으며, 들뢰즈, 라캉을 공부한다. 플라톤의 <국가>,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재독하거나 이해 불가인 헤겔과 칸트를 끝내 놓지않고 되찾아본다. 마찬가지로 평생 숙제 같은 셰익스피어, 마르셀 프루스트와 제임스 조이스, 보르헤스의 작품도 조금씩이나마 읽어본다.  

 

세계영화사를 공부하고 '시네 21'을 탐독하며 새로 출시된 DVD 목록을 살핀다. 해마다 수많은 영화들이 만들어지건만 여전히 타르코프스키, 앙겔로풀로스, 베르히만, 부뉴엘, 고다르, 안토니오니, 트뤼포아, 홍상수, 봉준호의 영화형식이 궁금해서 이미 수차례 감상한터지만 또다시 보지 않을 수 없다. 한 주에 한 번 컬렉션한 영화 중 두 어 편정도 감상하고 1년에 한 번이라도 아내와 함께 영화제에 들른다.    

 

매일 아침 한겨레신문을 읽으며 '시사 IN'을 구독하고, 가능하면 하루 한 시간 트럼펫 연습을 한다. 80나이가 되도록 호흡량에 큰 지장이 없다면 지금처럼 오케스트라 활동을 계속 할 수 있겠지? 주말엔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에 나가 베토벤과 모차르트를 연주하고, 1년에 한 차례 '예술의전당' 무대에서 정기연주회도 할것이다. 글쎄, 가능할지 모르겠는데 하얀 백발, 주름깊게 패인 파파 노인차림으로 무대에 선 내 모습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설레인다.    

 

아침마다 아내와 함께 드립커피를 마시며 자식, 이웃들, 그리고 세상 돌아가는 일, 특히 정치판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나눈다. 정치는 태어나 죽을때까지 가장 중요한 사안이므로 아내와의 대화에서 가장 신나는 화제가 아닐 수 없다. 부부 대화는 많을수록 좋은 법이니 나이들어도 대화는 더 풍성해야 한다. 주중 두어 번쯤 동네 카페에 들러 이웃들을 만나고, 점심은 빵과 커피로 때운다.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겨야 한다지만 범부인 나는 이름을 남길 이유가 없으므로 잡글이라도 남겨야겠다. 비록 창조적인 글, 심오한  글, 긴 글은 쓰지 못해도, 또 누가 읽지 않을지라도 죽는 그 순간까지 하루 단 한 줄이나마 블로그에 글을 써야겠다.   

 

햇볕 따사로운 어느날, 사위는 적막에 잠기고 인적이 없는 나의 집. 사랑하는 아내는 늙어 허리가 굽고 자식들 멀리 떠나 있으니 둘이만 있는 집은 그 어느때보다 고요할 것이다. 누구나 태어나 살다가 때가되면 죽음으로 돌아가는것. 만약 우리에게 죽음이 없다면 대체 인생이란 얼마나 무의미하고 지루하겠는가. 

 

살아온 나날 되짚어보니 마냥 즐거운 일만 있던게 아니라서 괴롭고 힘든일, 때로 기쁜일, 즐거움도 많았다. 서운할것 슬플것 없다. 이만하면 그럭저럭 재밌고 만족스런 삶이었으니 이쯤해서 슬슬 죽음을 마주해야겠지? 아, 깜박 잊은게 있다. 내가 만약 죽으면 관 속에 책이라도 한  두어권, DVD라도 두 어장 함께 넣어달라고 해야겠다. 저승길, 먼길 가는데 지루할게 분명하므로 심심파적 책 읽고 영화라도 보면서 가고싶으니....그러고는 편안하고 달콤한 긴잠에 빠져들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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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루 모처럼 느긋한 시간이 주어졌다. 뭣을 할까. 예나 지금이나 내가 좋아하는건 유일하게 독서 아니면 영화다. 엊그제 구입한 2015 이상문학상 작품집 <뿌리 이야기>와 밀란 쿤데라의 소설 <정체성>을 서재에서 빼들었다. 한데, 오늘은 책을 읽는것보다 영화가 나을 것 같다.

영화. 수많은 영화 중에서 과연 어떤 것을 택해야 할지. 귀한 시간, 아무것이나 볼수 없잖은가. 궁리끝에 루키노 비스콘티의 <베니스에서의 죽음>과 에롤 모리스의 <가늘고 푸른 선>을 최종 후보작으로 골랐다. 제한된 시간, 두 편 모두 볼 수 없어 에롤 모리스의 다큐멘터리<가늘고 푸른 선>으로 낙착. 실은 두 번째 감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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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다큐멘터리를 좋아하고, 결국 최상의 예술장르로 인정한건  'EBS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영향이 크다. 예술성으로만 본다면 극영화에 비할 수 없을 것 같은데 실제는 그렇지 않았다. 여하튼 오래 기억될 멋진 다큐를 수없이 감상한 것도 행운이지만, 다큐의 거장이라 칭해지는 요리스 이벤스, 베르너 헤어조그를 안것도 바로 이 영화제를 통해서다.▲ 영화 <가늘고 푸른 선>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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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늘고 푸른 선>에 대한 정보를 좀 얻어볼까 인터넷 검색하다 'EBS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프로그레머였던 오정호씨의 글을 발견했다. 에롤 모리스와 <가늘고 푸른 선>을 소개한 아주 훌륭한 글인데, 혼자 읽기 아까워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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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롤 모리스를 세계적인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만들어준 <가늘고 푸른 선>은 언제 보아도 대단한 작품이다. 탐사 보도 다큐멘터리의 대명사로 불리는 이 작품은 한 무고한 사형수를 살려낸 것으로도 유명하다. 1976년 11월 추수감사절 주간 미 텍사스 주 댈러스 시에서 로버트 우드 경사가 근무 중 권총으로 살해된다.

데이빗 해리스라는 16세의 한 소년은 28세의 뜨내기 랜들 아담스를 살인범으로 지목한다. 오히려 데이빗 해리스가 범인일 가능성이 높았지만 경찰과 검찰은 겉으로는 친절하고 예의 바른 16살의 소년을 앞세워 아담스를 기소한다. 살인을 저질렀을 것 같은 자가 오히려 검찰 측 증인이 되어 누군가를 살인범으로 지목한 것이다. <가늘고 푸른 선>은 1988년 개봉되었으니 개봉 당시 랜들 아담스는 이미 12년을 복역한 셈이다. 

 

이 작품을 찍기 전 에롤 모리스는 사설탐정을 하며 돈을 벌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감독-탐정” 이라고 칭했다. 이 작품의 줄거리를 다시 한 번 이야기함으로써 정의의 승리에 대해 새삼 강조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두세 가지 관점에서 감독 에롤 모리스의 저널리즘에 대한 태도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첫째, 그는 무겁게 준비하고 있었다. 누구보다도 사전 준비과정이 철두철미했고 좋은 관찰자였던 그는 하나의 사건을 둘러싼 수많은 편린들 중 사건의 핵심과 직접적으로 결부된 것을 추려냈다. “200명이 넘는 사람과 인터뷰를 나누었고, 그 후 24명의 인터뷰를 찍었다. 이 중 20명의 인터뷰를 영화에 사용하였다”, “2000페이지에 가까운 원고를 내가 타이프로 직접 쳤으며 결국 최종 원고는 41페이지였다”, 그의 준비성과 집요함이 돋보이는 대목들이다.

둘째, 그에게 있어 스타일 자체는 진실을 확보하는 결정적인 요소가 아니었다. 그는 시네마 베리테적인 방식이 아니라 재연, 빅 클로즈업, 정면으로 카메라를 응시하는 인터뷰 등 실험적인 방식을 도입했다. 총알이 발사되는 장면, 사람의 입, 쏟아지는 밀크셰이크, 부풀어 오르는 팝콘 등 필름 누아르적 요소들을 사용했다.

에롤 모리스는 핸드헬드 카메라, 자연광 조명, 촬영 스태프의 불간섭 등 흔히 사실성을 강화해준다고 믿는 시네마 베리테적인 스타일이 결코 진실을 획득하게 해주는 것이 아님을, 그 반대되는 기법을 통해 보기 좋게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그는 카메라 프레임 내부의 피사체들은 아주 조심스럽게 배치하였고 때에 따라 인터뷰이의 의상 색깔까지도 바꾸곤 하였다.

이 작품이 1988년 아카데미상 다큐멘터리 부문에서 제외되었던 이유 역시 재연 장면들이 심사위원들의 심기를 건드려 놓았던 것이다. 당시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실험적인 요소였던 것이다.

셋째, 그의 인내심이다. 그는 결정적인 증인이자 범인인 데이빗 해리스를 만나기 위해 1년 반 이상을 기다렸다. 2년 반 이상 이 작품에 매달렸다. 우여곡절 끝에 랜들 아담스는 무죄이고 자신이 진범이라는 데이빗 해리스의 육성을 담은 <가늘고 푸른 선>이 개봉되었던 당시, 여전히 법정 공방이 진행 중이었다. 하지만 즉각적으로 랜들 아담스가 풀려났던 것이 결코 아니었다. 주임 판사가 바뀌고 사건은 주 고등법원과 연방법원을 왔다 갔다 하였다.

“누구든지(어느 검사이든지) 유죄인 사람은 기소할 수 있다. 무죄인 사람을 기소하는 데에는 재능이 필요하다. ” 담당 검사였던 더글라스 멀더가 남긴 말처럼 그가 싸워야 하는 검사들은 만만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검사의 입장에서 보아도 종신형을 받을 수 없는 16세의 해리스보다 종신형이 가능한 28세의 아담스가 훨씬 드라마틱한 타깃이었다. 당시 더글라스 멀더 검사는 승률100%의 전설적인 검사였다. 사법정의를 구현하는 과정에서 감독은 진실 그 자체뿐만 아니라 사법 당국 내부에 존재하는 기이한 엘리트의식, 미 남부의 지역감정, 복잡한 사법절차와도 싸워야 했던 것이다.

에롤 모리스가 10살 소년이었을 때 동네 형과의 내기에서 얻어낸 교훈이 있다. 그것은 진실에 대한 이야기이다. “진실은 상대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주관적이지도 않다. 그것은 잘 드러나지 않거나 숨겨져 있을 수 있다. 때로 사람들은 그것을 폐기하고 싶어 하기도 한다. 하지만 진실이라는 것은 분명 존재하며 진실의 추구 역시 존재한다. 실제로 무엇이 일어났는지 알아보는 것, 그리고 실제로 그것들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다.”  진실은 분명히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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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코엔 형제의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원작인 코맥 매카시의 소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임재서 역, 올, 2008년)는 현대 자본주의에 대한 묵시록이자 우화다. 여기서 노인은 갈데없이 짜부라진 현대인을 대변하고 악의 화신 시거는 현대자본주의 시스템이자 돈으로 봐도 틀리지 않을듯. 소설은 헤밍웨이 문체가 그렇듯 짧고 건조하며 속도감으로 넘친다.   


행운과 불행이라는 두 얼굴. 아이러니한 것은 행운을 잡은 이가 불행으로 전락한다.  하긴 우리네 인생이 그렇지 않은가? 행운과  불행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와중에 끊임없이 아이러니에 직면하기 때문이다. 

소설에서 행운과 불행은 운명론적이다. 우리는 으레 운명론을 폄하한다. 만사를 운명에 맡기면 도대체 우리가 해야할 몫이 없지 않느냐것. 2000년 인간사가 수동적인 운명론에 맞서온 결과인데, 찬란하게 이룩한 인류문명인데, 그리스 비극도 아닌 현대소설이 운명론을 내세우다니!

 

하지만 우리네 인생은 인정하든 안 하든 상당 부분 운명적론인 측면이 있다. 가령 30년전 어느날 내가 모교를 우연히 찾지 않았다면 평생 해온 공무원 생활이 과연 가능했을까? 나아가 아내를 만날 수 있었을까? 어느날 아내가 시내에 있는 어느 약국을 찾은 것이 계기가 지금까지 오케스트라 활동은 하는 것은 순전히 우연의 결과이자 운명론적이다. 

나는 지금 코맥 매카시가 주장하는대로 행운과 불행을 운명론의 소치라며 거들 생각은 없다. 다만 운명론이 맞고 틀린다라기 보다 설사 인생이 운명적이라해도 맞서 대응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런 결론이 뭐 중뿔난게 아니고 이미 니체가 설파한 논리이자 모든 긍정론자의 논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헤밍웨이의 단편 <살인자들>에서 자신을 죽이러 온 살인자들의 소식을 듣고도 가만 기다리는 닉의 운명처럼 언젠가 찾아올 죽음을 거부할 수는 없다. 최선을 다해 죽음에 맞서기는 하되,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 슬픈 일이지만 인생은 결국 운명론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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