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코엔 형제의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원작인 코맥 매카시의 소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임재서 역, 올, 2008년)는 현대 자본주의에 대한 묵시록이자 우화다. 여기서 노인은 갈데없이 짜부라진 현대인을 대변하고 악의 화신 시거는 현대자본주의 시스템이자 돈으로 봐도 틀리지 않을듯. 소설은 헤밍웨이 문체가 그렇듯 짧고 건조하며 속도감으로 넘친다.   


행운과 불행이라는 두 얼굴. 아이러니한 것은 행운을 잡은 이가 불행으로 전락한다.  하긴 우리네 인생이 그렇지 않은가? 행운과  불행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와중에 끊임없이 아이러니에 직면하기 때문이다. 

소설에서 행운과 불행은 운명론적이다. 우리는 으레 운명론을 폄하한다. 만사를 운명에 맡기면 도대체 우리가 해야할 몫이 없지 않느냐것. 2000년 인간사가 수동적인 운명론에 맞서온 결과인데, 찬란하게 이룩한 인류문명인데, 그리스 비극도 아닌 현대소설이 운명론을 내세우다니!

 

하지만 우리네 인생은 인정하든 안 하든 상당 부분 운명적론인 측면이 있다. 가령 30년전 어느날 내가 모교를 우연히 찾지 않았다면 평생 해온 공무원 생활이 과연 가능했을까? 나아가 아내를 만날 수 있었을까? 어느날 아내가 시내에 있는 어느 약국을 찾은 것이 계기가 지금까지 오케스트라 활동은 하는 것은 순전히 우연의 결과이자 운명론적이다. 

나는 지금 코맥 매카시가 주장하는대로 행운과 불행을 운명론의 소치라며 거들 생각은 없다. 다만 운명론이 맞고 틀린다라기 보다 설사 인생이 운명적이라해도 맞서 대응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런 결론이 뭐 중뿔난게 아니고 이미 니체가 설파한 논리이자 모든 긍정론자의 논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헤밍웨이의 단편 <살인자들>에서 자신을 죽이러 온 살인자들의 소식을 듣고도 가만 기다리는 닉의 운명처럼 언젠가 찾아올 죽음을 거부할 수는 없다. 최선을 다해 죽음에 맞서기는 하되,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 슬픈 일이지만 인생은 결국 운명론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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