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초에 글도 시원찮은데다 어줍잖은 생각을 글쓰기로 드러내려니 남루함 투성이다. 그나마 3,40대 때는 깊이야 그만두고라도 제법 긴 분량의 글을 쓰곤했지만 이마저도 쉽지 않다. 맘으로는 태평양 심해 보다 깊은 심오한 글을 쓰고싶지만 기껏 일기쓰듯 하루 일과를 끼적이는게 전부다. 사실 피상적인 견해 운운이나 글쓰기에서 비롯된 자괴감이란것도 글줄이라도 쓸때 말이지, 이도저도 아닌 허접글을 쓰는 내 경우엔 가당치 않다.  

멋진 글, 심오한 글을 쓰지 못할바에 타인의 견해나 글을 경청하고, 감상하는 것도 효율적이겠다. 그래서 종종 타인의 글을 통째로 퍼나르거나 인용하곤 하는데, 뜻밖의 횡재랄까, 두툼한 책 보다 깊은 생각꺼리를 건져낼 때가 있다. 뭐 월척이 꼭 특정한 장소나 깊은 물에서만 가능한게 아닐터이니 수시로 이곳저곳 살피며 발품이라도 파는게 내 할일이지싶다. 아래 글은 오늘자(2019. 3. 21) 한겨레신문에 게재된 작가 손아람의 칼럼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일부 옮긴 내용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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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들은 밤하늘의 별을 관찰하다 우물에 빠졌다는 그리스 철학자 탈레스와 같은 사람들이다. 시선을 별에서 거두어 자기가 빠진 우물을 둘러보는 순간 자괴감이 엄습한다. 자의식이 예민한 만큼 우물은 심연처럼 깊어 보인다. 그래서 생각을 쓰는 일을 직업으로 삼은 사람들은 대개 크고 작은 우울함에 시달린다. 생각의 가치를 인정해주지 않는 사회와 시대를 탓할 수도 있지만, 거기서 멈춘다면 생각을 직업으로 삼기에는 한참 부족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부조리는 세상의 탓이지만 우울함은 오로지 생각하는 자들의 몫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조리 때문에 우울해하지 않는다. 저 멀리 치워두고 아무렇지 않게 앞으로 나아간다. 작가들은 생각을 쓰기에 우울한 것이 아니라, 부조리에 정서적으로 반응하는 잠재된 기질 때문에 생각을 쓰는 일을 택하게 된다고 나는 믿는다.

얼마 전 오랜만에 연락해온 지인을 만났다. 의사인 그는 병원을 정리하고 글을 쓰려 한다며 조언을 구했다. 자신의 일이 근본적인 만족감을 주지 못하고, 결심의 때를 놓치면 그 상황이 죽을 때까지 지속될까봐 두렵다고 했다. 나는 그의 경험 범위를 넘어서는 가난에 대해 경고했고, 그는 ‘한번 사는 삶’의 방식에 대한 그의 오랜 고민으로 대답했다. 가난은 감수할 만할 것 같다는 것이었다. 그때 문득 화석처럼 희미해진 기억이 되살아났다. 작가의 길을 고민하던 20대 시절이었다. 나는 내 생각이 경제적으로 무가치하다는 평가를 받게 될까봐 두려웠고, 생각을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만큼 갈증에 시달렸다.

이 의사의 결단은 매우 드문 것이지만 그가 도달한 고민은 흔한 것이다. 생각의 실용적 가치가 작아질수록, 생각의 용도가 줄어들수록, 생각에 대한 굶주림은 커진다. 그래서 작가를 직업으로 택하는 계기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기저에는 비슷한 동기가 있다. 직업에 대한 회의, 의무로 포화된 가족 계약의 해체, 대인기피증과 같은 음성적 언어소통의 장애, 성폭력 피해의 경험, 내가 끌리는 일을 내 마음대로 하며 살고 싶다는 이기심. 서로 다른 이유로 생각을 표현할 기회와 방법을 찾던 사람들이 한길에서 만난다. 전공 공부 때문에, 혹은 우연한 구직의 결과로 글을 쓰게 되었다는 사람은 한번도 만난 적이 없다. 생각이 많아서 고통받는 작가들이 고통에 대해 생각하다 작가가 된다는 사실은 흥미로운 딜레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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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승선했던 300톤급 트롤어선은 달세나 부두에서 대략 일주일쯤 머물다가 식량과 기름 보급을 마친 후 라스팔마스 항구를 떠난다. 하루쯤 항해 끝에 아프리카 연안에서 멀지 않은 대서양 어장에 도착한다. 대략 북위 25도에서 20도 사이. 이윽고 투망을 마치면 한 두 시간 그물을 끌다 양망을 한다. 그렇게 하루종일 투망과 양망을 반복한다. 일하고 먹고, 자고, 일하고 먹고 자고, 보이느니 대서양 망망대해. 두 달쯤 작업을 하고나면 한 항차가 끝난다. 만선이 되면 다시 입항. 그리고 다시 출항. 3년을 채우면 계약기간이 끝난다. 20대 꼬박 10년 세월을 그렇게 대서양에 쏟아부었다. 청춘의 낭만도, 연애도, 우정도, 사랑도 몽땅 그물과 함께 바다에 쳐박히고 만거다.   

아, 지옥같던 원양어선. 뱃생활동안 나를 지탱해준것은 문학과 책, 모차르트, 베토벤의 음악이었고, LP음반이며, 글쓰기뿐이었다. 대서양 망망대해, 끝 없이 줄지어선 아프리카 모래사막, 모로코에서 세네갈까지 특징없이 이어지던 모래해변, 그 절벽들.....하지만 나를 끝내 버티게 해준 음악들, 헤밍웨이와 이청준의 단편들, 가스통 바슐라르, 글쓰기, 상상력, 몽상과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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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청준의 단편 <조만득씨>는 한 과대망상증 환자의 이야기다. 전직 이발사인 조만득은 원래 심성이 착하고 근면, 성실한 사람이지만 몇 푼 안 되는 재산을 말아먹는 동생과 가족들 뒷바라지 하느라 그만 과부하가 걸린다. 과부하가 한계치를 넘으면 정신병에 걸린다. 결국 정신병원에 입원한 조만득이 벌이는 에피소드가 소설의 주요 스토리인데,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한다.  

조만득은 자신을 어느 기업 사장쯤으로 여기고, 병동의 환자들, 간호사, 의사 누구랄것 없이 만나는 이들에게 고액 수표를 써준다. 수표는 그냥 하얀 종이이고, 백지에 볼펜으로 고액을 써넣는 식이다. 한편 조만득을 치료해서 정상인으로 되돌리는게 주치의의 임무인데 반해, 담당 간호원은 이렇게 반문한다. 조만득이 감당할 수 없는 고통스런 현실로 다시 돌아간다고 병원의 책임을 다하는가? 

3
문제는 항상 현실이다. 책을 지나치게 읽다 몽환적인 세계를 진실로 착각하는 돈키호테는 일단 현실을 떠난다. 그러나 그가 스스로 아마디스가 되어 상상력으로 만들어낸 둘시네아를 찾아나선 순간, 그는 분명 환상의 자장내에 있다. 그러나 만약 오매불망 그리던 둘시네아를 만날 수만 있다면 - 이 경우 둘시네아를 만날지 여부는 다른 차원의 문제이고, 동시에 가능 불가능 여부 또한 서로의 가치관과 세계관의 차이이며 상대적인 문제라는 거다 - 그것은 환상이 아닌 진실, 혹은 현실로 바뀔 수 있고, 이때의 현실은 처음 떠난 현실이 아니라 소망했던 것으로 뒤바뀐 새로운 현실이다. 이처럼 현실(사실)과 소망하는 유토피아의 역설적인 관계에 대해 월러스 스티븐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바 있다.

“우리는 사실을 떠난다, 그리고 그것으로 돌아온다, 우리가 그랬으면 하는 사실로 돌아온다. 그것은 그전의 사실도 아니고, 너무나 자주 그래왔던 사실도 아니다.”

스티븐스에 따르면, 우리는 현실 혹은 사실을 떠나지만 언젠가 다시 현실(사실)로 돌아온다. 그러나 이 떠남과 돌아옴 사이에서 현실은 우리가 원하는 것과 일치한다. 왜냐면 이 경우 우리는 이 새로 돌아간 사실과 우리의 원하는 것의 차이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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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적 아름다운 꿈, 무지개빛 이상이 있었다. 점점 나이들어간다. 나이드는 동안 꿈은 퇴색되고, 누군가는 소중했던 꿈을 잃어버리기도 하지만 그중 몇몇은 옹골차게 간직한다. 녹녹치 않은 현실은 졸졸졸 시냇물처럼 흐르더니 급기야 급류가 되어 폭포수로 쏟아진다. 꿈은 그저 꿈일뿐인가? 현실에서 이뤄낸다는 게 쉽지 않다. 한 발 늦은감은 있지만 뒤늦게라도 알았다. 불가능할것 같다. 그런데도 40, 50 아니 60이 되도록 꿈을 잃지 않는다. 기어이 실현하는것만이 아름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설사 이뤄지지 않아도 좋다. 과정이 중요하니 직선주루 달리듯 질주 본능만이 최선이다. 이쯤되면 꿈이 뭔지 현실이 뭔지 어지럽게 뒤섞인다. 달린다. 달리다 쓰러져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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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 풍부한 가능성을 예견하고 때로는 언뜻 스친 신중함에 얼어붙어 지식의 이런저런 귀퉁이를 움켜쥐려 하면서 곤두박질치듯 흘러가는 세월은 인간을 휩쓰는 급류 같다. 인간은 바위에 부딪히기도 하고, 계속 이어지는 물보라와 얼마간 씨름할 때도 있다. 그러다가 마침내 나가 떨어져 어둡고 바닥모를 바닷속에 가라앉는다. 우리는 흘끗 보고 얼핏 감지할 뿐이고, 제 지론에서 찢겨져 나와, 빙글빙글 돌면서 삶의 이런저런 관점을 마주한다. 마침내 자기 의견을 끝까지 고수할 수 있는 자는 바보나 불한당뿐이다.

우리는 삶의 어떤 상황을 보고는 그것을 연구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가 가장 공들여 세운 견해는 한낱 인상에 지나지 않는다. 숨 돌릴 틈이 생기면 그 기회를 잡아 수정하고 조절해야 한다. 그러나 이처럼 정신없이 서둘러 달려가는 동안에, 소년이다 싶으면 어른이고, 사랑에 빠졌다 싶으면 다른 연령대가 시작되었고, 완전히 어른이 되었다 싶으면 무덤을 향해 쇠락하기 시작한다. 이처럼 혼란스럽고 덧없이 흘러가는 상황에서 일관성을 찾거나 명료하고 영속 적인 견해를 기대하는 일은 헛되다.

의견을 형성하는 것은 작은 방에서 사물을 소량 실험하는 과학이 아니다. 우리는 권총을 머리에 댄 채 이론을 세운다. 시간이 다하기 전에 우리가 직면한 일련의 새로운 상황에 대한 판단을 내려야 할 뿐 아니라 조치를 취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 자신도 불변의 항수로 간주할 수 없다. 이처럼 만물이 유전하는 상황에서 우리 정체성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듯하고, 가장무도회에서 내 가면이 가장 이상하게 보이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시간이 지나면서 싫어했던 것을 좋아하게 되고 좋아했던 것을 싫어하게 된다. 밀턴이 예전처럼 지루해 보이지 않고 에인즈워스는 그리 재미있어 보이지 않는다. 나무에 기어오르는 일은 분명 더 어려워졌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은 전처럼 어렵지 않다. 허세를 부려 봐야 소용이 없다. 숨바꼭질 세 번의 멋진 승부도 어째인지 묘미를 잃었다. 우리의 특성은 조절되거나 달라진다. 그에따라 의견도 조절되거나 달라지지 않는다면, 인생을 제대로 살지 못한 것이다.

스무 살의 견해를 마흔에도 똑같이 지니고 있다면 이십 년간 얼빠져 지내 온 것이고, 예언자는커녕 회초리로 많이 맞아도 현명해지지 않는 고집불통이 된 셈이다. 이는 런던 항에서 인도로 출항한 선장이 출발할 때 템스강 지도를 들고 갑판에 나와서는 고집스럽게 항해 내내 다른 지도는 사용하지 않는거나 마찬가지다."  - R. L. 스티븐슨 <게으른 자를 위한 변명>(민음사, 이미애 역) 중 '심술궂은 노년과 청춘'

*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1850~1894)은 영국태생의 작가이며<보물섬(1883)>, <지킬 박사와 하이드>(1886), 에세이집 <게으른 자를 위한 변명>(1881) 등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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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추어 트럼펫터로서 매일 2시간씩 연습을 하기란 말처럼 쉽지 않다. 하지만 단원 대부분이 전공자인걸 감안하면 비전공자인 나는 2시간이 아니라 3시간 연습을 해도 부족하다. 하루이틀도 아니고 매일을 꼬박꼬박 연습을 한다는게 정말 쉽지 않다. 더구나 60중반 나이고보니 신체적으로도 그렇고, 열정도 한계가 있다. 비록 한가하기는 하지만 독서실 업무도 빼놓을 수 없다. 좋아하는 독서, 글쓰기, 영화 등 하고싶은건 좀 많은가. 틈틈이 지인들도 만나야지......하지만 매일 연습만큼은 절대 놓칠 수 없다. 다 그만두고 베토벤 7번을 연주하려면 주력이 충분해야 하기 때문이다.

비단 트럼펫뿐일까. 뭐든 좀이라도 잘하려면 열정은 기본이고, 부단한 연습, 즉 꾸준함, 반복 연습과 학습이 필요하다. 불가피한 사정으로 연습을 할 수 없는 이유는 얼마든지 댈 수 있다. 하지만 설사 백 가지 타당한 이유를 대더라도 변명에 불과하다. 정말 중요한 일이라면 만사 제치고 하기 마련 아닌가? 그러니 뭔가 이유로 연습을 못했다는건 연습 그 자체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아서다. 

간밤 오케스트라 연습 연주는 지난 한 주 연습했던 결과를 시험할 기회였다. 과연 주력이 통할까? 그럭저럭 60프로정도는 해낸거 같다. 아쉽지만 이것만으로도 만족스럽다. 실전 연주회에 나서려면 100프로, 아니 120프로는 준비해야 겨우 6, 70 프로 밖에 해낼 수 없다.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은 길, 참으로 멀고 먼길이다. 자 다시 힘내고 오늘은 어젯밤 문제가 많았던 4악장 연습에 치중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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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습 시작한지 5개월째, 트럼펫 주자인 나로서는 가장 난이도가 높은 베토벤 <7번 교향곡> 전 4악장을 완주하는데 드디어 성공했다. 연주시간 약 40분. 물론 완성도면에서는 형편 없지만 가장 문제였던 주력을 어느정도 해결했다는 점에서 희망이 생긴다. 뭐니뭐니해도 주력이 먼저 확보돼야 사운드 질이며 박자, 앙상블, 나아가 디테일한 표현을 운운 할 수 있다. 문제는 완주할 수 있는 주력!  

10여년째 오케스트라를 하는동안 가장 힘든 곡을 꼽으라면 나는 주저없이 이 곡을 들 수밖에 없다. 1번과 5번<운명> - 2악장 트럼펫 솔로 부분 역시 만만치 않은 대목이다 - 도 연주해봤지만 7번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다. 가령 7번은 첫 악장부터 진을 빼다보면 가장 난코스인  4악장 중간쯤에서 입술이 풀려버린다. 다음은 3악장 중간쯤 2옥타브 B음을 한 호흡으로 무려 13마디를 지속해야하는데, 아마추어 실력으로는 이게 도저히 불가능하다. 불가피하게 일곱 마디에서 따단~ 살짝 숨을 얼른 내쉬고 다시 따단~ - 관악 주자들 사이에서 이른바 도둑 숨(호흡)이라고 칭하는 - 하는 식으로 다음 마디를 이어 나가야한다. 문제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해야하는데 그러자면 상당한 테크닉이 요구되는거다.  

연주회는 아직 5개월쯤 남았으니 다소 여유가 있긴하다. 그때까지 과연 좋은 사운드를 낼 수 있을지. 아, 힘들고 힘든 베토벤 연주다. 하지만 이 곡을 끝내고나면 분명 실력은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될테니, 이 생각만을 하면서 연습에 박차를 가해야겠다. 

최근 베토벤 <교향곡 7번>에 대한 나의 탐구는 두 방향으로 맞춰있다. 즉 한꺼번에 두 마리 토끼를 쫒는 일인데, 하나는 오케스트라연주고, 다른 하나는 곡 분석이다. 두 가지 모두 금년 연주회 날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 어떤 것도 쉽지 않은데도 굳이 두 가지를 하려는건 식지 않은 열정을 믿기 때문이다. 잘 될까? 모르겠다. 될지 안 될지는 나중 일이고, 여하튼 그냥 해보는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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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머니스트 출판사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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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버지니아 울프’라는 이름은 하나의 상징이 되었다. 2015년 2월부터 시작된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 선언, 2016년 5월 강남역 살인사건, 2018년 미투 운동 등을 통해 페미니즘에 대한 한국 사회의 관심은 어느 때보다 높아졌으며, 페미니즘을 이야기할 때 늘 등장하는 작가가 바로 버지니아 울프다. ‘여성과 소설’에 관한 강연을 바탕으로 쓴 에세이 《자기만의 방》은 여성의 경제적 자립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작품이며, 많은 이들이 이 작품의 제목을 여성 독립을 은유하는 용어로 사용한다. 또한 울프는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소설을 쓴 대표적 모더니즘 작가이며, 그녀의 소설은 지금까지 전 세계 독자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그런데 막상 버지니아 울프의 작품을 직접 읽어보려고 하는 사람은 처음부터 좌절하기 쉽다. 의식의 흐름에 따라 기술된 울프의 소설은 일반적인 소설처럼 이야기를 따라가기 어려워 무척 난해하게 느껴진다. 에세이는 명확하게 주제 의식을 표현하지만, 20세기 초 영국의 사회와 문화에 관한 배경지식이 없다면 그 의미를 오롯이 파악하기 쉽지 않다. 이 책 《버지니아 울프 북클럽》은 이 같은 버지니아 울프 입문자를 그녀의 삶과 작품 세계로 초대하는 친절한 안내서다. 《자기만의 방》, 《댈러웨이 부인》, 《등대로》, 《올랜도》 등 버지니아 울프의 대표작 열네 편의 주요 구절과 집필 배경, 사회 상황 등을 종합하여 각 작품의 의미를 차근차근 살펴봄은 물론 지금 왜 울프가 호명되는지 그 실체를 하나하나 드러낸다.

《자기만의 방》은 소설 못지않게 울프에게 유명세를 안긴 작품이다. 울프는 논객이었다. 그는 당대 사회에 대해 분명한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사회를 향하기보다, 그곳에서 주체적인 존재로 성장해야 할 여성을 대상으로 삼는다. 그에게 글쓰기는 단순하게 생각을 표현하는 것을 넘어서 주체의 변용 자체를 끌어내는 행동이었다. 그래서 울프는 줄곧 자신의 경험을 소개한다. 작가로서 자신의 삶을 영위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울프는 이 책에서 되짚는다. 사상가로서 울프의 면모가 오롯이 드러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 ‘《자기만의 방》, 여성 주체를 만드는 법’ 중에서(183쪽)

《댈러웨이 부인》은 울프의 대표작으로, 이른바 의식의 흐름 기법을 도입한 최초의 실험으로 알려져 있다. 이 소설은 주인공 클라리사 댈러웨이 부인이 파티를 준비하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하루 동안에 일어난 일을 다루고 있지만, 시공간을 초월한 ‘의식의 흐름’이 전체 이야기를 직조한다. 울프의 다른 작품들처럼 이 소설 역시 이야기를 따라가려고 하면 금방 흥미를 잃을 수 있다. 이 소설을 울프 자신의 이야기로 읽어보면 숨겨진 의미의 지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런던을 산책하기 좋아하는 클라리사는 울프의 모습과 겹치며, 내면의 광기가 점점 커져서 마침내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마는 셉티머스는 울프의 마지막을 암시하는 듯하다.  - ‘《댈러웨이 부인》, 작가라는 질병’ 중에서(1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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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울프는 물론 뛰어난 작가이자 페미니스트지만 그녀의 본모습은 모더니즘 작가, 여류 작가, 페미니스트 작가의 범주를 훨씬 뛰어넘는다. 저자 이택광 교수는 이 책에서 우리가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울프, 즉 날카롭고 예리한 비평가이자 사상가였던 울프를 새롭게 조명한다. 저자는 잘 알려진 울프의 소설과 에세이만이 아니라 26권에 달하는 일기까지 조사하여 그녀의 일상과 단상을 낱낱이 파악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울프가 제1, 2차 세계대전을 비롯한 전쟁, 영국의 식민지 경영과 제국주의, 노동자의 권리, 여성의 사회적 지위 등 당대의 문제들을 치열하게 고민했으며, 자신의 신념을 글로 표현하고 현실에서 구현하고자 노력한 실천적 지식인이었다는 점을 발견했다.

예를 들어 에세이집 《보통의 독자》 서문에서 울프는 비평가나 학자가 아닌,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지만 즐거움을 위해 책을 읽는 ‘보통의 독자’를 이야기한다. 이 ‘보통의 독자’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대학에 가지 못하고 공공 도서관에서 책을 읽었던 울프의 어린 시절을 떠오르게 한다. 울프는 과거 자신의 문제와 경험을 사회적으로 확장시켜 교육받을 기회를 박탈당한 노동자들에게 독서를 권장했으며, 개인 출판사를 만들어 책을 출판하고 공공 도서관에 공급하기도 했다. 한 발 더 나아가 울프는 이렇게 성장한 교양 있는 대중이 민주 사회를 만드는 데 꼭 필요하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누구보다 당대를 예리하게 분석하여 자신의 이론을 정립한 사상가 울프의 면모를 여실히 드러낸다. 이 외에 이 책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반제국주의자 울프, 반전주의자 울프, 문화비평가 울프는 놀랍고 다채롭다.

울프는 평생 읽고 쓰는 일을 강조했다. 그는 지독한 독서가이자 기록자였다. 이런 노력은 개인의 차원에 그치지 않았다.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교육받을 기회를 박탈당한 노동자들에게 독서를 권장했으며, 공공 도서관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탁월한 소설가인 동시에 날카로운 비평가이자 사상가였던 이런 울프의 면모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어쩌면 지금까지 세상은 울프를 전면적으로 오해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울프에 관한 책을 쓰겠다고 마음먹고 그동안 읽지 못했던 그의 에세이와 일기를 읽은 것은 또 다른 소득이다. 소설만 읽었을 때 뚜렷하지 않았던 울프의 모습이 에세이와 일기를 읽고 나자 선명하게 드러나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흑백 사진에 갇혀 있던 창백한 미학주의자가 사실은 뜨거운 심장으로 당대와 치열하게 부딪치면서 살아간 불굴의 활동가였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마치 울프가 곁에서 숨 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착각할 정도였다.     - ‘프롤로그’ 중에서(6쪽)

전쟁이라는 긴박한 상황에서 울프는 전문직 여성의 출현이라는 현실에 만족하지 않고 여성이 어떻게 이 폭력을 끝내고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주인공이 될 수 있을지 고민했다. 울프는 전문직이라는 직업 자체에 회의적이었다. 울프가 보기에 전문직은 부르주아 남성 중심주의가 만들어놓은 폐해였다. 울프가 구상한 더 자유로운 사회는 전문화가 없는 사회였다는 점에서 당시로 보나 지금으로 보나 놀랍도록 급진적인 전망이었다.

이런 사상가 울프를 손쉽게 모더니스트 작가로 이름 붙여서 책장에 꽂아버리는 것은 얼마나 게으른 일인가. 울프의 생각은 전문성의 문제가 인공지능과 같은 기계로 대체되고 있는 오늘날에 이르러 더욱 빛을 발한다.   - ‘《세 닢의 금화》, 자유를 위한 경제 조건’ 중에서(178~179쪽)

버지니아 울프가 가진 정치성의 절정은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지식인의 면모에서 확인할 수 있다. 최근 울프 문학에 관한 연구들이 이런 울프의 정치성에 집중한다. 울프의 문학을 탈정치적인 모더니즘으로 취급하던 경향에서 차츰 빅토리아 지식인 울프의 독자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동안 소홀하게 취급해온 울프의 면모를 들여다보면 그의 대표작을 다시 정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중략) 버지니아 울프의 반제국주의 사상은 초창기부터 모습을 드러내는데, 1915년에 출간한 첫 소설 《출항》부터 이미 영국 제국주의와 식민지 문제에 대한 묘사가 등장한다.      - ‘《출항》, 제국에 반대하다’ 중에서(233~2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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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울프는 가장 대표적인 페미니스트 작가로 거론되는 동시에, 가난한 이들의 현실에 무지한 중산층 엘리트 여성이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울프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온당치 못하다. 그녀는 자유를 위한 물적 토대의 필요성을 정확히 직시했다. 여성이 전문직에 종사하며 생계를 유지하고 독립성을 가져야 한다는 주장은 이런 맥락에서 나왔다. 그런데 울프의 주장은 여기서 머무르지 않는다. 울프는 여성이 자유롭게 전문직에 진출해야 하지만 그곳에 안주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 단지 남성처럼 대접받는 것이 아니라 남성이 만들어놓은 폭력적인 세계에 대항해야 한다는 의미다. 여성이 남성 위주의 사회 질서를 파괴하고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은 지금 생각해도 놀라울 정도로 급진적이다. 이렇듯 여성에 대한 차별이 극심했던 시대에 온몸으로 저항한 그녀의 사유는 지금의 영 페미니스트에게도 새로운 영감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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