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초에 글도 시원찮은데다 어줍잖은 생각을 글쓰기로 드러내려니 남루함 투성이다. 그나마 3,40대 때는 깊이야 그만두고라도 제법 긴 분량의 글을 쓰곤했지만 이마저도 쉽지 않다. 맘으로는 태평양 심해 보다 깊은 심오한 글을 쓰고싶지만 기껏 일기쓰듯 하루 일과를 끼적이는게 전부다. 사실 피상적인 견해 운운이나 글쓰기에서 비롯된 자괴감이란것도 글줄이라도 쓸때 말이지, 이도저도 아닌 허접글을 쓰는 내 경우엔 가당치 않다.
멋진 글, 심오한 글을 쓰지 못할바에 타인의 견해나 글을 경청하고, 감상하는 것도 효율적이겠다. 그래서 종종 타인의 글을 통째로 퍼나르거나 인용하곤 하는데, 뜻밖의 횡재랄까, 두툼한 책 보다 깊은 생각꺼리를 건져낼 때가 있다. 뭐 월척이 꼭 특정한 장소나 깊은 물에서만 가능한게 아닐터이니 수시로 이곳저곳 살피며 발품이라도 파는게 내 할일이지싶다. 아래 글은 오늘자(2019. 3. 21) 한겨레신문에 게재된 작가 손아람의 칼럼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일부 옮긴 내용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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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들은 밤하늘의 별을 관찰하다 우물에 빠졌다는 그리스 철학자 탈레스와 같은 사람들이다. 시선을 별에서 거두어 자기가 빠진 우물을 둘러보는 순간 자괴감이 엄습한다. 자의식이 예민한 만큼 우물은 심연처럼 깊어 보인다. 그래서 생각을 쓰는 일을 직업으로 삼은 사람들은 대개 크고 작은 우울함에 시달린다. 생각의 가치를 인정해주지 않는 사회와 시대를 탓할 수도 있지만, 거기서 멈춘다면 생각을 직업으로 삼기에는 한참 부족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부조리는 세상의 탓이지만 우울함은 오로지 생각하는 자들의 몫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조리 때문에 우울해하지 않는다. 저 멀리 치워두고 아무렇지 않게 앞으로 나아간다. 작가들은 생각을 쓰기에 우울한 것이 아니라, 부조리에 정서적으로 반응하는 잠재된 기질 때문에 생각을 쓰는 일을 택하게 된다고 나는 믿는다.
얼마 전 오랜만에 연락해온 지인을 만났다. 의사인 그는 병원을 정리하고 글을 쓰려 한다며 조언을 구했다. 자신의 일이 근본적인 만족감을 주지 못하고, 결심의 때를 놓치면 그 상황이 죽을 때까지 지속될까봐 두렵다고 했다. 나는 그의 경험 범위를 넘어서는 가난에 대해 경고했고, 그는 ‘한번 사는 삶’의 방식에 대한 그의 오랜 고민으로 대답했다. 가난은 감수할 만할 것 같다는 것이었다. 그때 문득 화석처럼 희미해진 기억이 되살아났다. 작가의 길을 고민하던 20대 시절이었다. 나는 내 생각이 경제적으로 무가치하다는 평가를 받게 될까봐 두려웠고, 생각을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만큼 갈증에 시달렸다.
이 의사의 결단은 매우 드문 것이지만 그가 도달한 고민은 흔한 것이다. 생각의 실용적 가치가 작아질수록, 생각의 용도가 줄어들수록, 생각에 대한 굶주림은 커진다. 그래서 작가를 직업으로 택하는 계기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기저에는 비슷한 동기가 있다. 직업에 대한 회의, 의무로 포화된 가족 계약의 해체, 대인기피증과 같은 음성적 언어소통의 장애, 성폭력 피해의 경험, 내가 끌리는 일을 내 마음대로 하며 살고 싶다는 이기심. 서로 다른 이유로 생각을 표현할 기회와 방법을 찾던 사람들이 한길에서 만난다. 전공 공부 때문에, 혹은 우연한 구직의 결과로 글을 쓰게 되었다는 사람은 한번도 만난 적이 없다. 생각이 많아서 고통받는 작가들이 고통에 대해 생각하다 작가가 된다는 사실은 흥미로운 딜레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