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방정인지 술이 문제인지 원~ 트럼펫 레슨 9개월째 벼르던 끝에 레슨 샘을 술자리에 모셨다. 오나가나 문제는 요놈의 주량인데 40대 한창 나이인 샘은 소주  세 병, 나는 스승님 기대 부응한답시고 한 병, 사단은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아다지오, 알레그로, 프레스토 순으로 술잔은 돌고 돌고 또 돌고, 급기야 취기가 화악~   


나의 큰소리가 시작됐다.


"샘~ 내 비록 아마추어지만 독주회를 기어이 열어야겠슴다. 이거 쉬운 일 아니겠죠? 아마 전국적으로도 뉴스꺼리일텐데 함 해봐야겠슴다. 꺼억~ " 


스승님은 어이가 없는지 "3년후에나 가능합니다!"  한 마디로 쐐기를 박았지만 눈치코치없는 제자는 "한다면 합니다. 저는 원래 그런 사람입니다." 큰소리 열변을 토했더니 감동때문인지 제자 사기진작 차원인지 스승께서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이때부터 스승과 제자는 뜬구름 같은 독주회를 앞두고 훔멜이 좋다. 아니다 하이든이다. 소품도 하나 넣어라 운운. 그러면서 소주 한 잔 또 꼴깍. 정말 문제는 이 지점부터였다. 


언젠가부터 샘은 은근히 내 트럼펫을 못마땅해하는 눈치였다. 하기사 10년이 넘은 낡은 악기인데다 구입할 당시도 중고였으니 그럴만 했다. 조 샘 뭐 꼭 악기가 나쁘다는게 아니라, 소리가 어째 시원하게 빠지질 않네요. 원래 실력있는 사람은 연장 탓 하지 않는다지만 그래도....아~ 누군 바꾸고 싶지 않을까. 하지만 한 달 레슨비조차 만만치 않은 이즈음은 아내 눈치보기가 민망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악기를 바꾸라니!  


술잔이 몇 순배 더 돌자 발동이 제대로 걸렸다. 제자의 호기어린 큰 소리는 계속되었으니. 저 오늘 기분 아주 좋슴다. 술맛 좋고 샘 모시고 정말 좋슴다. 어쩌고 저쩌고~ 그러다 해서는 안 될 말을 기어이 하고 말았다. 


그동안 망설이던 중고악기 내던지고 새악기 구입하겠노라. 것도 직업연주자조차 꺼린다는 유럽형 로터리 트럼펫을 구입하겠노라. 비록 고가이고 다루기도 힘들지만 기왕할바에 악기라도 폼나야 하지 않겠냐. 그러자 샘은 제자가 기특했는지 "암만요. 그래야지요. 조샘 대단대단 합니다. 모험심 열정 모두 대단합니다. 파이팅!" 그러고는 또 소주 한 잔 꼴깍.


은파호수 모퉁이 족발집. 겨울밤 호수 위로 별빛은 찬란하고, 휘청휘청 걸으며 늦은밤 기분좋게 헤어지고... 이틑날 새벽 간밤 술자리를 떠올리니 한숨부터 나왔다. 아~ 큰일났다. 독주회는 무신 독주회. 이게 무슨 자다 봉창 뜯는 소리란 말인가. 700만원을 호가하는 로터리 트럼펫을 사겠다고? 로터리는커녕 300짜리 바하도 못 사면서? 게다가 당장 아내한테 10만원도 못 타내는 실정 아닌가. 하지만 스승님께 큰소리 쳤으니 이미 엎지러진 물이다. 


그나저나 독주회는 어떻게 해야하나? 이 걱정 저 걱정으로 잠은 달아나고. 에라, 독주회는 나중 일이니 우선 트럼펫부터 바꾸자. 아침 준비하는 아내에게 슬며시 "저기 레슨 샘께서 트럼펫 바꾸라 하더라고. 실력은 좋은데 악기가 안 좋아서 코맹냉이 소리가 난대" 어쩌고 저쩌고....


그러자 아내 왈. "시끄러워욧! 시방 때가 어느땐데, 우리 집 살림살이가 얼마나 어려운데, 심판도 모르고 당신 제 정신이우? 당장 레슨부터 그만둬욧! " 쌩 날벼락을 맞고 한 마디 말도 못하고 속으로만 웅얼웅얼~ 아 독주회 말은 아직 꺼내지도 못했는데, 담주 레슨 샘 어떻게 만나지. 로터리 가격 알아봐 달라고 했는데, 나는 한번 한다고 하면 하는 사람이라고 큰소리 쳤는데, 아내는 내 손에 꽉 잡혀있고, 남편 하라는대로 하는 여자라고 했는데. 아~ 나는 이제 죽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우연히 TV에서 본 장면. 햇빛에 그을린 구리빛 얼굴, 건강한 풍채의 중년 남자다. 그는 인적이 없는 깊은 산 속에 홀로 사는데, 가족들이 따로 있는지는 모르겠다.

 

매일같이 주변 돌을 주어다 돌탑을 쌓는 일이 그의 일과다. 탑의 크기는 일정하지 않고, 대략 2미터 높이에 서너 사람이 둘러설 정도의 제법 큰 규모에서부터 작은 것은 사람키만한 것도 있다.

 

 

산 속의 돌탑 마을이라고나할까, 10여년째 쌓고 있다는데 족히 100여개나 되는 크고작은 돌탑이 장관을 이뤘다. 주변에 워낙 돌이 흔한 곳이라 아무 곳에서 적당한 크기의 돌을 주어다 쌓으면 된다. 돌틈바구니를 작은 돌로 채우는정도가 기술이라면 기술인 단순한 일이고, 그저 쉬지않고 부지런히 쌓는것만이 특별하게 보일따름이다

 

그는 기자가 인터뷰하는 순간조차 얼른 돌을 쌓아야할것처럼 조바심을 쳤다. 그는 아침 기상을 하는순간부터 해가질때까지 오로지 돌을 찾아다니다 적당한 돌을 발견하면 반색을 하고 옮겨온다. 그렇게 하루종일 돌을 쌓은 후 해가지면 집에 돌아와 간단한 식사를 하고 하루 일과를 끝낸다.

 

대체 그는 왜 쉬지않고 돌을 쌓을까. 언제까지 몇 개나 더 쌓을 계획인지, 그렇게 쌓아서 어떻게 하겠다는건지 궁금했다. 하지만 그의 대답은 의외로 단순했다. 단지 돌쌓기가 재미있을뿐 달리 이유가 없다는 것. 기약도 없었다. 앞으로 몇 개를 쌓을지 별다른 계획도 없고 그냥 쌓을뿐이다. 아마 죽을 때까지 돌탑을 쌓을 것이다.

 

, 사람이 뭔가 굳게 결심 하고 온정성을 다하면 엄청난 결과를 낳을 수 있겠구나. 한 평생 뜨거운 열정으로 진지하게 한 일이 때로 지극히 무의미하고 어리석은 일이 될수도 있겠구나.


2

슬픔이 내게 가르친 유일한 것은 인간의 슬픔이란 얼마나 천박한 것인가 하는 점이다. 슬픔 역시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표면에서 배회할 뿐 결코 실재 속으로 우리를 인도해주지 않는다. 아들과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값비싼 대가를 치르더라도 실재와의 접촉은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 내 아들의 죽음으로 나는 아름다운 소유지를 잃은 것 같았다. - 그러나 그뿐이었다. 나는 그 죽음을 나에게 좀더 가까이 다가오게 할 수 없었다. (...)나는 슬픔이 나에게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고, 나를 단 한 발자국도 더 참된 자연 속으로 데려다 주지 않는 것이 슬프다.

 

(...)나는 우리가 가장 세게 움켜쥐더라도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가버리는 사물의 덧없는 사라짐과 미끄러짐이 우리 삶의 조건 중 가장 아름답지 못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 에머슨 <자연>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 오늘 아침 <한 줄 메모>란에 글을 올렸다가 이것을 좀 발전시켜봤습니다. 늘 뭔가 글을 써야한다는 강박관념이 있는데, 워낙에 필력이 딸리다보니 단문 하나 쓰기도 참 벅찬 요즘입니다. - 그런점에서 쉼없이 왕성하게 글을 쓰시는 소설강님이 부럽게 보일따름이지요- <하이데거, 혁명>은 궁여지책으로 쓴 단문입니다만, 이조차 쓸수 있게된건 모름지기 <황톳길> 덕분이고, 장차 멤버 여러분은 글쓰기의 큰 힘이자 원천이 되리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1

아침 7시 기상하면 독서실 오픈 전에 조간부터 먼저 읽습니다. 대충 헤드라인을 훑고 중요 기사는 사무실에 내려가서 읽습니다만 오늘 아침은 한겨레신문 별지<책과 생각>부터 살폈습니다. 두 쪽짜리 <책과 생각>은 일종의 북가이드인셈인데 뤼디거 자프란스키의 <하이데거>( 박민수 옮김/북캠퍼스)와 프랑스 대혁명기 백과전서파의 일원인 디드로가 편집한 <백과전서> 도판집(전 5권, 정은주 옮기고 엮음/프로파간다)이 눈길을 끄는군요.

 

두 가지 모두 책값은 두툼한 분량에 걸맞게 권 당 3만원이라는 거액인데, 맘 같아서야 당장 읽고싶지만 지금의 지적욕구와 열정으로 완독이 가능할지, 과연 아내로부터 책값을 타낼 수 있을지 염려가 됩니다. 맘에 드는 책을 놓고 구입을 망설이다니! 예전 같으면 상상도 할수 없건만 활화산 같은 열정이라도 나이는 어쩔수 없나봅니다 .

 

                       

                 

1

"혁명이 일어나려면 먼저 사람들 머리 속에서 혁명이 일어나야 한다. 프랑스 혁명사 연구자 알베르 마티에(1874~1932)는 “혁명은, 사상의 영역에서는 이미 18세기 중반 이후부터 일어났다”고 했단다. 18세기는 ‘계몽의 세기’였다. 마티에가 얘기한 사상 혁명은 바로 그것을 두고 한 얘기일 것이다."

 

나에게 '혁명'과 '철학'은 시의에 관계없이 항상 관심이 끌리는 주제 중 하나입니다. 특히 정치, 사회적 격변기인 요즘의 우리 상황이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역사적으로 혁명은 1789년 프랑스대혁명, 1917년 러시아볼세비키 혁명 등을 대표적인 혁명으로 꼽을 수 있지만 21세기 우리 땅에서 벌어지는 '촛불혁명'은 역사적으로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평화혁명이자 축제적 혁명이기에 더욱 자랑스럽고, 나아가 '혁명'이라는 주제에 관심이 갈 수밖에 없습니다. 짐작컨대 장차 '촛불혁명'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되거나, 우리가 개발한 최상의 문화상품으로 해외에 수출되지 않을까 생각될 정도입니다.  

 

여하튼 '촛불혁명'과 같은 명예혁명이든, 볼쉐비키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든 아니면 혁명의 교과서이자 고전인 프랑스 대혁명이든 모든 혁명은 "사람들 머리속에서 먼저 혁명이 일어나야" 할것입니다. 그래야 그것이 확고하고, 결과적으로 성공할 수 있을테니까요. 만약 일시적 포퓰리즘에 기댄 선동의 결과물이거나 감정의 산물이라면 기껏해야 단발성 이벤트으로 그치고 말겠지요. 하지만 분명한것은 요즘의 촛불혁명은 밑바닥 대중의 민심으로부터 시작해서 먹물 지식인들, 나아가 보수 진보할 것없이 대부분의 국민 모두가 총체적으로 공감하는 명실상부한 혁명이기에  백프로 성공하리라 확신합니다.

 

2

"하이데거는 20세기의 사상가들 중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사상가 중의 하나다. 20세기의 거의 모든 철학사조, 현상학과 실존철학, 비판이론, 철학적 해석학, 포스트모더니즘과 후기구조주의 등이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았다. 하이데거의 영향은 비단 철학에 그치지 않고 문학과 문예비평, 심리학, 신학, 생태학, 심지어 건축학에까지 미치고 있다.

 

하이데거는 이렇게 엄청난 영향력을 갖는 사상가임에도 불구하고 하이데거만큼 많은 논란이 되고 있는 사상가도 없다. 이러한 논란은 주로 하이데거 철학의 난해함과 그의 나치 참여 경력 때문에 빚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이데거는 예를 들어 ‘존재의 진리’라는 말처럼 심오한 듯하지만 그 의미를 쉽게 파악하기 힘든 언어로 자신의 철학을 전개하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개인적으로 문학비평과 신학에 관심이 많은터라 두 분야에 직접적 관련이 있는 해석학은 눈길이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점에서 독일철학자 하이데거의 철학은 평소 관심이야 많지만 저와 같은 아마추어로서는 도저히 접근히 힘든 철학자입니다. 하이데거뿐 아니라 대체적으로 독일철학이 그런 편인데 칸트, 헤겔 역시 난해하기는 마찬가지여서 아마 내 평생 이런 철학자의 원전은 단 한 권 이해하지 못하고 죽지 않을까 아쉽습니다. 

 

그렇다면 원전을 읽을 수 없는바에야 차선책으로 해설서나 평전을 이용할 수밖에 없는데 때로 해설서가 원전보다 더 어려운것이 철학서가 아닐까 우스개 생각이 들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으니 다시 해설서를 붙잡는 악순환이 반복되는군요. 뭐 이깟거야 독학자, 아마추어의 한계이자 비애일테니 감수하면 될테고, 다만 식지 않는 도도한 지적열정, 욕구만 사라지지 않는다면 반드시 해결책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평생 모토인 무댓포 정신으루다가 막고 품는 수밖에 없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흔히 박태원 소설에 따라붙는 '세태소설'이라는 말은 그의 문학을 좀 폄하하는 말이다. 세태소설이란 말 그대로 인물들이 처한 그 시대, 세태의 표면을 그냥 스케치하는 정도다, 라는 평가니까. 하지만 이것은 일부의 평가일뿐이며 여전히 <천변풍경>은 우리문학사에서 훌륭한 작품으로 손꼽힌다. 

뚜르게네프의 <사냥꾼의 수기>의 미덕은 사냥꾼이 경험하는 숲, 혹은 외딴 시골의 일상을 관찰하듯 스케치 하면서 강력한 주제의식이 깔린다는 점이다. 스토리가 전개되는 공간이 설령 초원지대든 깊은 산 속이든 아니면 노동하는 일터든 결국은 삶의 현장이라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문제는 여기서 벌어지는 이야기, 혹은 에피소드 속에 강력한 주제의식, 플롯을 끼어넣을 수만 있다면 훌륭한 문학작품으로 탈바꿈 될것이다. 

가령 광활한 스탭지역을 태풍이 휘몰아치듯 말 타고 달리는 몽골인의 기상은 인간의 모습 속에서 원초적인 자연과 강력한 파우어를 간직한 조상 대대로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의 노동현장에서 만나는 몽골인의 후예들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천민자본주의적 실상에 내동댕이쳐진 신세다. 그런 몽골인의 모습은 바로 우리의 모습이기도한데, 이들이 처한 삶의 비애를 냉정하게, 아이러니 형식으로 묘사해낸다면 어떨까. 

C씨의 글 <노변정담>은 굳이 필자를 밝히지 않아도 글쓴이가 누구인지 어렵지않게 짐작할수 있다. C씨의 글은 어떤 장르든 대개는 따스한 휴머니즘이 짙게 깔린다는 점인데 <노변정담>도 예외가 아니다. 문제는 어떤 글이 휴머니즘의 자장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특히 문학작품일 경우 장점이자 반대로 단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

 

삶의 현장이 그렇듯, 소설의 장 역시 작가의 치열한 대결의식이 펼쳐지는 장이고, 이런 점에서 휴머니즘은 자칫 삶의 곡절, 변화무쌍함, 배리, 위선, 이중성 등등을 밝혀내는데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참고로 여기서 휴머니즘이라는 지적은 휴머니즘 그 자체가 문제라는 뜻이 아니고, 대체적으로 C씨의 글 속에 휴머니즘이 공통적으로 깔린다는 의미이다. 짐작컨대 본래 C씨의 심성이 모질지 못한 착한 심성, 따스한 마음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짐작해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1

우리는 물건을 구입할 때 흔히 실용성과 외양, 가격사이에서 갈등하곤한다. 가령 옷이나 가구, 악세서리 등을 구입할 때 실용성보다는 외양이나 때깔이 그럴듯해서 구입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대체로 가격이나 실용성 위주로 따지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책을 살때는 어떨까.

 

일단 책은 사기 전에 구입 목적이 확실해서 망설일 이유가 별로 없다. 가령 문학서만하더라도 우선 어떤 작품, 작가인가, 번역자가 누구인지, 출판사, 가격 등이 문제일뿐이지 옷이나 악세서리처럼 외양이나 장정은 구입결정에 큰 요소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2

엊그제 나운동 한길문고에 들렀다. 을유문화사에서 출간된 <장자>를 구입할까했지만 막상 펼쳐드니 읽어내기가 만만치 않을 것 같다. 이곳저곳 둘러보다 문학코너에 발길에 멈췄다. 순간 일본 소설가인 나쓰메 소세키의 전집이 눈에 들어왔다. 작가도 작가지만 예쁜 장정이 특별했다. 전부 14권으로 된 전집 중 1<나는 고양이로소이다>2<도련님>을 우선 구입하기로 했다.

            

전집 중 <한눈팔기>은 문학동네판, <행인>은 문학과지성사판으로 이미 구입했으니 나머지 10여권만 더 구입하면 전집을 모두 채울수 있을텐데, 아내의 눈초리가 각별히 매서워진 요즘 같아서는 아마 상당한 시간이 걸려야 할 것같다.

 

3

요즘은 출판사들이 장정에 많은 신경을 쓰느라 전문적인 북디자이너가 따로 있을정도다. 그래서 그런지 내용못지않게 아름다운 책들이 많다. 가령 민음사에서 출간된 이탈리아 소설가 이탈로 칼비노 전집이라든가, 같은 출판사에서 펴낸 마르셀 프루스트의 전집은 어데 내놔도 손색이 없는 아름다운 장정을 뽐낸다

                  

                                       

 

나쓰메 소세키 전집은 보다시피 은근한 쥐색이나 푸른 바탕에 국판 보다 약간 작은 판형이어서 보기에 앙증맞을뿐 아니라 제법 품격까지 있어보였다. 특히 책 제제가 눈길을 끄는데, 마치 일본서적과 도 흡사했다. 일본인들은 내용도 내용이지만 매사 외양을 중시하기 때문에 우선 겉모양을 요모저모 아름답고 섬세하게 꾸민다. 장정을 말하다보니 떠오른 추억이 하나 있는데, 학교 실습선에 승선하던 시절, 동인천 어느 서점에서 문학과지성사에서 발간한 불문학자 김붕구 선생의 <보들레르>연구서도 장정이 아름다워 구입한 경우다.

 

 

                                 

 

4

한동안 고전과 철학서에 몰두하느라 머리가 지끈거렸다. 머리를 좀 식힐까. 이럴때는 문학작품이 제격이다. 궁리 끝에 스탕달의 <적과 흑>, 에머슨의 에세이 <자연>을 꺼내들었다. 예상했던대로 일단 재미가 있었다. 이미 자타가 공인한 터지만, 스탕달은 워낙에 스토리를 풀어가는 이야기꾼으로서의 솜씨가 기막힌 소설가다. 어데 스탕달뿐일까. 리얼리즘이 풍미했던 19세기 프랑스 소설 거의가 아마 이럴 것이다.

 

무려 200년전에 출간된 소설 <적과 흑>은 플로오벨의 <마담 보바리>가 그렇듯 표면상 남녀의 불륜담을 취하는지라 읽는 재미가 자별할 수밖에 없다. 하기야 동서고금 남녀의 불륜담처럼 재밌는 소재가 또 어데있을까.

 

시장 부인이자 연상인 레날 부인과 갓 스무살 청년 쥘리앵 소렐의 밀고땡기는 연애담은 제아무리 하드코어 포르노가 난무하는 시대라해도 훨 재미가 있다. 굳이 비교하자면 몇 달전 읽은 박범신의 <은교>나 이와이 슌지의 <러브 레터>보다 재밌으면 재밌지 덜하지 않을 것이다.

 

원래 프랑스 소설이나 러시아 소설의 연애담은 오늘날의 싯점에서 보면 좀 진부하달까, 특유의 감상적인 장면이 등장하곤 하는데, 거야 시대를 감안하면 크게 험은 아닐 것이다.

 

장정이 아름다워 구입한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는 채만식의 <탁류>가 그렇듯 풍자적인 데다가 가벼운 마음으로 즐길수 있다. 메이지 시대의 지식인들의 위선이랄까. 작가의 분신이기도 한 주인공 지식인과 화자인 고양이가 나누는 수작이 자못 웃음 짓게 한다.

 

한낮 햇볕은 찬란한데 바람끝은 여전히 매섭다. 움츠러든 겨울, 한동<적과 흑>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자연>을 교대로 읽으며 봄을 기다려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