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 글은 9년전 작고한 우리지방 출신 소설가 문찬미씨가 남긴 일기 중 일부다.

2000년 1월 11일 화요일 맑음

마르셀 프루스트의<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5권까지를 몇 일 동안 완독하였다. 속 게르망트 쪽 6권을 읽다 말고 도서관을 나왔다. 서고 폐관 시간인 5시를 알리는 삐이하는 금속음이 울렸기 때문이다. 마르셀 프루스트에 대한 경탄을 채 눈으로 느끼기도 전에 나는 지방 국립대의 간판을 달고 있는 이 학교의 우습지도 않은 도서행정에 대해 몸서리를 치지 않을 수 없었다.(..)

2000년 2월 12일 토요일 맑음.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한국어 번역판 10권 째를 읽었다. 아직 마지막 편인 11권 째가 남았지만 벌써 가슴을 죄어드는 그 벅찬 감동을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다. 문장 하나 하나가 그대로 뇌리에 아름다운 피아노의 선율, 혹은 맑은 밤하늘의 투명하고 깨끗한, 청명한 푸른빛을 토하는 뭇 별들과도 같은 인상으로 투입해 들어온다. 오래 전부터 꿈꾸어온 작가에 대한 강한 집착을 내 안에 남겨 주었다. 신춘문예의 실패로 좀 의기소침해 있긴 하지만 그러나 나는 희망한다. 이 순간 이후 정말 글쓰기에 전념하게되기를. 프루스트는 여지껏 내가 만나 본 작가 중 -물론 저작으로 말이지만- 가장 인상적인 사람이 되었다. 그의 글을 늦게나마 접하게 된 행운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2002년 2월 16일 토요일 맑음

오랜만에 나의 문학서재에 들러 보았다. 처음 개설했을 때의 설렘과 긴장은 이미 퇴물이 되어 있었다. 기나긴 불면이 나를 지치게 했고, 우울함은 늘 외딴섬에 혼자 누워 있는 자신을 상상케 할뿐이었다. 게다가 봄이 다가오고 있는 것도 잊고 있었다. 그것은 예전과는 많이 둔화된 내 모습을 절실히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그토록 좋아하는 글쓰기도 그 열정이 꽤나 식어, 이제는 말라버린 풀기처럼 그 열기를 잠재우고만 있다.

마침 토요일 오후의 한가한 기운이 나를 컴 앞으로 이끌어갔다. 들창으로 비쳐 들어오는 호박색 햇살이 무지무늬의 유리창에 그 빛을 뭉게뭉게 뭉뚱그리고 있었다. 모네의 투박한 붓터치가 들창으로부터 번져 나오는 듯 한 느낌을 얻고서야 나는 간신히 봄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때, 나는 조율연 선생님의 글을 발견했다.(<연재코너> '군산의 작가들'중 26회)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외람 되지만 선생님의 글에 노코멘트로 일관하고 싶다. 선생님의 글을 존중하고 싶어서다. 게다가 자기 작품을 가지고 스스로 왈가왈부하는 촌극을 벌이는 것도 우스운 일일뿐이다. 여러모로 준비를 많이 하시고 좋은 평을 해 주신 선생님께 가슴 속 깊은 곳에 내재한, 진실한 감사를 드리고 싶다.

속물적이고 세속적인 스완가를 향한 마르셀 프루스트의 집요한 몽상이 한 낮의 꿈처럼 내 몸에 감기는 한 순간이다. 어린 시절의 현실과 꿈이란 또한 그 경계가 모호하고, 몽상과 허구로 뒤범벅이 되어 늘 손에 잡히지 않는 신기루처럼, 그것에 다가갈수록 멀어지는 아지랑이 같은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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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대담

- 김우창(영문학자, 문학비평가)

교수님은 프루스트를 성공적인 자아창조의 모범사례로 생각하는 것같습니다. 아름다운 예술 작품을 창조하는 것이 아름다운 인생을 창조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을까요. 프루스트는 소설을 잘 쓰긴 했지만 인간적으로는 비난받을 만한 인물이 아닙니까.

- 리처드 로티(철학자)

저는 프루스트가 훌륭한 자아창조를 해 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삶을 사느냐 하는 것은 선택의 문제입니다. 어떤 화가는 그림때문에 삶 전체가 정당화되기도 합니다. 만일 저에게 일상적이지만 반듯한 삶과 창조적이지만 인간적으로 비난받을 수 있는 삶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라면, 아마 후자를 선택할 겁니다.

2. 모든 시작은 끝의 시작이다

"시작과 끝의 관계에 있어서 가장 의미심장한 현대소설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이다. 이 소설은 ‘잃어버린 시간’(문제의 제기)에서 시작하여 ‘되찾은 시간’(문제에 대한 응답)으로 끝난다. ‘오랫 동안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곤했다’에서 시작한 3,000여 페이지, 전 15권의 이 숨가쁜 소설은 인간이 ‘시간 속에’ 엄청난 자리를 동시에 차지하는, 그리하여 마침내 ‘순수한 시간’을 되찾는 작품을 쓰겠다는 주인공의 결심으로 끝맺는다. ‘시간(Longtemps)’으로 시작한 소설이 ‘시간(dans le Temps)’으로 끝날 때 ‘주인공’은 마침내 ‘나레이터’, 즉 작가가 되어 소설의 시작, 그 첫 줄로 되돌아간다. 끝이 시작과 맞물려 원을 이루면서, 흘러가는 ‘시간’은 예술이라는 하나의 전체, 즉 흘러가버리지 않는 ‘공간’으로 완성되었다. 사실 프루스트는 이 끝을 시작보다 먼저 썼다. 끝이 시작을 낳은 것이다. 소설이 인생살이와 다른 점이 여기 있다." - 김화영(고려대 교수, 불문학)

3.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와 프루스트

프루스트를 생각해 보라: "교회의 탑들은 저렇게 멀리 보인다. 그리고 마치 우리들이 조금밖에 다가가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우리들이 곧바로 마르탱빌르의 교회 앞에 멈추었을 때 나는 무척 놀랐었다. 나는 교회의 탑들을 지평선상에서 바라보는 것이 어째서 나를 행복하게 했는지를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캐보려는 강박관념이 나를 괴롭히며 억누르고 있었다; 나는 마차가 움직임에 따라 위치가 바뀌어지는 교회 첨탑들이 그리는 선에 대한 나의 화상들을 머리속에 간직하고 싶어했으며 그 순간 더 이상 그 이유에 대해서 생각하고 싶지 않았었다.

나를 즐겁게 해주는 말들이 떠올랐기 때문에 마르탱빌 교회의 첨탑들 뒤에 숨겨진 것들은 하나의 성공적으로 표현된 문장으로 대치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스스로 다짐하지 않은 채 나는 의사에게 연필과 종이를 요청했고, 마차의 흔들림에도 불구하고 으식의 중압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그리고 감격한 나머지 다음과 같은 짧은 산문을 썼다.

나는 결코 이 몇 줄의 문장들을 돌이켜 생각하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의사의 마부가 평소에 마르탱빌의 시장에서 산 닭을 바구니에 담아 놓아두던 마부자리의 한 구석에서 글쓰기를 끝냈던 그 당시의 그 순간에 나는 이 몇 줄의 글이 나를 어찌나 완벽하게 교회 첨탑들과 그 뒤에 숨겨진 것들로부터 해방시켜 줄 수 있었던지 나는 마치 나 자신이 알을 낳은 한 마리의 닭인 양, 날카로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나에게도 이와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 여러 해 동안 나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고 나를 차분하게 놓아두지 않았던 나의 어린 시절의 몇몇 장면들이 불현듯 사라져 버린 것이다. 우리가 오랫동안 살았고, 여러 해 동안 내가 규칙적으로 꿈꾸어 왔던 나의 옛 집이 나의 꿈속에서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 것이었다. -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봉인된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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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페 뤼미에르

 

 

1
문학평론가 정홍수의 평론집 <흔들리는 사이 언뜻 보이는 푸른빛>(2014, 문학동네) 서문에는 대만 출신 감독인 허우 샤오시엔의 <카페 뤼미에르>(2003년)가 꽤 길게 언급된다. 흔히 비평집 서문은 저자가 책을 펴낸 동기나 소감 따위를 서술하기 마련인데, 뜬금없이 웬 영화를 길게 소개하지? 하면서도 워낙 영화를 좋아하기에 자못 흥미가 일었다.

“철교 아래로, 누군가 토해낸 듯 문득 터널을 빠져나와 다시 시간의 저편으로 사라지는 전철의 흐름을 보고 있노라면 거기 세상의 비의 한 자락이 잠시 그렇게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 같지 않던가. 그 흐르고 흐르는 풍경은 대도시 교통의 질서가 빚어낸 한갓 우연일테지만 왠지 살아간다는 것은 그와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막막한 목맴을 주지않던가.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난 거기 다리 위에 서보긴커녕 오차노미즈 역에도 가본 적이 없지 않은가. 허우 샤오시엔의 영화 <카페 뤼미에르>는 그렇게 실제보다 먼저 어떤 공간의 풍경을 내 마음속에 완성해놓고 있었다.” 정홍수 <흔들리는 .....> 서문

나는 이글을 읽을 당시 아쉽게도 <카페 뤼미에르>를 보지 못했기에 대략 짐작만으로 서문을 이해해야했다. 그런데 저자는 왜 본문도 아닌 서문에 허우 샤오시엔의 영화를 언급했을까. 짐작하건대, 비평집에 실린 글들은 딱딱한 이론과 분석에 앞서 시인, 소설가와 마찬가지로 예술적 상상력에 의한 결과물이고, 비록 창작품의 예술적 공간이 비현실적인 상상력의 소산에 불과하지만 그것은 결국 실제하는 현실과 다를바 없다, 고 여긴다. 그리고 그런 감동을 글로 써낸다는 뜻에서 허우 샤오시엔의 영화를 서문 속에 끌어들인다.

커피, 영화라면 자다가도 벌떡깨는 나인지라 갑자기 허우 샤오시엔의 영화가 보고싶어졌다. <카페 뤼미에르>를 감상했다. 과거 <비정성시>를 통해 예술파 감독인지는 알았으나 뒤늦게 다시 보게된거다. 두 번을 반복해서 본후에야 이해할 수 있었다. 오즈 야스지로 탄생 100주년을 기념한 영화인지라 오즈에 대한 오마주인지는 알았지만 일명 다다미쇼트를 빼고는 어떤 점이 오즈 스타일일지 알 수 없었다. 건 그렇고 우선 <카페 뤼미에르>부터 언급하기로 하자.

2
줄거리는 비교적 단순하다. 작가인 요코는 대략 20대 중반의 여성으로 대만여행에서 막 돌아왔다. 그녀는 타카자키에 사는 부모님을 찾아가 임신 사실을 알리고 며칠을 한가로이 보낸 후 다시 동경으로 돌아온다. 아이의 아버지인 대만의 남자친구와는 결혼할 생각이 없고 그냥 미혼모가 되겠다는 요코에게 부모는 당황스럽다.

한편 서점을 운영하는 하지메는 요코와 절친한 친구다. 하지메는 시간이 날 때마다 갖가지 전철 주변의 소음을 녹음하는게 취미인데 요코는 그를 위해 대만에서 사온 옛날 철도운전사의 회중시계를 선물한다. 그들은 대만 출신의 일본 음악가 장웬예에 대해 함께 조사하고 그가 자주 찾던 동경의 옛 장소를 찾아다닌다. 취재 중 현기증을 느낀 요코는 하지메에게 임신 사실을 털어놓지만 결국 자신의 마음을 전하지 못하고 조용히 지켜볼 뿐이다. 부모님의 걱정 속에 불안한 요코는 하지메의 조용하고 사려깊은 배려에 따뜻함을 느낀다./ 작성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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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우연히 흥미있는 영화관련 기사를 읽었다.‘오마이뉴스’ 김형욱 기자가 쓴 짐 자무시의 2017년도 작품 <패터슨>에 대한 글이었다. <패터슨>은 버스 운전기사가 직업인 아마추어 시인의 이야기다. 그의 아내 역시 아마추어 예술가인데, 그림도 그리고 기타를 치는 평범한 주부이다.

아마추어 예술가는 생활이 우선되기 때문에 급한 일이 생기면 시고 미술이고간에 우선 목전의 급한 일부터 해결해야한다. 그런 후 한가할 때 다시 예술활동을 한다. 그러니까 첫째는 먹고사는 생활이고 예술활동은 부차적이라는 말이 되겠다. 아마추어 시인, 소설가, 화가, 사진가 등등 뭐 우리 주변 어데서고 흔히 볼 수 있는 사람들 아닌가?

패터슨 부부의 일상 역시 우리의 평범한 일상과 하등 다를바 없다. 밥먹고 출근해서 버스 운전하고, 운전하는 틈틈이 시상에 잠기거나 남의 이야기를 듣곤한다. 그러고 다시 퇴근해서 아내와 함께 외출도 하고, 짬이 나면 술도 한 잔 마시고 뭐 그런 식이다. 그러니 이들의 생활이 전혀 특별할게 없다.

나의 하루는 어떠한가. 7시쯤 세수하고 아내가 준비한 고시텔생들 식사를 식당으로 나른다. 8시30분쯤 식당의 밥통과 국통을 들고 집으로 온다. 그런후 아내와 식사를 하고 함께 커피를 마신다. 커피 한 잔하면서 이런얘기 저런얘기를 좀 나누다 9시쯤이면 독서실 사무실로 간다. 오전 근무가 시작된다. 뭐 근무라고해봐야 여기저기 청소 좀 하고, 독서실 둘러보는정도다. 그러다 점심때가 되면 다시 국통 밥통 식당으로 나르고, 아들과 교대한다. 오후는 낮잠, 트럼펫 연습 잠깐 하고나면 오후 6시가 된다. 아들과 교대하고 저녁근무가 시작된다. 도중에 저녁식사하고 다시 사무실 근무, 11시쯤에 교대하고 집으로와서 세수하고 테레비 보다가 12시쯤 잠이든다.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한 달 후도 전혀 달라지지 않을 것 같은 반복된 생활패턴이다. 시시하기 짝이없는, 누구나 할법한 평범한 생활의 연속아닌가? 다만 하나 남들과 다른게 있다면 나는 사무실에 있을때나 집에 있을때나 어김없이 책을 손에 들고 있고, 언제든 글쓰기를 하려고 한다. 내가 읽는 책은 대부분 소설류인데, 머릿속은 하루종일 작품속 등장인물이 맴돈다. 다음은 어떤 책을 읽지? 또 다음은.....식으로 생각한다. 와중에 하루 한 번 반드시 트럼펫 연습을 한다. 오케스트라 활동을 하려면 단 하루도 연습을 거르면 안 된다.                                                    

 

그러니까 나는 하루종일 일상은 일상대로 치루면서 다른 한 편으로 문학과 음악, 영화를 생각한다. 어찌생각하면 현실보다 예술을 생각하는 시간이 더 많은것 같다. 엊그제 아내에게 그랬다. 나는 몸이 하나지만 정확히 두 개로 분리되어있는 것 같아. 하나는 현실, 하나는 예술. 그래서 양쪽을 보면서 생활을 하는데, 일상을 하는 순간순간에도 어김없이 문학과 영화, 음악을 한시도 잊은적 없거든.

나는 아직 이 영화를 안 봤으니 지금부터는 ‘오마이뉴스’ 기자의 글 <일상이 예술로, 짐 자무쉬 감독만 줄 수 있는 특별함>으로 대신하겠다.

“패터슨도 다를 바 없겠지만 그에겐 '시'가 있다. 하루 일과의 순간순간, 행간과 자간을 촘촘히 잇는 시상이 그의 하루를 풍성하게 한다, 특별하게 한다. 그가 갖고 있는 모든 것, 그가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이 시가 되기에 그 특별함은 다시 평범함으로 치환된다. 삶이 예술이 되는 순간이다.

나에게도 패터슨의 시와 같은 게 있다. 책과 영화, 내 평범한 삶을 특별하게 해주는 것들이다. 그것들 또한 어느새 내 삶의 패턴 안에 자리잡아 평범함의 하나가 되었지만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특별할 것이다. 패터슨도 그러할 테고, 영화에서 패터슨이 존경하는 시인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도 그러했을 테다. 그는 평생 의사로 일하면서 역시 평생 시를 썼다.

버스 운전기사가 시를 쓴다는 설정이지만 너무나 현실적인 이 영화에서도 영화적인 부분이 있다. 심지어 패터슨이 존경하는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가 상징주의를 배제한 객관주의로 명성을 떨친 와중에도 말이다. 패터슨이라는 캐릭터를 조금만 더 뜯어보면 '시인'이 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는 눈을 뜨는 그 순간부터 정확히 정해진 대로의 하루를 살아간다. 전날 아내가 챙겨둔 옷을 입고, 매일 똑같은 아침을 먹고, 산책길 같은 출근길을 걸어가며, 완벽히 정해진 행선지를 돌고 돌며, 아내가 챙겨준 도시락으로 점심을 먹고, 다시 산책길 같은 퇴근길을 걸어오고, 아내와 얘기하는 시간을 갖고, 반려견과 저녁 산책을 나가고, 바에 가서 하루를 마무리하는 맥주를 마신다.

거기에 루틴 안에서 생각할 어떠한 거리도 없다. 그의 몸은 정해진 대로 움직이며 그의 정신은 모두 '시'로 향해 있는 것이다. 특히 그는 버스를 운전하며 눈으로는 매순간 똑같은 듯하지만 완전히 다른 풍경을 보고, 귀로는 그가 천착하는 일상의 언어로 된 대화들을 들을 수 있다.

패터슨과 로라가 보여주는 아마추어 예술가로의 일상성이 우리에게 힘을 주고 격려와 함께 위로를 보내는 것 같다. 비록 패터슨의 하루가 최적의 조건으로 꽉 짜여 있다고 해도, 우리 손에는 그런 조건이 쥐어지지 않는다 해도, 예술은 일상과 함께 하는 것이기에 일상에서 비롯되는 것이기에 누구도 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패터슨>을 보며 삶이 언제, 어떻게 예술이 되는지 알기란 어렵지 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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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 감독은 국내 감독 중 이창동과 함께 내가 제일 좋아하는 감독인데 첫 손을 꼽으라면 잠시 망설이겠지만 아마 홍상수를 꼽을 것 같다. 최근 벌어진 일들은 그의 영화 작업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지극히 사적인 문제이다. 때문에 굳이 알고싶지 않고, 나는 다만 영화감독 홍상수, 그리고 그의 영화에만 관심이 있을뿐이며 앞으로도 그의 작업과 영화에 대한 관심은 변합 없을 것이다. 

 

홍상수 감독의 열여덟번째 영화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은 남녀가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또 진정 사랑하는 사이라면 상대를 제대로 알고 있느냐는것을 탐색한다. 극중 민정(이유영)은 사랑할 수 있는 상대, 즉 제대로 된 남자를 찾고자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다. 그런 연유로 여러 남자를 만나며 그 과정에서 술도 마신다. 따라서 민정은 현재 사랑하는 남자인 영수(김주혁)조차 사실은 제대로 된 남자로 여기지 않는다는 뜻이 된다.


민정에 의하면 그동안 자신이 상대한 남자들은 두 가지 부류다. 늑대거나 어린애 같다는 것. 그리고 만약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자신이 보고 판단한 바를 있는그대로 믿어야 한다는 것. 누가 어떤 말을 해도, 설사 세간의 평이 그 어떤 것이든 단연코 외면하고 자신이 본바만을 절대 믿어야한다는 것. 즉 사랑하는 상대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보내야한다는 것이다.


어찌보면 이 영화는 젊은 청년 영수의 사랑에 대한 성장기이기도 하다. 민정이 보기에 처음엔 어린애 같이 단순하고 징징거리는 남자였다면, 그녀와의 만남을 통해 결국은 상대 민정을 있는 그대로 투명하게 볼 수 있게되고, 나아가 누군가가 민정에 대해 아무리 문제가 있다고 지적해도 과감히 무시한다. 즉 민정에 대해 절대적 신뢰를 보내며 이때 비로소 영수는 민정의 사랑을 되찾기에 이른다.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은 홍상수 영화로는 보기드물게 해피앤딩으로 끝난다. 그런데 문제는 영화와 달리 현실이 단순치 않다는 사실이다. 때로 내가 바라보는 상대방, 아니 내 자신마저 편견에 의해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는 수가 허다하고, 나라는 존재는 다른 사람들의 평판, 혹은 여러 사람이 본 견해가 종합적으로 구성된 결과가 더 정확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온갖 의혹이 난무하는 시대에 과연 내가 본바만을 있는 그대로 우직하게 믿고, 전폭적인 신뢰를 보낼수 있을지, 참 쉽지 않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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