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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 정홍수의 평론집 <흔들리는 사이 언뜻 보이는 푸른빛>(2014, 문학동네) 서문에는 대만 출신 감독인 허우 샤오시엔의 <카페 뤼미에르>(2003년)가 꽤 길게 언급된다. 흔히 비평집 서문은 저자가 책을 펴낸 동기나 소감 따위를 서술하기 마련인데, 뜬금없이 웬 영화를 길게 소개하지? 하면서도 워낙 영화를 좋아하기에 자못 흥미가 일었다.
“철교 아래로, 누군가 토해낸 듯 문득 터널을 빠져나와 다시 시간의 저편으로 사라지는 전철의 흐름을 보고 있노라면 거기 세상의 비의 한 자락이 잠시 그렇게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 같지 않던가. 그 흐르고 흐르는 풍경은 대도시 교통의 질서가 빚어낸 한갓 우연일테지만 왠지 살아간다는 것은 그와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막막한 목맴을 주지않던가.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난 거기 다리 위에 서보긴커녕 오차노미즈 역에도 가본 적이 없지 않은가. 허우 샤오시엔의 영화 <카페 뤼미에르>는 그렇게 실제보다 먼저 어떤 공간의 풍경을 내 마음속에 완성해놓고 있었다.” 정홍수 <흔들리는 .....> 서문
나는 이글을 읽을 당시 아쉽게도 <카페 뤼미에르>를 보지 못했기에 대략 짐작만으로 서문을 이해해야했다. 그런데 저자는 왜 본문도 아닌 서문에 허우 샤오시엔의 영화를 언급했을까. 짐작하건대, 비평집에 실린 글들은 딱딱한 이론과 분석에 앞서 시인, 소설가와 마찬가지로 예술적 상상력에 의한 결과물이고, 비록 창작품의 예술적 공간이 비현실적인 상상력의 소산에 불과하지만 그것은 결국 실제하는 현실과 다를바 없다, 고 여긴다. 그리고 그런 감동을 글로 써낸다는 뜻에서 허우 샤오시엔의 영화를 서문 속에 끌어들인다.
커피, 영화라면 자다가도 벌떡깨는 나인지라 갑자기 허우 샤오시엔의 영화가 보고싶어졌다. <카페 뤼미에르>를 감상했다. 과거 <비정성시>를 통해 예술파 감독인지는 알았으나 뒤늦게 다시 보게된거다. 두 번을 반복해서 본후에야 이해할 수 있었다. 오즈 야스지로 탄생 100주년을 기념한 영화인지라 오즈에 대한 오마주인지는 알았지만 일명 다다미쇼트를 빼고는 어떤 점이 오즈 스타일일지 알 수 없었다. 건 그렇고 우선 <카페 뤼미에르>부터 언급하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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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는 비교적 단순하다. 작가인 요코는 대략 20대 중반의 여성으로 대만여행에서 막 돌아왔다. 그녀는 타카자키에 사는 부모님을 찾아가 임신 사실을 알리고 며칠을 한가로이 보낸 후 다시 동경으로 돌아온다. 아이의 아버지인 대만의 남자친구와는 결혼할 생각이 없고 그냥 미혼모가 되겠다는 요코에게 부모는 당황스럽다.
한편 서점을 운영하는 하지메는 요코와 절친한 친구다. 하지메는 시간이 날 때마다 갖가지 전철 주변의 소음을 녹음하는게 취미인데 요코는 그를 위해 대만에서 사온 옛날 철도운전사의 회중시계를 선물한다. 그들은 대만 출신의 일본 음악가 장웬예에 대해 함께 조사하고 그가 자주 찾던 동경의 옛 장소를 찾아다닌다. 취재 중 현기증을 느낀 요코는 하지메에게 임신 사실을 털어놓지만 결국 자신의 마음을 전하지 못하고 조용히 지켜볼 뿐이다. 부모님의 걱정 속에 불안한 요코는 하지메의 조용하고 사려깊은 배려에 따뜻함을 느낀다./ 작성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