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대담
- 김우창(영문학자, 문학비평가)
교수님은 프루스트를 성공적인 자아창조의 모범사례로 생각하는 것같습니다. 아름다운 예술 작품을 창조하는 것이 아름다운 인생을 창조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을까요. 프루스트는 소설을 잘 쓰긴 했지만 인간적으로는 비난받을 만한 인물이 아닙니까.
- 리처드 로티(철학자)
저는 프루스트가 훌륭한 자아창조를 해 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삶을 사느냐 하는 것은 선택의 문제입니다. 어떤 화가는 그림때문에 삶 전체가 정당화되기도 합니다. 만일 저에게 일상적이지만 반듯한 삶과 창조적이지만 인간적으로 비난받을 수 있는 삶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라면, 아마 후자를 선택할 겁니다.
2. 모든 시작은 끝의 시작이다
"시작과 끝의 관계에 있어서 가장 의미심장한 현대소설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이다. 이 소설은 ‘잃어버린 시간’(문제의 제기)에서 시작하여 ‘되찾은 시간’(문제에 대한 응답)으로 끝난다. ‘오랫 동안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곤했다’에서 시작한 3,000여 페이지, 전 15권의 이 숨가쁜 소설은 인간이 ‘시간 속에’ 엄청난 자리를 동시에 차지하는, 그리하여 마침내 ‘순수한 시간’을 되찾는 작품을 쓰겠다는 주인공의 결심으로 끝맺는다. ‘시간(Longtemps)’으로 시작한 소설이 ‘시간(dans le Temps)’으로 끝날 때 ‘주인공’은 마침내 ‘나레이터’, 즉 작가가 되어 소설의 시작, 그 첫 줄로 되돌아간다. 끝이 시작과 맞물려 원을 이루면서, 흘러가는 ‘시간’은 예술이라는 하나의 전체, 즉 흘러가버리지 않는 ‘공간’으로 완성되었다. 사실 프루스트는 이 끝을 시작보다 먼저 썼다. 끝이 시작을 낳은 것이다. 소설이 인생살이와 다른 점이 여기 있다." - 김화영(고려대 교수, 불문학)
3.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와 프루스트
프루스트를 생각해 보라: "교회의 탑들은 저렇게 멀리 보인다. 그리고 마치 우리들이 조금밖에 다가가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우리들이 곧바로 마르탱빌르의 교회 앞에 멈추었을 때 나는 무척 놀랐었다. 나는 교회의 탑들을 지평선상에서 바라보는 것이 어째서 나를 행복하게 했는지를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캐보려는 강박관념이 나를 괴롭히며 억누르고 있었다; 나는 마차가 움직임에 따라 위치가 바뀌어지는 교회 첨탑들이 그리는 선에 대한 나의 화상들을 머리속에 간직하고 싶어했으며 그 순간 더 이상 그 이유에 대해서 생각하고 싶지 않았었다.
나를 즐겁게 해주는 말들이 떠올랐기 때문에 마르탱빌 교회의 첨탑들 뒤에 숨겨진 것들은 하나의 성공적으로 표현된 문장으로 대치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스스로 다짐하지 않은 채 나는 의사에게 연필과 종이를 요청했고, 마차의 흔들림에도 불구하고 으식의 중압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그리고 감격한 나머지 다음과 같은 짧은 산문을 썼다.
나는 결코 이 몇 줄의 문장들을 돌이켜 생각하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의사의 마부가 평소에 마르탱빌의 시장에서 산 닭을 바구니에 담아 놓아두던 마부자리의 한 구석에서 글쓰기를 끝냈던 그 당시의 그 순간에 나는 이 몇 줄의 글이 나를 어찌나 완벽하게 교회 첨탑들과 그 뒤에 숨겨진 것들로부터 해방시켜 줄 수 있었던지 나는 마치 나 자신이 알을 낳은 한 마리의 닭인 양, 날카로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나에게도 이와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 여러 해 동안 나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고 나를 차분하게 놓아두지 않았던 나의 어린 시절의 몇몇 장면들이 불현듯 사라져 버린 것이다. 우리가 오랫동안 살았고, 여러 해 동안 내가 규칙적으로 꿈꾸어 왔던 나의 옛 집이 나의 꿈속에서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 것이었다. -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봉인된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