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실 합네하고 집안에서만 맴돌았다. 한 해가 다가도록 형제들 얼굴조차 못보고 있으니. 나이는 점점 들어가고 여기저기 아픈데만 늘어간다. 그래도그렇지 최소 한 해 한 번은 만나야하지 않나? 이러다가 병들면 겨우 그때나 볼까. 

오랜만에 아내와 함께 삼례에서 목회를 하는 여동생을 찾았다. "오빠 나이들었나 보네. 여길 다 찾게" "그러게 말이다. 내둥 온다온다 하면서도 쉽게 안 되더라고" 교회 입구 화단에 이름 모를 꽃들이 화사하게 피었다. 함께있는 사촌여동생 영란이도 만났다. 오랜만에 보아선지 얼굴이 너무 야위었다. 반가웠다.  

교회는 어설퍼 보이던 예전보다 많이 단장되었다. 실내 바닥은 강화마루를 깔았고 주변도 정리정돈이 잘 됐다. 한눈에 봐도 깨끗하다. 커피를 마시며 어린시절의 추억담, 교회소식, 신앙 생활 등등 이야기 꽃을 피웠다. 신학은 자유롭게 토론이 가능하나 신앙은 아예 토론 대상이 아니다. 오로지 신앙이 전부인 동생의 말을 그저 경청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중에도 동생은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나를 염려하고, 나는 목회 생활로 힘들어 보이는 동생을 염려했다. 돌아오는 길에 아내가 그런다. "지난번보다 많이 안정돼 보여요"  그렇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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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슷비슷한 나날. 하긴 배 탈 때 사무실 근무때도 그랬고 퇴직한 지금도 마찬가지다. 지난 60여년 세월이 늘 이랬다. 그래도 내일은 좀 다르겠지, 다르겠지 하며 여기까지 왔다. 이즈음은 이곳저곳 아픈데가 많아지고, 소소한 일에도 깜짝 놀란다. 왜 이렇게 약해진거지? 뜨겁던 열정 대체 어데로 사라졌나. 부모, 자식, 친척 이런저런 잔걱정만 늘어간다. 산다는게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골똟이 생각에 잠기곤 한다. 무거운 것 내려놓고 편히 살자 하면서도 막상 생각뿐이다. 어쩌랴, 원래 인생이 이런 것을.....오늘은 오케스트라 연습일, 비록 잠시지만 그나마 트럼펫 연주할때라야 무거움을 내려놓을 수 있다. 저녁식사 일찍 마치고 연습실로 향하다.

2
오늘 연습은 연휴 기간이라 1시간 먼저 시작했다. 드보르작 <교향곡 제 9번 E단조, op 95 '신세계로부터'> 3악장, 2악장 순으로 연습에 들어갔다. 3악장은 전 악장 중 가장 늦게 시작한셈. 나는 평소 유명 오케스트라의 CD음반을 틀어놓고 연습을 하는데 그중 3악장이 가장 어려웠다. 스케르죠 3박자 리듬이지만 워낙 빠르게 진행되니 자칫 박자를 놓치거나 리듬이 뒤죽박죽이다. 하지만 막상 실전 연습에 들어가니 괜한 기우였다. 느린 템포로 연주하는데다 지휘자께서 육성으로 3박자 리듬을 직접 불러가며 지휘를 하시니 연주하기가 쉽다. 마지막은 정상 템포로 했는데도 전혀 문제가 안 된다. 오히려 다른 악장에 비해 쉽게 느껴질정도. 트럼펫의 경우 쉴새없이 연주해야하는 4악장이 가장 어렵고, 다음으로 1악장, 2악장, 3악장 순이다.

3악장은 경쾌한 빠른 악장이라 재미도 재미지만 도중 급격한 템포 변화가 있어 지루하지 않다. 2악장 잉글리쉬 호른의 솔로 연주야 워낙 친근하고 유명하지만 3악장의 오보, 플륫, 클라리넷 등 목관파트가 번갈아가며 연주하는 서정적인 선율도 너무 아름답다. 특히 1악장의 플륫 솔로 부분, 4악장 경우 바로 앞자리 클라리넷 샘의 솔로연주를 들을때는 마치 숲속 오솔길을 거닐듯 아늑한 기분에 잠긴다. 작은 행복! 그동안 악보보기에 바빠 몰랐는데 점점 여유가 생긴다. 이제야 비로소 다른 파트의 연주가 귀에 들어오고 마치 객석에 앉아 감상하는 기분까지 든다.

 

연습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4악장은 물론이고, 2악장 도입부 다섯 마디, 그리고 1악장 피날레 부분 등 트럼펫 주요 선율을 자신있게 연주 할 수 있도록 반복 연습할것. 사실 '신세계'는 다른 곡에 비해 트럼펫 연주가 많은 편이다. 그래서인지 재미도 있고, 덩달아 의욕도 생긴다. 이럴수록 다른 파트에 누가 되지 않아야 한다는 부담을 갖지만 나로서는 연주 실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3
중간 휴식을 마치고 오랫만에 모차르트 <피아노협주곡 20번 D단조, K466> 1악장 연습을 하였다. 피아노를 연주하시는 선생님이 마침 나오셨다. 역시 모차르트 곡은 음반 감상때나 직접 연주할때나 편안하고, 정서적으로 안정이 되지만 연주는 까다롭다. 한 음 한 음 군더더기 없이 정확하게 텅잉해야하고, 정확한 박자, 부드럽고 섬세하게 연주해야하기 때문이다. 모차르트의 곡은 베토벤 연주와는 전혀 다르다. 우선 베토벤 곡에 자주 나오는 스포르잔도나 포르테, 크레센도 디크레센도는 모차르트 곡에 거의 없다. 기껏해야 포르테 정도? 

특히 모차르트를 연주할 때는 아마추어들에게 흔히 보이는 기본기의 부족을 절감한다. 가령 어떤 음, 혹은 선율을 연주한다고 할때, 아무 생각없이 한다면 그 자체는 가능하다. 하지만 모차르트는 더욱 투명하고 섬세하고, 정확하지 않으면 안 된다. 흔히 하는 말로 마구 내지르다간 음악이 구질구질해지고 여지없이 뽀록 난다. 이런 비유가 어떨까. 가령 맞선볼때 눈이 높은 상대는 온갖 것을 따지다 결국 사소한 이유로 툇자놓기 일수다.

 

즉 유난스럽고 까다로운 상대, 바로 모차르트 연주가 그렇다. 첫 음 낼때 호흡에 각별히 신경쓰지 않으면 텅잉이 깨끗하지 않다. 이게 끝이 아니다. 텅잉이 잘 되었다고 방심하다간 여지없이 실수다. 아랫배 긴장을 그대로 유지한채 호흡을 조심조심 내쉬어야한다. 하지만 경쾌하고 밝아야한다는것도 유념할것. 즐겁게, 통통 튀듯 가볍게, 그러면서도 강하고 부드럽게....어떤가. 이쯤되면 얼마나 까다로운지.....가볍게 봤다가 큰 코 다치는게 모차르트 연주라고나 할까?    

어쨌거나 오늘 연습은 나로서 특별했다. 연습하는 내내 편안한 기분이 드는건 앞에서 말한것처럼 어느정도 익숙한 탓도 있지만 곡 분위기 때문이다. 연주를 한다는게, 특히 오케스트라 활동을 한다는게 이렇게 뿌듯할 수 있을까. 60중반 나이에 이만한 즐거움이 또 있을까. 연습하는 동안 새삼 단원 한 분 한 분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아, 이런 분들과 함께 연주 할 수 있다니 내가 얼마나 큰 복을 받은건가, 정말 단원 모두에게 감사할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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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일 신문과 TV에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 소식을 전하고 있다. 추적 추적 비내리는 일요일, 며칠째 읽던 염상섭의 <삼대>와 발터 벤야민의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베를린 연대기>(길)는 치워놓고, 서가에서 마르크스 관련서들을 빼들다. 우선 '젊은 세대를 위한 마르크스 입문서'라는 부제가 달린 강유원의 <공산당 선언>(뿌리와 이파리)으로 워밍업 한 후,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한 이홍구 편 <마르크시즘 100년>을 차례로 읽는다. 일단 마르크스의 전모를 스케치해보려는건대, 전체가 순수 국내 연구자들의 글인데다 내용도 충실해서 일독할 가치가 있다.  

1부 마르크시즘의 이론적 구조, 2부 마르크시즘의 수용과 개조, 3부 마르크시즘의 현대적 전개 등  전체 3부로 구성되었다. 먼저 청년 헤겔파의 리더격인 브루노 바우어와 박사학위를 받을 무렵의 젊은 마르크스와의 관계를 통해 마르크스 사상의 초기 시발점을 밝힌 첫 글에서부터 마지막 글은 마르크시즘의 현대적 전개까지 마르크스 사상 전체를 아우르고 있다. 이 책에서 특별히 관심이 가는 부분은 '유태인 문제'에 대한 바우어와 마르크스의 관점의 차이, 그리고 젊은 마르크스에게 각별한 관심을 보인 바우어로부터 나중에 포이에르바하로 옮겨가는 과정를 소개한 정문길 선생의 첫 번째 글이다.

이 책은 무려 16명의 전문 학자들의 글을 수록했음에도 불구하고 방대한 마르크스 사상을 소개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제한된 시간에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기엔 더없이 안성맞춤일것 같다. 만약 시간이 가능하면 <독일 이데올로기> <프랑스 혁명사 3부작>만이라도 대충 읽어봐야겠다.

점심 식사 후에는 '소외론 연구'로 유명한 정문길 선생의 글 '청년 헤겔파의 영향'에 이어 진석용의 '사적유물론과 분업'을 읽었다. <마르크시즘 100년>은 500여쪽에 이르는 두툼한 양인데, 전체를 통독할 수는 없고 예전에 읽으면서 언더라인 한 부분 중심으로 한 이틀정도 속독할까싶다. 

서가에 비치는 되어 있지만 내 평생 이해 불가능한 책이 몇 권 있다. 가령 헤겔 <정신 현상학>, 칸트 <순수이성비판>, 비트겐슈타인 <철학적 탐구>, 제임스 조이스 <율리시즈>, 질 들뢰즈/팰릭스 가타리 <천 개의 고원>, 질 들뢰즈 <차이와 반복>을 비롯해서 마르크스의 <자본>도 그중 하나다.  어쩌겠는가, 아쉽지만 이런 책들은 부득이 2차서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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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영(철학아카데미 대표)

미국사와 미국소설을 공히 관통하는 모티브가 있다면 ‘사냥’이다. 소위 프론티어 정신을 앞세워 자행되었던 미국 번영사가 무자비한 신대륙 사냥기였듯 근대 미국소설의 원조로 꼽히는 멜빌의 <모비 딕> 또한 거대한 백고래에 대한 처절한 사냥기라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미국적 사냥본능이 현실과 소설 안에서 정점에 달했던 건 미국의 1920년대였다. 재즈와 알 카포네의 암흑시대로 불리는 1920년대 미국은 자본의 광기 시대, 곧 다가올 대공황의 재난도 모르는 채 온 세상이 자본이라는 짐승을 잡기 위해 날뛰었던 사냥 시대였다.

그 사냥터의 세상에서 버려진 세대들, ‘길 잃은 세대들’(Lost Generations)이 태어났다. 가진 것 없는 청년세대가 그들이었고 그 세대를 대표하는 두 작가가 헤밍웨이와 피츠제럴드였다. 두 작가는 미국의 후예답게 각자 새로운 사냥의 길을 떠났지만 그들이 포획하려는 사냥의 동물은 판이했다. 헤밍웨이가 잡고 싶은 사냥물은 아프리카의 초원과 쿠바의 바다로 상징되는 자연의 야생성이었다. 하지만 피츠제럴드가 포획하고 싶었던 동물은 자연이 아니라 문명의 심장부인 메트로폴리스에 있었다. 그는 그 도시의 동물을 찾아서 뉴욕이라는 자본주의의 정글 속으로 사냥을 떠났고 그 사냥기가 소설 <위대한 개츠비>다. 그런데 한낱 자본의 사냥꾼이었던 개츠비는 왜 위대할까. 줄거리만 읽으면 그는 오히려 타락하고 어리석고 가엾은 청년이어야 옳다. 그런데도 소설은 개츠비를 위대하다고 부른다. 그 위대함이란 무엇일까.

우선 개츠비는 위대한 타락주의자이다. 그는 헤밍웨이처럼 자연으로 도피하는 대신에 타락한 시대의 현장인 메트로폴리스의 정글로 투신한다. 그는 타락의 현실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냉엄한 현실주의자이며 그런 점에서 루카치가 말하는 문제적 투사이다. 그런데 동시에 그는 위대한 낭만주의자이다. 타락의 정글 안에서 그가 기필코 나포하려는 동물은 놀랍게도 이미 멸종해버린 순수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이 엉뚱한 역설이 데이지와의 러브스토리이고 그것이 소설을 불후의 순애보적인 멜로드라마로 만들지만 개츠비의 낭만적 위대함은 거기에 있지 않다. 그의 낭만적 위대함은 그런 사이비 순수가 아니라 오히려 비순수 속에 있다.

사실 이 낭만적 연애소설 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가 타락한 인물들이다. 개츠비와 데이지도 다르지 않다. 데이지가 자본이 만들어낸 허영과 사치의 인형이라면 개츠비는 그 부잣집 딸을 교두보 삼아 상류계급의 영역으로 진입하려는 속물적 연애꾼이다. 그런데 다름 아닌 그 속물적 연애 속에서 낭만주의자 개츠비가 태어난다. ‘지진계보다 예민한 낭만적 감각’과 ‘희망을 알아보는 탁월한 능력’을 타고난 개츠비는 데이지와 첫 키스를 나누던 순간, 비순수의 화신인 그녀에게서 아무도 믿지 않는 순수의 냄새를 맡는다.

그리고 타락한 데이지를 순수의 환으로 사랑하는 비극적 운명에 빠진다. 하지만 개츠비는 또 하나의 운명을 알고 있었다. 그의 순수한 환이 타락의 세상에서 실현될 수 없다는 것, 데이지가 마침내 그를 배신하리라는 것, 자신이 결국 속물적인 동부 토착 귀족들의 더러운 음모에 걸려서 목숨마저 잃고 말리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환과 희망에 대한 의지를 포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불가능 속으로 더 깊이 투신한다. 그것이 타락한 낭만주의자 개츠비의 위대함이다.

그런데 또 하나의 위대함이 있다. 그건 개츠비의 위대함이 아니라 소설 자체의 위대함이다. 이 소설은 개츠비가 죽은 뒤 돌연 미국의 시원을 기억시키는 역사소설로 장르가 변한다. 죽은 개츠비 대신 신대륙에 처음 도착했던 네덜란드 청교도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죽음의 항해 끝에 마침내 도착한 신대륙 앞에서 그들이 온몸으로 느꼈을 최초의 환, 새로운 역사와 미래의 약속으로 그들의 가슴 안에서 환하게 켜졌던 ‘초록색 불빛’과 더불어 소설은 끝난다. 그렇게 멜로드라마 <위대한 개츠비>는 그 끝에서 1920년대 타락한 미국에 잃어버린 최초의 꿈을 환기시키는 비판적 역사소설로 다시 태어난다.(....)"   - 한겨레신문 2018. 5.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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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대한민국의 평범한 시민으로 살아온 나는 통일에 관한 한 진보 보수 할 것없이 똑같이 원할거라 생각했다. 당연하지 않은가. 그런데 최근 이런 나의 확고부동했던 생각은 제 1야당 대표 홍준표의 언행을 보면서 회의가 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내심 그도 우리 국민이고 한 나라의 지도자인데 설마 통일을 원하지 않을라구. 물론 나중에 사실이 아닌것으로 밝혀졌지만 홍준표는 한때 정의의 '모래시계 검사'라는 소리까지 들은 인물이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간다. 나는 지금 홍준표를 보수라고 했다. 아니다. 그는 대한애국당 조원진하고 약간 결이 다를뿐 실제는 보수가 아니라 같은 극우이고, 한국의 보수들은 톳진 갯진, 엉거주춤 극우를 추종할 따름이다. 그러니까 이 글의 서두에서 말한 "통일에 관한 한 진보 보수..." 운운은 '보수'가 아닌 '극우'로 정정해야  정확하다. 자, 하던 이야기 마저하자.

그러니까 나는 '4, 27 남북정상회담'을 전후해서 제 1야당인 한국당도 진정 북한의 비핵화와 통일을 원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제는 어떤가. 극우 홍준표를 위시로 한국당은 전혀 그렇지 않아 보인다. 그래도 그렇지 8천만 겨레가 하나같이 통일을 원하는데 설마.....나는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조차 혼란스럽다. 극우 홍준표와 한국당은 정말 통일을 원하지 않을까? 정말 그럴까?

그러던 차 5월 3일자 한겨레신문에 게재된 김종구의 칼럼 <역사의 유쾌한 역습’과 ‘당랑거철’>을 읽고 뒤늦게 알았다. 홍준표와 한국당은 북한의 비핵화와 통일을 원하지 않는다. 왜 그런가. 다음은 칼럼의 일부 내용이다.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한국 정부는 골대 앞에서 공을 절묘하게 띄워줬다. 완전한 비핵화의 골을 성공시킬 마무리 책임은 미국에 넘어갔다. 말 그대로 ‘공이 넘겨진’ 상태다. 그동안 보수세력은 한반도의 운명 결정권은 ‘형님’한테 있다고 끊임없이 외쳐왔다. 그렇다면 정상회담 합의문에 비핵화의 구체적 과정이 명시되지 않았다고 트집 잡을 게 아니라 형님이 득점에 성공하길 기원해야 옳다. 그런데 아무리 보아도 실축을 두 손 모아 기도하고 있는 것만 같다."

 

 

어떤가. 내 말이 맞지 않은가. 역시 홍준표와 한국당은 입으로는 비핵화, 통일, 통일하지만 실제는 북한의 비핵화, 나아가 통일을 결코 원하지 않는다. 여기까지 쓰고 방금 가족들과 저녁식사하고 왔다. 식사 중에 가족들에게 내가 조금전 이러이러한 글을 쓰다 식사때문에 왔다고 했더니 30중반인 아들이 그런다. "아니, 무슨 새삼스런 말씀을, 모두가 홍준표는 통일을 원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거든요." 

내 나이 올해 예순다섯. 세상사 어느정도 알만한 나이라고 자부했건만 아직 모르는것 투성이다. 씁쓸한 결론인데, 결국 홍준표와 한국당은 당리당략, 권력욕만을 염두에뒀지 진정 북한의 비핵화와 통일을 원치 않는것 같다. 나는 이런 홍준표에게 5월 4일자 한겨레신문의 김종철 칼럼 <안보논리를 넘어서 평화체제로>를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남북관계 개선, 한반도 긴장 완화, 그리고 평화체제 구축이라는 크게 세 항목으로 구성된 회담의 합의 내용을 두고 상당수 해외 언론(그리고 국내의 극우 수구파 언론)은 ‘비핵화’에 대한 구체적인 합의가 포함돼 있지 않다고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지만, 우리가 보기에 그건 너무도 한가로운 투정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획기적으로 관계가 개선되어 남북한이 서로 긴밀히 돕고 지낼 수 있다면, 전쟁 위험과 핵문제는 저절로 해소될 것이 우리에게는 너무도 명백한데도 그들은 이 점을 무시하고, 오로지 ‘비핵화’를 고립된 테마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이다.(‘비핵화’는 결국 북-미 정상회담에서만 최종적 합의가 가능한 문제인 이상, 남북정상회담에서 구체적인 결론을 낼 수 있는 게 아님이 분명하다. 그리고 지금 우리의 가장 긴급한 과제는, 설혹 북-미 회담이 실패할지라도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날 빌미를 제거하는 것이다. 또 우리에게는 핵무기만이 문제가 아니다. 만약 어떤 이유로든 전쟁이 터지면 핵무기가 아닌 북의 장사포만으로도 2천만 인구가 조밀하게 살고 있는 남한의 수도권은 순식간에 ‘불바다’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도 남북간 관계개선과 적대행위의 중지를 강조한 이번 판문점회담의 성과는 찬양받아 마땅하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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