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다온, 예준이의 재롱
2. 아내와의 대화, 커피 타임
3. 아들 부부와  함께하는 저녁식사
4. 독서
5. 영화
5. 트럼펫 연습
6. 청소 마친 후 독서실 풍경
7. 업무 종료된 새벽 1시
8. 등교 차량에서 감상하는 FM 클래식
9. 블로그 글쓰기
10.독서회
11.동네카페
12.Y씨 부부와의 커피 타임
13. 커피 로스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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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화사했던 가로수 벚꽃도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한다. 개나리, 진달래, 벚꽃.....국도 주변 산중턱이 하얗게 물들었다. 아내와 함께 대야 5일장에 가다. 올해부터는 뒷뜰 텃밭에 채소를 심지 않기로 했다. 그래봐야 손바닥 크기지만, 작년까지만해도 토마도 몇 그루, 상추 쬐금, 부추, 고추 두 세 그루, 가지 등 이것저것 심었다. 하지만 잡풀 뽑아야지, 물 줘야지 여간 공이 드는게 아니어었다. 재미로 키운다지만 재미치고는 공력이 너무 들어갔다. 그렇다고 맨땅을 놀릴 수 없어 과실수를 심기로 했다.

자두, 왕대추, 대봉시 감나무 등 세 그루 35,000원에 구입했다. 점심식사는 가끔 들르는 임피 '금송'에서 갈비탕으로 대신했다. 갈비탕 4인분을 추가로 구입. 하나는 제수씨, 또 하나는 며느리 것. 대야 장터 명물인 도너츠를 살까했지만 워낙 붐벼 포기했다. 모처럼 밖에 나온김에 익산 막내 제수씨 댁에 들르기로 했다. 제수씨것 우리것해서 수국 두 개를 구입했다.  

요며칠 오케스트라 문제로 고민이 컸다. 나름 열심히 연습한다고는 했지만 당최 연주실력이 향상되지 않았다. 자신감이 떨어졌다. 덩달아 재미도 없고 즐겁지가 않았다. 나로 인해 앙상블이 깨지는 느낌이었다. 이거 민폐가 아닐까? 노력한다고 무작정 되는건 아닌듯했다. 오케스트라 활동한지 벌써 10년째인데 주눅이 들다니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이럴줄은 정말 몰랐다. 

간혹 '오케' 활동 그만하고싶다는 단원들이 있긴했다. 그럴때마다 나는 대수롭잖게 '힘내세요', '조금만 참으세요', 하고 말렸다. 그런데 정작 내가.....최근에는 <오후의 기타>까지 읽으며 잘 해보려고 다짐까지하지 않았던가. 실은 이거 아니라도 책이며 글쓰기, 음악감상 등 해야할게 많다. 이쯤해서 그만둘까? 아니다 미련이 남는다.  

아들 지훈이는 그동안 한게 아까우니 좀 참아보라고 했다. 아내는 휴식기간을 가져보라하고, 은별이는 전공자답게 레슨을 권유한다. 어떻게하지? 잠시 시간을 갖고 더 생각해보기로 했다.      

"오늘이 대야 장날인데, 구경이나 가보자고요". 아내의 은근한 마음 씀씀이가 고마웠다. 역시 밖에 나오니 울쩍했던 기분이 좀 풀린다." 행복이 별것 아니잖아요? 작은것으로도 충분히....." 아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이 나이쯤이면 작은것에 감사해야 한다. 아무리 열정이 솟는다고 마구 쏟아부을게 아니고, 설사 선의적인것이라해도 분별이 있어야한다. 물러설 때는 과감히 물러서고 주춤주춤 미련을 갖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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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연식 <로마서 8:37> 2017년                        미이케 다카시 <할복, HARA-KIRI> 2011년


신연식 <로마서 8:37>

예술작품에서 종교를 언급할 경우, 대개 두 가지 관점으로 나뉜다. 하나는 종교철학- 신학적 관점이고 다른 하나는 종교사회적- 제도적 관점이다. 가령 배용균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유현목의 <사람의 아들>이 전자의 관점으로 접근했다면, 신연식 감독의 2017년작 <로마서 8: 37>은 후자의 접근법이다. 물론 모든 예술작품이 명확하게 두 관점으로 나뉘는건 아니지만 대개 그렇다는 거다. 

신연식의 <로마서>는 한국사회에서 보기 드물게 기독교를 정면으로 비판한다. 이 작품은 한국의 기독교, 더 좁게는 한국의 교회 제도를 향해 매스를 들이댄다. 참고로 최근 한국 교회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몇 가지로 요약 할 수 있다. 목회자의 성폭력, 교회 세습, 대형화, 교회 재산을 둘러싼 파벌과 분쟁, 비민주적 제도, 교회간의 부익부 빈익빈 등등. / 계속   


                                                니키타 미할코프 <위선의 태양> 199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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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쇼팽의 <피아노 소나타 3번>을 감상했습니다. 근자 피아노 소나타는 주로 모차르트, 베토벤 등 빈 고전파에서 서성대거나 요며칠 슈베르트만 줄창 들었습니다.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20번 D959> 2악장 안단티노. 실은 누리 빌게 세일란 감독의 <윈터 슬립>의 여운이 꽤 오래 간 셈이죠. 영화음악치고 이처럼 탁월한 선곡이 또 있을까요. 슈베르트와 <윈터 슬립>은 한 치 오차없이 딱 맞아떨어지는 궁합입니다. 자 다시 쇼팽입니다.      

마리아 조앙 피레스의 피아노 연주입니다. 1악장 주제 선율은 23마디부터인데 이 지점에 도달하면, 아하~ 쇼팽이로군, 하는 생각이 절로 들게되어있죠. 특유의 서정성, 유려한 선율,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1번> 2악장 아다지오,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 2악장도 쇼팽 못지않게 유려하지만 약간 차이가 있습니다. 

이점은 고전파와 낭만파의 가교 격인 슈베르트도 마찬가지죠. 쇼팽의 매력이랄까, 센티멘털리즘과 서정성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 눈부신 햇살너머 찰랑이는 서정의 아린 물결, 틈새로 빚어내는 섬세한 아름다움은 정해진 박자 내에서 슬며시 느려지는 것, 바로 루바토에 있습니다. 피아노의 시인이라 일컫는 쇼팽의 전매특허죠. 쇼팽을 말하다보니 에피소드가 하나 생각나는군요.

 

아마추어 오케스트라는 쇼팽을 연주할 때 곧잘 애를 먹습니다.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1번>과 2번은 연주회 단골 레퍼토리라 프로든 아마든 자주 무대에 올려지죠. 하지만 워낙 루바토가 잦다보니 오케스트라는 반드시 지휘자의 지휘를 잘 봐야합니다. 물론 지휘자야 피아니스트의 흐름을 따라가며 루바토를 멋스럽게 처리하고싶지만 어데 그런가요. 악보 보기에 급급한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이니 말이죠. 그러니까 트롯트의 멋이 어떻게 음을 잘 꺽는지에 달려있다면 쇼팽의 멋은 루바토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피아노의 향연에 한껏 느긋한 초봄 오후녁입니다. 모든 예술에서 음악이야말로 가장 즉물적인 장르가 아닐까싶군요. 애써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으니 있는 그대로 느끼고, 귀에 들려오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면 되니 말이죠. 때로 아름다운 선율에 귀기울이다보면, 내가 이렇게 느긋해도 되나, 아름다움에 무방비로 빠져들어도 되나? 라는 좀 우스운 생각이 듭니다.  

아마 우리 세대라면 대개 그럴것입니다. 못 먹고 고생하던 사람들이 느끼는 특유의 걱정 같은것. 살림이 좀 펴진 지금도 궁상스런 기억들이 떠오릅니다. 어쩌다 맛있는 음식이라도 보면 무심코 떠오르는 부모, 가족들의 모습. 나 혼자 호사를 누려도 되나? 이런 맛있는 걸 어떻게 나 혼자.....지금 쇼팽이 그런거죠.

다시 쇼팽입니다. 딸 은별이의 사진, 초등학교 시절, 고사리 손으로 피아노를 치던 은별이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오전에 잠깐 비가 내리더니 한낮 초봄 햇살은 여전하군요. 바람 살랑이는 옥상 컨테이너. 잠결에 죽은 막내동생을 떠올리다 잠이 깼습니다. 콘테이너 근처 바로 저 곳이었죠. 엘리베이터 계단을 오르다 처음 발병을 알게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3년이 다돼가네요.

음악은 이러저런 추억에 잠기게 하고, 때로 오래 전 어느 순간의 기억을 오롯이 불러내기도 합니다. 순간 눈앞에 재생된 옛 일들은 무심한 세월 속에 사라지지 않고, 생생한 현실로 뒤바뀝니다. 바로 이런 점이 음악의 매력일터인데, 유일하게 음악만이 가능한 신비로움이자 마술 같은게 아닐까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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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군산시(인재양성과)가 주관하는 '동네카페' <클래식과 인문학의 만남>을 진행하고, 오늘은 독서회 회원들과 함께 마이클 레드포드 감독의 <일 포스티노>를 감상하는 등 연이틀 분주하게 지냈다. 아무리 바빠도 트럼펫 연습만큼은 거를 수 없어 빠듯한 시간을 트럼펫 연습에 할애해야 한다. 퇴직하면 시간여유가 충분하겠지, 했지만 막상 그게 아니다. 오전 내내 영화 감상 준비하느라 저녁식사 마치고나서야 겨우 조간신문을 읽었다.

한겨레신문은 매주 금요일 '책과 생각' 이라는 신간 서평 기사를 꽤 많은 분량의 별지로 묶어 낸다. 나는 늘 책을 끼고 사는 생활이라 신간 소식이 궁금한데 특별히 구독하는 서평지는 없고, 매주 한 차례 한겨레 리뷰 정보가 유일하다. 전문 서평지와 달리 신문 리뷰는 분량면이나 깊이에서 한계가 따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워낙 따근한 정보들인데다 요긴한 읽을거리가 많아 반드시 챙겨 읽는다.  

오늘 기사 중 재야 철학자인 전대호 변역의 헤겔<정신현상학 강독 1>(글항아리, 2019년)에 대한 리뷰가 눈길을 끌었다. 이 책은 총 7장으로 된 헤겔의 <정신현상학> 중 '서문', '들어가는 말'을포함해 의식에 대해 다룬 1~3장을 번역하고 강독한 내용을 엮었다. 

출판사에 따르면, 앞으로 이 강독 시리즈는 총 5권으로 출간될 예정이라고 하는데, 이 번역서가 흥미로운 것은 그동안 학계에서 통용되던 헤겔 철학의 몇 가지 핵심 개념어들을 다소 파격적으로 번역한 점이다. 예컨대 무매개적(unmittelbar) / 단박, 지양(aufheben)/거둠, 즉자(Ansich)/그 자체, 대자(Fürsich)/자기를 마주함, 즉자대자(Anundfürsich)/그 자체이며 자기를 마주함(또는 ‘다움’)이라고 옮기는 식인데, 이와같은 새로운 번역어가 과연 보수적인 학계에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자못 궁금하다. 여하튼 나같은 독자 입장에서는 창의적으로 보일뿐 아니라 독서열을 은근히 부추긴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생각된다.  

오래 전에 임석진 교수가 번역한 한길사판 <정신현상학>을 구입한 바 있고, 언젠가 시간이 되면 '아트 앤 스터디'에 개설된 김상봉(전남대 철학과) 교수의 <헤겔 정신현상학 강의> - 김 교수의 강좌는 4장 '자기의식'과 5장 '이성' 등 두 장으로 국한된다 - 를 청취해볼까 했지만 칸트의 <순수이성비판>과 함께 난해하기로 악명높은 철학서라 차마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새 번역서가 출간되었으니 이번 기회에 욕심을 한번 내봐야겠다. 다음은 앞에 열거했던 몇 가지 개념어의 이해를 위한 리뷰 중 일부다.     

역자는 이런 새로운 개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홍길동을 사례로 들어 설명한다. 먼저 서자로서 자기의식이 없는 꼬마 홍길동의 상태는 ‘홍길동 그 자체’다. 하지만 성장하며 서자라는 자의식을 품고 자신과 불화하게 되어 길을 떠나 외톨이가 된 홍길동, 자기로부터 멀어지면서 ‘자기와 화해한 홍길동’이라는 목적지로 나아가는 홍길동이 바로 ‘자기를 마주한 홍길동’이다.

그렇다면 ‘그 자체이며 자기를 마주한 홍길동’은 무엇일까. 전대호는 일반적인 헤겔 해석자들이 이를 ‘해탈한 홍길동’으로 설명해왔다고 지적한다. 대신 그는 이를 역동적 부정성을 품은 ‘홍길동의 일생’ 또는 ‘홍길동다운 홍길동’으로 번역해야 한다고 말한다. 특히 그는 우리말 ‘다움’엔 외국어로 번역되지 않는 헤겔 철학적인 의미가 숨어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환호작약한다. 예를 들어, ‘사람이면 다 사람이냐, 사람다워야 사람이지’라는 저잣거리의 말엔 ‘사람임’이라는 존재에 그치지 않고 실천을 통해 ‘사람다움’의 내용을 채워나가야 한다는 헤겔의 사상이 들어 있다고 말한다.

이런 맥락에서 <정신현상학> 서문에 나오는 “내가 깨달은 바로는, 모든 것이 걸린 관건은 진실을 실체로서뿐 아니라 또한 마찬가지로 주체로서 파악하고 표현하는 것이다”라는, 헤겔이 자신의 깨달음을 요약한 ‘오도송’을 다음과 같이 풀이한다. “내가 깨닫고 보니 사람임에 머물지 않고 사람다움에까지 이르는 것에 만사가 달렸더라.” 감각에 매몰된 인간의 정신이 자기를 인식하는 과정을 다루며, 정신의 본질이 자기 자신을 실현해가는 자유임을 밝히는 <정신현상학> 전체의 논지가 이미 서문에서부터 예고되는 것이다.

2부에서 진행되는 강독은 한줄 한줄 해설해나가는 대신 넓은 보폭으로 따라가면서 주제에 대한 해설과 사상사적 맥락을 담은 에세이 성격의 글들이 이어진다. 그는 특히 헤겔을 절대정신, 시대정신처럼 “개인이 범접할 수 없는 어떤 막강한 힘을 준엄하게 선포한 인물”로 보는 기존의 오해를 벗기는 데 주력한다. “자신의 불완전성을 자각하는 사람, 바로 그것이 헤겔이 말하려는 진실의 진면목에 가깝다” “헤겔 철학이 그리는 주체는 찢어진 주체이지, 소위 절대자가 아니다”라는 대목들이 그렇다.   - 2019. 4. 12. 한겨레신문, 김지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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