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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승선했던 300톤급 트롤어선은 달세나 부두에서 대략 일주일쯤 머물다가 식량과 기름 보급을 마친 후 라스팔마스 항구를 떠난다. 하루쯤 항해 끝에 아프리카 연안에서 멀지 않은 대서양 어장에 도착한다. 대략 북위 25도에서 20도 사이. 이윽고 투망을 마치면 한 두 시간 그물을 끌다 양망을 한다. 그렇게 하루종일 투망과 양망을 반복한다. 일하고 먹고, 자고, 일하고 먹고 자고, 보이느니 대서양 망망대해. 두 달쯤 작업을 하고나면 한 항차가 끝난다. 만선이 되면 다시 입항. 그리고 다시 출항. 3년을 채우면 계약기간이 끝난다. 20대 꼬박 10년 세월을 그렇게 대서양에 쏟아부었다. 청춘의 낭만도, 연애도, 우정도, 사랑도 몽땅 그물과 함께 바다에 쳐박히고 만거다.
아, 지옥같던 원양어선. 뱃생활동안 나를 지탱해준것은 문학과 책, 모차르트, 베토벤의 음악이었고, LP음반이며, 글쓰기뿐이었다. 대서양 망망대해, 끝 없이 줄지어선 아프리카 모래사막, 모로코에서 세네갈까지 특징없이 이어지던 모래해변, 그 절벽들.....하지만 나를 끝내 버티게 해준 음악들, 헤밍웨이와 이청준의 단편들, 가스통 바슐라르, 글쓰기, 상상력, 몽상과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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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청준의 단편 <조만득씨>는 한 과대망상증 환자의 이야기다. 전직 이발사인 조만득은 원래 심성이 착하고 근면, 성실한 사람이지만 몇 푼 안 되는 재산을 말아먹는 동생과 가족들 뒷바라지 하느라 그만 과부하가 걸린다. 과부하가 한계치를 넘으면 정신병에 걸린다. 결국 정신병원에 입원한 조만득이 벌이는 에피소드가 소설의 주요 스토리인데,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한다.
조만득은 자신을 어느 기업 사장쯤으로 여기고, 병동의 환자들, 간호사, 의사 누구랄것 없이 만나는 이들에게 고액 수표를 써준다. 수표는 그냥 하얀 종이이고, 백지에 볼펜으로 고액을 써넣는 식이다. 한편 조만득을 치료해서 정상인으로 되돌리는게 주치의의 임무인데 반해, 담당 간호원은 이렇게 반문한다. 조만득이 감당할 수 없는 고통스런 현실로 다시 돌아간다고 병원의 책임을 다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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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항상 현실이다. 책을 지나치게 읽다 몽환적인 세계를 진실로 착각하는 돈키호테는 일단 현실을 떠난다. 그러나 그가 스스로 아마디스가 되어 상상력으로 만들어낸 둘시네아를 찾아나선 순간, 그는 분명 환상의 자장내에 있다. 그러나 만약 오매불망 그리던 둘시네아를 만날 수만 있다면 - 이 경우 둘시네아를 만날지 여부는 다른 차원의 문제이고, 동시에 가능 불가능 여부 또한 서로의 가치관과 세계관의 차이이며 상대적인 문제라는 거다 - 그것은 환상이 아닌 진실, 혹은 현실로 바뀔 수 있고, 이때의 현실은 처음 떠난 현실이 아니라 소망했던 것으로 뒤바뀐 새로운 현실이다. 이처럼 현실(사실)과 소망하는 유토피아의 역설적인 관계에 대해 월러스 스티븐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바 있다.
“우리는 사실을 떠난다, 그리고 그것으로 돌아온다, 우리가 그랬으면 하는 사실로 돌아온다. 그것은 그전의 사실도 아니고, 너무나 자주 그래왔던 사실도 아니다.”
스티븐스에 따르면, 우리는 현실 혹은 사실을 떠나지만 언젠가 다시 현실(사실)로 돌아온다. 그러나 이 떠남과 돌아옴 사이에서 현실은 우리가 원하는 것과 일치한다. 왜냐면 이 경우 우리는 이 새로 돌아간 사실과 우리의 원하는 것의 차이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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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적 아름다운 꿈, 무지개빛 이상이 있었다. 점점 나이들어간다. 나이드는 동안 꿈은 퇴색되고, 누군가는 소중했던 꿈을 잃어버리기도 하지만 그중 몇몇은 옹골차게 간직한다. 녹녹치 않은 현실은 졸졸졸 시냇물처럼 흐르더니 급기야 급류가 되어 폭포수로 쏟아진다. 꿈은 그저 꿈일뿐인가? 현실에서 이뤄낸다는 게 쉽지 않다. 한 발 늦은감은 있지만 뒤늦게라도 알았다. 불가능할것 같다. 그런데도 40, 50 아니 60이 되도록 꿈을 잃지 않는다. 기어이 실현하는것만이 아름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설사 이뤄지지 않아도 좋다. 과정이 중요하니 직선주루 달리듯 질주 본능만이 최선이다. 이쯤되면 꿈이 뭔지 현실이 뭔지 어지럽게 뒤섞인다. 달린다. 달리다 쓰러져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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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 풍부한 가능성을 예견하고 때로는 언뜻 스친 신중함에 얼어붙어 지식의 이런저런 귀퉁이를 움켜쥐려 하면서 곤두박질치듯 흘러가는 세월은 인간을 휩쓰는 급류 같다. 인간은 바위에 부딪히기도 하고, 계속 이어지는 물보라와 얼마간 씨름할 때도 있다. 그러다가 마침내 나가 떨어져 어둡고 바닥모를 바닷속에 가라앉는다. 우리는 흘끗 보고 얼핏 감지할 뿐이고, 제 지론에서 찢겨져 나와, 빙글빙글 돌면서 삶의 이런저런 관점을 마주한다. 마침내 자기 의견을 끝까지 고수할 수 있는 자는 바보나 불한당뿐이다.
우리는 삶의 어떤 상황을 보고는 그것을 연구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가 가장 공들여 세운 견해는 한낱 인상에 지나지 않는다. 숨 돌릴 틈이 생기면 그 기회를 잡아 수정하고 조절해야 한다. 그러나 이처럼 정신없이 서둘러 달려가는 동안에, 소년이다 싶으면 어른이고, 사랑에 빠졌다 싶으면 다른 연령대가 시작되었고, 완전히 어른이 되었다 싶으면 무덤을 향해 쇠락하기 시작한다. 이처럼 혼란스럽고 덧없이 흘러가는 상황에서 일관성을 찾거나 명료하고 영속 적인 견해를 기대하는 일은 헛되다.
의견을 형성하는 것은 작은 방에서 사물을 소량 실험하는 과학이 아니다. 우리는 권총을 머리에 댄 채 이론을 세운다. 시간이 다하기 전에 우리가 직면한 일련의 새로운 상황에 대한 판단을 내려야 할 뿐 아니라 조치를 취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 자신도 불변의 항수로 간주할 수 없다. 이처럼 만물이 유전하는 상황에서 우리 정체성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듯하고, 가장무도회에서 내 가면이 가장 이상하게 보이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시간이 지나면서 싫어했던 것을 좋아하게 되고 좋아했던 것을 싫어하게 된다. 밀턴이 예전처럼 지루해 보이지 않고 에인즈워스는 그리 재미있어 보이지 않는다. 나무에 기어오르는 일은 분명 더 어려워졌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은 전처럼 어렵지 않다. 허세를 부려 봐야 소용이 없다. 숨바꼭질 세 번의 멋진 승부도 어째인지 묘미를 잃었다. 우리의 특성은 조절되거나 달라진다. 그에따라 의견도 조절되거나 달라지지 않는다면, 인생을 제대로 살지 못한 것이다.
스무 살의 견해를 마흔에도 똑같이 지니고 있다면 이십 년간 얼빠져 지내 온 것이고, 예언자는커녕 회초리로 많이 맞아도 현명해지지 않는 고집불통이 된 셈이다. 이는 런던 항에서 인도로 출항한 선장이 출발할 때 템스강 지도를 들고 갑판에 나와서는 고집스럽게 항해 내내 다른 지도는 사용하지 않는거나 마찬가지다." - R. L. 스티븐슨 <게으른 자를 위한 변명>(민음사, 이미애 역) 중 '심술궂은 노년과 청춘'
*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1850~1894)은 영국태생의 작가이며<보물섬(1883)>, <지킬 박사와 하이드>(1886), 에세이집 <게으른 자를 위한 변명>(1881) 등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