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레탕트의 재미라면 굳이 어느 것에 얽매이지 않고 관심가는대로 유유자적 즐길 수 있는 점이다. 서가에서 안톤 체호프를 꺼냈다. 시공사판 희곡 전집, 민음사판 단편선집과 열린책판 단편선집 등 세 권이다. 누리 빌게 세일란의 <윈터 슬립>의 원작이 체호프의 단편이라기에 궁금해서였다. 그런데 여기저기 검색을 해보니 원작이 어느 한 작품이 아니라 여러 단편 혹은 희곡에서 아이디어를 빌리지 않았나싶다.

이왕 책을 펴들었으니 희곡 몇 편이라도 읽어봐야겠다. 사실 체호프의 희곡은 국내 연극무대의 단골 공연작이기도 한데, 그중 <갈매기>는 영화화된 바 있고, 비디오로 출시된 적 있다. 

기억이 확실치는 않지만 극중 분위기가 <윈터 슬립>에서 아이딘과 그의 동생 네즐라, 아내인 니할이 신랄하게 논쟁을 벌이던 장면과 흡사했던 것 같다. 

여하튼 <윈터 슬립>의 감동이 워낙 묵직하다보니 원작의 분위기도 느껴볼겸, 체호프의 작품을 읽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희곡 두어 편, 단편 몇몇이면 가능할까? 

하다보면 체호프에 푹 빠질 수도 있고, 슬그머니 고골이나 뚜르게네프건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는게 딜레탕트의 생리다. 그래서 더욱 피상적, 즉흥적일 수밖에 없는데, 오묘한 해석과 탐구는 전문가들에게 맡기고 그들의 연구 결과를 열심히 챙겨보거나 즐기는게 딜테탕트인 내 역할일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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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칸투스독서회 <문학과 영화> 리스트(2019년)

1. 이와이 슌지 <러브 레터>, 권남희 역, 집사재/ 이와이 슌지 <러브 레터>

2. 쥘 베른 <녹색광선>, 박아르마 역/  에릭 로메르 <녹색 광선>

3.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네루다의 우편 배달부>, 우석균 역, 민음사/ M. 레드포드 <일 포스티노>

4. 대프니 뒤 모리에 <레베카>, 현대문학사/ A. 히치코크 <레베카>

5. 이청준 <벌레 이야기>, 문학과지성사(이청준 전집 20)/ 이창동 <밀양>

6. 나타니엘 호손 <주홍글씨>, 김욱동 역, 민음사/ 롤랑 조페 <주홍글씨>

7. 존 파울즈 <프랑스 중위의 여자>, 김석희 역, 열린책/ 카렐 라이츠 <프랑스 중위의 여자>

8. 우애령 단편집 <정혜>, 하늘재/ 이윤기 <여자,정혜>

9. 피츠 제럴드 <위대한 개츠비>, 김욱동 역, 민음사/ 바즈 루어만 감독 <위대한 개츠비>

10. 크리스티나 버루스 <프리다 칼로>, 시공디스커버리총서/  줄리 테이머 <프리다>

11. 파스칼 메르시어 <리스본행 야간열차>, 전은경 역, 들녘 /  빌 어거스트 <리스본행 야간열차>

12. 이사벨 아옌데 <영혼의 집>, 민음사/ 빌 어거스트 <영혼의 집>

13. 니코스 카잔차키스 <최후의 유혹> 안정효 역, 열린책/ 마틴 스콜세지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

14. 플로오벨 <마담 보바리> 김화영 역, 민음사끌로드 샤브롤 <보바리 부인>

15. 테네시 윌리엄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김소임 역, 민음사엘리아 카잔 <욕망이라는 전차>

16. 라끌로 <위험한 관계> 윤진 역, 문학과지성사/ 스티븐 프리어즈 <위험한 관계>

17. 밀란 쿤테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이재룡 역, 민음사필립 카우프만 <프라하의 봄>

19. 이자크 디네센 <바베트의 만찬>, 추미옥 역, 문학동네/ 가브리엘 액셀 <바베트의 만찬>

20. 테네시 윌리엄스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 민음사, 김소임 역/  리처드 브룩스 <뜨거운..>

21. 유진 오닐 <느릅나무 아래 욕망>, 열린책들 /  델버트 만 <느릅나무 밑의 욕망>

22. 폴 오스터 단편집 <오기렌의 크리스마스..> 열린책들, 김경식 역웨인 왕 <스모크>

23. 에드워드 올비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민음사, 강유나 역마이크 니콜스 <누가 버지니아...>

24. 캔 폴레트<바늘구멍>, 지성의 샘리처드 마퀸드 <바늘구멍>

25. 윌리엄 스타이런 <소피의 선택>, 민음사알란 파큘러 <소피의 선택>

26. 제임스 케인 <우편배달부는 벨을...>, 민음사/ 밥 라펠슨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27. 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 이윤기 역, 열린책들/ 장 자크 아놀드 <장미의 이름>

28. 미하일 하네커 <디 아워스>/ 마이클 커냉햄 <세월>, 정명진 역, 비채  

29. 엘리네크 <피아노 치는 여자>, 이병애 역, 문학동네/ 미하일 하네커 <피아니스트>

30. 아서 밀러 <세일즈맨의 죽음>, 강유나역, 민음사/ 폴커 쉴렌도르프 <세일즈맨의 죽음>

31. 필립 로스 <휴먼 스테인>, 박범수 역, 문학동네/ 로버트 맨튼 <휴먼 스테인>

32. 이언 매큐언 <속죄: 어톤먼트>, 한정아 역, 문학동네/ 조 라이트 <어톤먼트

33. 마르셀 레이몽 <책 읽어주는 여자>, 김화영 역, 세계사/  미하엘 데빌 <책 읽어주는 여자>

34. 안톤 체홉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오종우 역, 열린책/ 이오시프 커이피스 <개를 데리고있는..>

35.  이디스 워튼 <순수의 시대>, 송은주 역, 민음사/ 마틴 스콜세지 <순수의 시대>

36. 마누엘 푸익 <거미여인의 키스>, 송병선 역, 민음사/ 핵터 바벤코 <거미여인의 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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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글도 시원찮은데다 어줍잖은 생각을 글쓰기로 드러내려니 남루함 투성이다. 그나마 3,40대 때는 깊이야 그만두고라도 제법 긴 분량의 글을 쓰곤했지만 이마저도 쉽지 않다. 맘으로는 태평양 심해 보다 깊은 심오한 글을 쓰고싶지만 기껏 일기쓰듯 하루 일과를 끼적이는게 전부다. 사실 피상적인 견해 운운이나 글쓰기에서 비롯된 자괴감이란것도 글줄이라도 쓸때 말이지, 이도저도 아닌 허접글을 쓰는 내 경우엔 가당치 않다.  

멋진 글, 심오한 글을 쓰지 못할바에 타인의 견해나 글을 경청하고, 감상하는 것도 효율적이겠다. 그래서 종종 타인의 글을 통째로 퍼나르거나 인용하곤 하는데, 뜻밖의 횡재랄까, 두툼한 책 보다 깊은 생각꺼리를 건져낼 때가 있다. 뭐 월척이 꼭 특정한 장소나 깊은 물에서만 가능한게 아닐터이니 수시로 이곳저곳 살피며 발품이라도 파는게 내 할일이지싶다. 아래 글은 오늘자(2019. 3. 21) 한겨레신문에 게재된 작가 손아람의 칼럼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일부 옮긴 내용이다 .

********************************

" (...)작가들은 밤하늘의 별을 관찰하다 우물에 빠졌다는 그리스 철학자 탈레스와 같은 사람들이다. 시선을 별에서 거두어 자기가 빠진 우물을 둘러보는 순간 자괴감이 엄습한다. 자의식이 예민한 만큼 우물은 심연처럼 깊어 보인다. 그래서 생각을 쓰는 일을 직업으로 삼은 사람들은 대개 크고 작은 우울함에 시달린다. 생각의 가치를 인정해주지 않는 사회와 시대를 탓할 수도 있지만, 거기서 멈춘다면 생각을 직업으로 삼기에는 한참 부족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부조리는 세상의 탓이지만 우울함은 오로지 생각하는 자들의 몫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조리 때문에 우울해하지 않는다. 저 멀리 치워두고 아무렇지 않게 앞으로 나아간다. 작가들은 생각을 쓰기에 우울한 것이 아니라, 부조리에 정서적으로 반응하는 잠재된 기질 때문에 생각을 쓰는 일을 택하게 된다고 나는 믿는다.

얼마 전 오랜만에 연락해온 지인을 만났다. 의사인 그는 병원을 정리하고 글을 쓰려 한다며 조언을 구했다. 자신의 일이 근본적인 만족감을 주지 못하고, 결심의 때를 놓치면 그 상황이 죽을 때까지 지속될까봐 두렵다고 했다. 나는 그의 경험 범위를 넘어서는 가난에 대해 경고했고, 그는 ‘한번 사는 삶’의 방식에 대한 그의 오랜 고민으로 대답했다. 가난은 감수할 만할 것 같다는 것이었다. 그때 문득 화석처럼 희미해진 기억이 되살아났다. 작가의 길을 고민하던 20대 시절이었다. 나는 내 생각이 경제적으로 무가치하다는 평가를 받게 될까봐 두려웠고, 생각을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만큼 갈증에 시달렸다.

이 의사의 결단은 매우 드문 것이지만 그가 도달한 고민은 흔한 것이다. 생각의 실용적 가치가 작아질수록, 생각의 용도가 줄어들수록, 생각에 대한 굶주림은 커진다. 그래서 작가를 직업으로 택하는 계기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기저에는 비슷한 동기가 있다. 직업에 대한 회의, 의무로 포화된 가족 계약의 해체, 대인기피증과 같은 음성적 언어소통의 장애, 성폭력 피해의 경험, 내가 끌리는 일을 내 마음대로 하며 살고 싶다는 이기심. 서로 다른 이유로 생각을 표현할 기회와 방법을 찾던 사람들이 한길에서 만난다. 전공 공부 때문에, 혹은 우연한 구직의 결과로 글을 쓰게 되었다는 사람은 한번도 만난 적이 없다. 생각이 많아서 고통받는 작가들이 고통에 대해 생각하다 작가가 된다는 사실은 흥미로운 딜레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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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승선했던 300톤급 트롤어선은 달세나 부두에서 대략 일주일쯤 머물다가 식량과 기름 보급을 마친 후 라스팔마스 항구를 떠난다. 하루쯤 항해 끝에 아프리카 연안에서 멀지 않은 대서양 어장에 도착한다. 대략 북위 25도에서 20도 사이. 이윽고 투망을 마치면 한 두 시간 그물을 끌다 양망을 한다. 그렇게 하루종일 투망과 양망을 반복한다. 일하고 먹고, 자고, 일하고 먹고 자고, 보이느니 대서양 망망대해. 두 달쯤 작업을 하고나면 한 항차가 끝난다. 만선이 되면 다시 입항. 그리고 다시 출항. 3년을 채우면 계약기간이 끝난다. 20대 꼬박 10년 세월을 그렇게 대서양에 쏟아부었다. 청춘의 낭만도, 연애도, 우정도, 사랑도 몽땅 그물과 함께 바다에 쳐박히고 만거다.   

아, 지옥같던 원양어선. 뱃생활동안 나를 지탱해준것은 문학과 책, 모차르트, 베토벤의 음악이었고, LP음반이며, 글쓰기뿐이었다. 대서양 망망대해, 끝 없이 줄지어선 아프리카 모래사막, 모로코에서 세네갈까지 특징없이 이어지던 모래해변, 그 절벽들.....하지만 나를 끝내 버티게 해준 음악들, 헤밍웨이와 이청준의 단편들, 가스통 바슐라르, 글쓰기, 상상력, 몽상과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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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청준의 단편 <조만득씨>는 한 과대망상증 환자의 이야기다. 전직 이발사인 조만득은 원래 심성이 착하고 근면, 성실한 사람이지만 몇 푼 안 되는 재산을 말아먹는 동생과 가족들 뒷바라지 하느라 그만 과부하가 걸린다. 과부하가 한계치를 넘으면 정신병에 걸린다. 결국 정신병원에 입원한 조만득이 벌이는 에피소드가 소설의 주요 스토리인데,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한다.  

조만득은 자신을 어느 기업 사장쯤으로 여기고, 병동의 환자들, 간호사, 의사 누구랄것 없이 만나는 이들에게 고액 수표를 써준다. 수표는 그냥 하얀 종이이고, 백지에 볼펜으로 고액을 써넣는 식이다. 한편 조만득을 치료해서 정상인으로 되돌리는게 주치의의 임무인데 반해, 담당 간호원은 이렇게 반문한다. 조만득이 감당할 수 없는 고통스런 현실로 다시 돌아간다고 병원의 책임을 다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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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항상 현실이다. 책을 지나치게 읽다 몽환적인 세계를 진실로 착각하는 돈키호테는 일단 현실을 떠난다. 그러나 그가 스스로 아마디스가 되어 상상력으로 만들어낸 둘시네아를 찾아나선 순간, 그는 분명 환상의 자장내에 있다. 그러나 만약 오매불망 그리던 둘시네아를 만날 수만 있다면 - 이 경우 둘시네아를 만날지 여부는 다른 차원의 문제이고, 동시에 가능 불가능 여부 또한 서로의 가치관과 세계관의 차이이며 상대적인 문제라는 거다 - 그것은 환상이 아닌 진실, 혹은 현실로 바뀔 수 있고, 이때의 현실은 처음 떠난 현실이 아니라 소망했던 것으로 뒤바뀐 새로운 현실이다. 이처럼 현실(사실)과 소망하는 유토피아의 역설적인 관계에 대해 월러스 스티븐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바 있다.

“우리는 사실을 떠난다, 그리고 그것으로 돌아온다, 우리가 그랬으면 하는 사실로 돌아온다. 그것은 그전의 사실도 아니고, 너무나 자주 그래왔던 사실도 아니다.”

스티븐스에 따르면, 우리는 현실 혹은 사실을 떠나지만 언젠가 다시 현실(사실)로 돌아온다. 그러나 이 떠남과 돌아옴 사이에서 현실은 우리가 원하는 것과 일치한다. 왜냐면 이 경우 우리는 이 새로 돌아간 사실과 우리의 원하는 것의 차이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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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적 아름다운 꿈, 무지개빛 이상이 있었다. 점점 나이들어간다. 나이드는 동안 꿈은 퇴색되고, 누군가는 소중했던 꿈을 잃어버리기도 하지만 그중 몇몇은 옹골차게 간직한다. 녹녹치 않은 현실은 졸졸졸 시냇물처럼 흐르더니 급기야 급류가 되어 폭포수로 쏟아진다. 꿈은 그저 꿈일뿐인가? 현실에서 이뤄낸다는 게 쉽지 않다. 한 발 늦은감은 있지만 뒤늦게라도 알았다. 불가능할것 같다. 그런데도 40, 50 아니 60이 되도록 꿈을 잃지 않는다. 기어이 실현하는것만이 아름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설사 이뤄지지 않아도 좋다. 과정이 중요하니 직선주루 달리듯 질주 본능만이 최선이다. 이쯤되면 꿈이 뭔지 현실이 뭔지 어지럽게 뒤섞인다. 달린다. 달리다 쓰러져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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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 풍부한 가능성을 예견하고 때로는 언뜻 스친 신중함에 얼어붙어 지식의 이런저런 귀퉁이를 움켜쥐려 하면서 곤두박질치듯 흘러가는 세월은 인간을 휩쓰는 급류 같다. 인간은 바위에 부딪히기도 하고, 계속 이어지는 물보라와 얼마간 씨름할 때도 있다. 그러다가 마침내 나가 떨어져 어둡고 바닥모를 바닷속에 가라앉는다. 우리는 흘끗 보고 얼핏 감지할 뿐이고, 제 지론에서 찢겨져 나와, 빙글빙글 돌면서 삶의 이런저런 관점을 마주한다. 마침내 자기 의견을 끝까지 고수할 수 있는 자는 바보나 불한당뿐이다.

우리는 삶의 어떤 상황을 보고는 그것을 연구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가 가장 공들여 세운 견해는 한낱 인상에 지나지 않는다. 숨 돌릴 틈이 생기면 그 기회를 잡아 수정하고 조절해야 한다. 그러나 이처럼 정신없이 서둘러 달려가는 동안에, 소년이다 싶으면 어른이고, 사랑에 빠졌다 싶으면 다른 연령대가 시작되었고, 완전히 어른이 되었다 싶으면 무덤을 향해 쇠락하기 시작한다. 이처럼 혼란스럽고 덧없이 흘러가는 상황에서 일관성을 찾거나 명료하고 영속 적인 견해를 기대하는 일은 헛되다.

의견을 형성하는 것은 작은 방에서 사물을 소량 실험하는 과학이 아니다. 우리는 권총을 머리에 댄 채 이론을 세운다. 시간이 다하기 전에 우리가 직면한 일련의 새로운 상황에 대한 판단을 내려야 할 뿐 아니라 조치를 취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 자신도 불변의 항수로 간주할 수 없다. 이처럼 만물이 유전하는 상황에서 우리 정체성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듯하고, 가장무도회에서 내 가면이 가장 이상하게 보이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시간이 지나면서 싫어했던 것을 좋아하게 되고 좋아했던 것을 싫어하게 된다. 밀턴이 예전처럼 지루해 보이지 않고 에인즈워스는 그리 재미있어 보이지 않는다. 나무에 기어오르는 일은 분명 더 어려워졌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은 전처럼 어렵지 않다. 허세를 부려 봐야 소용이 없다. 숨바꼭질 세 번의 멋진 승부도 어째인지 묘미를 잃었다. 우리의 특성은 조절되거나 달라진다. 그에따라 의견도 조절되거나 달라지지 않는다면, 인생을 제대로 살지 못한 것이다.

스무 살의 견해를 마흔에도 똑같이 지니고 있다면 이십 년간 얼빠져 지내 온 것이고, 예언자는커녕 회초리로 많이 맞아도 현명해지지 않는 고집불통이 된 셈이다. 이는 런던 항에서 인도로 출항한 선장이 출발할 때 템스강 지도를 들고 갑판에 나와서는 고집스럽게 항해 내내 다른 지도는 사용하지 않는거나 마찬가지다."  - R. L. 스티븐슨 <게으른 자를 위한 변명>(민음사, 이미애 역) 중 '심술궂은 노년과 청춘'

*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1850~1894)은 영국태생의 작가이며<보물섬(1883)>, <지킬 박사와 하이드>(1886), 에세이집 <게으른 자를 위한 변명>(1881) 등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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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추어 트럼펫터로서 매일 2시간씩 연습을 하기란 말처럼 쉽지 않다. 하지만 단원 대부분이 전공자인걸 감안하면 비전공자인 나는 2시간이 아니라 3시간 연습을 해도 부족하다. 하루이틀도 아니고 매일을 꼬박꼬박 연습을 한다는게 정말 쉽지 않다. 더구나 60중반 나이고보니 신체적으로도 그렇고, 열정도 한계가 있다. 비록 한가하기는 하지만 독서실 업무도 빼놓을 수 없다. 좋아하는 독서, 글쓰기, 영화 등 하고싶은건 좀 많은가. 틈틈이 지인들도 만나야지......하지만 매일 연습만큼은 절대 놓칠 수 없다. 다 그만두고 베토벤 7번을 연주하려면 주력이 충분해야 하기 때문이다.

비단 트럼펫뿐일까. 뭐든 좀이라도 잘하려면 열정은 기본이고, 부단한 연습, 즉 꾸준함, 반복 연습과 학습이 필요하다. 불가피한 사정으로 연습을 할 수 없는 이유는 얼마든지 댈 수 있다. 하지만 설사 백 가지 타당한 이유를 대더라도 변명에 불과하다. 정말 중요한 일이라면 만사 제치고 하기 마련 아닌가? 그러니 뭔가 이유로 연습을 못했다는건 연습 그 자체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아서다. 

간밤 오케스트라 연습 연주는 지난 한 주 연습했던 결과를 시험할 기회였다. 과연 주력이 통할까? 그럭저럭 60프로정도는 해낸거 같다. 아쉽지만 이것만으로도 만족스럽다. 실전 연주회에 나서려면 100프로, 아니 120프로는 준비해야 겨우 6, 70 프로 밖에 해낼 수 없다.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은 길, 참으로 멀고 먼길이다. 자 다시 힘내고 오늘은 어젯밤 문제가 많았던 4악장 연습에 치중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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