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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갖고 있는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는 맹은빈 번역의 동서문화사판, 박형규 번역의 문학동네판, 연진희 번역의 민음사판 등 세 가지인데, 최종적으로 가장 젊은 세대에 속하는 민음사판을 읽기로했다.  

며칠에 걸쳐 민음사판 <전쟁과 평화> 전 4권을 통독했다. 통독이라곤 했지만 지루한 전쟁 장면과 3, 4권에 집중된 톨스토이의 역사관, 전쟁에 대한 논평 부분은 대강 건너뛰었다. 역시 예상했던대로 큰 감동은 없었지만 전쟁을 배경으로 온갖 인간군상의 모습을 세세할정도로 그려낸 작가의 필력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누구나 인정하듯이 <전쟁과 평화>는 톨스토이가 아니면 결코 쓰여질 수 없다할 정도로 스케일있는 대하소설이고, 전쟁을 테마로 이만한 작품을 쓴 작가는 아직 없다. 물론 솔로호프의 <고요한 돈강>을 거론할 수는 있지만 역사, 사상 스케일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할때 <전쟁과 평화>에 비교할 수 없다. 다만 예술성 차원에서 <안나 카레니아>와 <전쟁과 평화>를 비교했을 때 <안나 카레니나>가 더 뛰어나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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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 년의 고독>을 다시 읽는 중이다. 국내 첫 소개는 명번역으로 유명한 문학사상사의 안정효 번역판인데 당시 이 책도 구입하고 읽긴했지만 결국 완독하지 못했다. 비교적 마르케스는 국내 애독자가 많은 편이지만 역시 애독자가 많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와 달리 <전쟁과 평화>마냥 수많은 등장인물, 발음하고 기억하기 까다로운 라틴 아메리카 특유의 인명, 그리고 '마술적 리얼리즘'이라는 독특한 기법탓에 쉽게 읽어낼 수 없는 작품이다.

<백년의 고독>을 다시 읽게된건 민음사에서 간행한 특별판이 계기였다. 수많은 문학작품 중에서 어떤 한 작품을 읽는다는건 개인적 관심, 흥미 여부가 첫째 이유이지만 마지막으로 책을 손에 들기까지는 여러 우연적 요소가 개입된다. 바로 <백년의 고독>이 그런 경우인데, 사소할지 모르지만 특별판이 풍기는 장정의 고급한 매력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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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사랑 여인을 못잊어 51년 6개월 하고도 4일을 기다리는 남자의 이야기. 일견 로맨스 소설 같은 마르케스의 <콜레라 시대의 사랑>은 남녀의 낭만적 사랑 외에도 여러 의미를 내포한 작품이다. 나는 이 소설을 읽기 전에 마이크 뉴웰 감독의 영화를 먼저 감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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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oent 2019-12-30 1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리스인 조르바‘ 작가의 생애를 다룬 영화 <카잔자키스> 추천드립니다
 

1. 고소득자인 나나 동료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모여 주식을 연구하고, 어디에 투자할 것인가를 공부한다.
2. 책을 단 한 권도 읽은적 없지만 생활에 아무 불편함을 모를뿐더러 무엇보다 한가하게 책읽을 시간이 없다.
3. 외모, 어떤 직장인가, 경제여건, 사회적 위치만이 가장 중요한 결혼조건이다.
4. 어떤 이의 위치를 가장 잘 아는 방법은 그가 무슨 차를 소유했냐 여부다.
5. 의사니 변호사니 하는 사람들의 상당수가 세상살이 이치는 따르르꿰지만 인문적 지식은 무지하다.  
6. 교회다니면 무조건 천당간다. 기왕 나갈바엔 말빨서고 영향력있는 큰 교회일수록 좋다. 
7. 휴대폰 문자나 카톡 짧은 글, 휴대폰 검색글 읽기에도 바쁜데, 언제 책이니 긴글을 읽겠는가. 
8. 남이 부러워하고, 잘 산다는건 맛있는것 먹고, 홈쇼핑, 해외여행, 고급 양주 마시고, 좋은 옷입고 함께 모여 밥먹고 이야기하고.....
9. 그렇잖아도 골치아픈 세상, 그냥 가볍게 가볍게 농담따먹기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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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6시 기상해서 오전 9시까지 독서실 오전 일과를 끝내고 아들과 교대. 오전 9시~ 오후 6시까지는 순전히 내 개인시간이다. 오후 일과는 오후 6시부터 새벽 1시까지. 개인 시간은 낮잠 90분, 트럼펫 연습 90분을 빼면, 독서와 공부가 전부다. 맘만 먹으면 하루종일 책을 읽을 수 있다. 원하는 책 맘껏 구입하고 읽기, 그리고 글쓰는것. 오랫동안 바라고 소망하던 꿈이었다. 이게 지금 이뤄지고 있으니 더이상 무엇을 바라랴!

오전엔 <월든>을 드문드문 읽다가 점심식사 후에는 <전쟁과 평화>(민음사) 제 4권,  <백년의 고독>(민음사),  중국 근대단편문학선 <장맛비가 내리던 저녁>(창비)을 교대로 읽었다.  근자 독서의 중심에 발터 벤야민을 비롯한 인문학서가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지만, 와중에도 문학은 언제 어느때든 독서의 즐거움, 삶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다.

최근 출간된 민음사판 <전쟁과 평화>는 문학동네판과 같이 모두 네 권으로 이뤄졌는데, 톨스토이의 역사관, 사상관은 3권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저자의 역사가, 사상가로서의 모습을 알기위해서는 3권과 4권에 특히 주목해야한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은 국내에 처음 소개될때 이미 읽으바 있지만 제대로 이해했다고 할 수 없다. 사실 이 작품을 확실하게 이해하려면 상당한 수준의 소설문법과 독해력, 나아가 라틴 아메리카 역사에 대한 최소한의 배경지식이 요구된다. 장담하는데, <백년의 고독>은 괴테의 <파우스트>,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그렇듯 누구나 알고는 있지만 막상 읽은 독자는 손꼽을 정도에 불과하고 설사 읽었다해도 제대로 이해한 독자는 10프로 채 되지 않을 것이다. 

중국 근대단편선집 <장맛비가 내리던 저녁>(창비)에 수록된 루쉰의 단편 <아Q 정전>을 읽었다. 이 단편 역시 엔간한 독자라면 무수히 듣고 익히 알겠지만 이효석의 <메밀꽃 필무렵>이나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처럼 그저 제목만 아는 단편소설이 아닐까싶다. 내심 문학독자로 자부하고 있었지만 부끄럽게도 60중반에 이르러서야 겨우 루쉰의 위대함, 진면목을 알게되었다.

루쉰은 이 한 편의 단편만으로도 동양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인정받아야 할 작가라고 생각된다. 분량으로 치면 불과 몇 쪽 안되는 <아Q 정전>, 그런데 이 단편이 중국민족의 특성을, 당시 상황을 너무도 리얼하게 너무도 명확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과연 이 단편과 겨룰만한 작품이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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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벤야민을 읽는 중이다. 자본 비판, 유물론과 신학의 결합, 전통 예술의 아우라 상실과 복제 예술품의 등장 등 다양한 주제들이 언급되는 발터 벤야민의 작업은 주로 19세기 유럽, 특히 파리가 배경이지만 오늘날 한국사회에도 적용 가능하다. 하지만 우리에겐 더 급한 주제들이 있다. 가령 우리사회 곳곳에 널린 적폐들, 여전히 권력기관의 위세에 눌린 민주화 문제, 샤머니즘, 기복신앙을 맴도는 불교와 기독교, 화해무드인 남북문제, 노동문제, 성소수자, 근자 새롭게 대두된 난민문제 등등.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딜레탕트인 나는 벤야민을 어데까지 공부해야할까. 한마디로 쉽지 않은 노릇이다. 우선 지금까지 읽고 공부한 내용을 나열해본다. 

1. 아트 앤 스터디 8개 강좌 수강 
2. 평전, 전기, 해설(<아케이드 프로젝트>해설 포함) 등 2차서 읽기.
3. 벤야민의 주요 글을 발췌 수록한 반성완 교수의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읽기. (<일방 통행로> <베를린 연대기>, <베를린 유년시절>읽기 포함)

아마추어라면 누구나 여기까지 공부는 대체로 가능할 것이다. 한데 지금 내 앞에는 아직 더 읽어야 할 책들이 쌓여있다. 최성만, 최문규, 문광훈 등 국내 연구자들의 연구서, 보들레르의 시, 카프카, 프루스트의 소설, 그밖의 최근 번역된 새로운 평전, 최종적으로 <아케이드 프로젝트> <독일 비애극의 기원>을 비롯한 번역 원전들이 그것. 그렇다면 앞으로 어느정도 어데까지 더 파고들어야 할까. 

- 앞으로 공부 계획

원전 읽기, 연구서 읽기 등은 유보내지 포기하고, 위 1~3까지 이미 했던 공부를 다시 한 번 반복하는것도 좋겠다. 공부라는게 하기로들면 끝이 없다. 전문 연구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전공할것도 아닌데 굳이 끝까지 파고들 필요가 있을까. 한때는 발터 벤야민을 계기로 비판이론가인 아도르노, 호르크하이머 등 프랑크프르트 학파의 작업, 데카당한 난해시로 치부했던 보들레르도 이 기회에 함께 살펴볼까, 해봤지만 나의 지적 한계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고 무엇보다 더 재밌고 급한 공부들이 많은데 굳이 발터 벤야민 하나에 매달릴 필요가 있겠냐는 생각이 든다. 끝까지 파고들지 못하는거, 도중에 엉거주춤하기, 이래서 바로 아마추어 소리를 듣는지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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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엇이 나를 책으로 이끌까. 그 무엇이 나를 글쓰기로 이끌까. 일상의 일부에 불과한 단순한 습관일까. 아니면 지식에 대한 열정 때문일까. 하긴 그게 무엇이든 무슨 상관이랴. 그냥 읽고 쓰면 되는 것을. 어떤 것을 지속적으로 한다는 것은 그게 좋기 때문이다. 그냥 좋아서....단지 이게 이유라면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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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곧 어떤 글을 쓸까, 어떤 책을 읽을까, 어떤 영화를 볼까. 어떤 음악을 듣고, 트럼펫은 잘 연주할 수 있을까를 생각한다. 그것만이 자연스럽고 즐거워서다. 생각 같아선 평생 책 읽고 공부만하다 죽어도 좋겠다. 지극히 단조롭고, 재미없고, 정형화된 생활. 하지만 어쩌랴! 나만 행복하고 즐거우면 되니....   실상 내 생활에서 책을 읽고 공부하는 것 말고는 달리 할게 없다. 트럼펫 연습이 그나마 하는 유일한 소일거리이니 결국은 독서와 트럼펫 불기, 그리고 독서실 업무가 근자 내 생활의 전부라 할 수 있다.

 

특별히 누구 만나는 사람도 없고, 만나고싶지도 않다. 공식 모임은 오케스트라와 독서회 단 두 개지만 크게 불만은 없다. 아마 모임이 더 잦고, 만나야 할 사람이 많다면 오히려 번거로울 것 같다. 바라기는 독서회가 좀 활성화되고, 영화감상 모임이 하나쯤 있으면 좋을 것 같지만 모임이라는게 생각처럼 쉬운게 아니다. 더욱이 내 뜻과 맞는 모임을 만든다는건 언감생심이니 그저 현재의 생활에 만족해야한다.

 

쓰고 탄내가 날정도로 생두를 강하게 볶았다. 버리기가 아깝다. 열매 하나하나를 손으로 따고 건조하고, 완제품으로 만들기까지 공력을 생각하면 콩 알 하나 함부로 버릴 수 없다. 아침 식사로 바나나 두 개, 커피에 우유를 탄 밀크커피로 대신하다.

오전엔 <자유의 언덕>을 마저 감상. 오늘 중 한길문고에 들러 일전에 주문한 파트릭 쥐스킨트 <콘트라베이스>, 이상철 <죽은 신의 인문학>,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전집 두 권 가져올것. 오는 길에 독서실 벤치에 칠할 방부목용 페인트 두 통 구입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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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후반부터 60중반이 되도록 평생 책을 가까이했다. 이쯤이면 독서가 축에 드는셈인데, 나이에 따라 책읽기가 좀 차이가 있다. 가장 알찬 독서를 한 나이가 언제쯤일까. 청춘시절은 감수성이 예민한 나이라 문학작품을 읽기에 적절하다. 촉촉한 감수성이 동반되지 않으면 쉬 감동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점에서 30대까지는 문학작품을 읽기엔 최상의 시기일듯싶다. 그렇다면 나이든 지금은 어떨까. 

 

일단 감동면에서는 예전만 못하다. 가령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네 형제들>과<악령>을 접한 때가 10대후반이었다. 당시는 읽기는 읽었어도 제대로 이해 할 수 없었다. 반면에 감동은 지금보다 더 컸다. 젊은 시절 특유의 감수성 탓이다.

 

밤을 지새워 소설을 읽고, 감동이 컸던 장면을 떠올리며 몽상에 잠기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단지 좋은 작품을 읽었다는 느낌일뿐 감동은 크지 않다. 요즘 읽고 있는 <전쟁과 평화>만해도 작가의 사상과 이념에 주목되는 편이지 작품 자체의 미학이나 스토리에 몰입되진 않는다. 이점은 철학서를 비롯한 인문학도 마찬가지다. 젊은시절의 독서는 비록 이해도는 떨어지지만 감동만큼은 결코 적지 않다. 다만 인문학서는 논리적 이성에 따른 이해가 필수적이기 때문에 오히려 젊은시절보다 지금이 더 읽기에 적절할 것 같다. 

 

어느덧 40여년이라는 꽤 긴 세월을 책을 읽어왔다. 한데 나이 든 지금이 오히려 독서열이 더 왕성하고, 이해도도 깊다. 문.사.철 모두를 두루 탐독하고, 문학만하더라도 세계문학을 집중해서 읽기 때문에 열정으로보면 결코 젊은 시절에 뒤지지 않는다. 더구나 이해도가 과거와는 비교도 안되게 깊기 때문에 책읽기에 최상의 시기가 아닐까싶다. 다만 체력이나 그밖의 사정으로 집중력을 길게 가져갈 수 없다는것 하나가 문제일뿐이다. 그 외에는 시간, 돈, 열정, 그 어느것도 뒤질게 없다. 어찌보면 독서는 60대부터라는 말이 절로 나올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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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방, 나만의 공간 확보. 늘 생각하면서도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그동안 옥상 컨테이너를 이용한 탓도 있고 최근에 새로 꾸민 서재와 트럼펫 연습실을 겸한 큰방이 있지만 실제는 내 방이라고 할 수 없다. 가족들이 무시로 출입하는데다 큰방에 딸린 화장실에 세탁기까지 있다보니 들락날락 도무지 어수선해서 조용히 있을 수가 없다. 더구나 이 무더운 여름에 냉방이 안 되니 실상 여름 한 철은 책을 보관한 서재라고나 할밖에.  

 

나 혼자만의 방이라니, 사치가 아닐까싶어 차마 엄두를 낼 수 없었다. 오랫동안 방치된 독서실 빈방이 있었지만 이조차 선뜻 내키지 않는다. 행여 이용자가 있지않을까, 이렇게 좋은 방을 굳이 나 혼자 사용해도될까. 어쩔 수 없는 소시민 근성은 결단을 자꾸 지연시켰다. 좀 더 자신에 이기적일 필요가 있다. 지금 좋아하는 것, 당장 하고싶은게 있다면 뭘 망설여야하나. 일단 나만의 방을 만드는게 우선 순위다.

 

급기야 35도까지 치오르는 수은주를 보니 더 이상 미룰 수 없어 그동안 사용하던 큰방에서 독서실에 딸린 311호실로 옮겼다. 독서와 글쓰기, 낮잠은 조용한 이곳을 이용하고, 트럼펫 연습은 책으로 자연방음이 된 큰방을 이용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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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데이비드 소로 <월든>에서 인적이 없는 월든 호숫가, 숲속 자연생활을 하는 소로와 <그리스인 조르바>의 조르바는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이다. 가령 소로는 거의 금욕적인 생활 위주여서 여성은 물론이고 육식도 멀리한다. 그는 소박하고 잔잔하게 살지만 삶의 기쁨을 얻는데는 조르바와 별반 차이가 없어보인다. 한 사람은 욕망의 절제를 통해서 행복을 얻는반면, 다른 한 사람은 아예 욕망조차 뛰어넘는 자유분방한 삶을 산다. 이처럼 외견상 두 사람은 전혀 상반적인 삶 같지만 인습의 굴레에서 벗어나고자하며 자유로운 삶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그들은 물욕, 명예욕, 권력욕 등 세상의 그 어떤 가치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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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친정에 가고 지훈이와 둘이서 짜장면으로 점심을 때웠다. 화염에 불타는듯한 여름 한낮. 다시 독서실로 오다. 311호실. 최근에 새로 만든 나의 휴식공간이자 공부방이기도 하다. 아침부터 저녁 근무전까지 여기서 줄창 시간을 보낸다. 워낙에 조용한 독서실 방이라 책을 읽거나 잠을 자거나 둘 중 하나밖에 할게 없지만 그래도 이런 무더위에 시원하고 누구 찾는 사람없이 최상의 안식처이다.

 

 권의 책을 교대로 읽는다. <월든>, <전쟁과 평화> 권용선의 <발터 벤야민의 공부법> <발터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 조재룡의 <번역과 책의 처소들> <번역의 유령들>, 수잔 벅 모스 <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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