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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공예가 L씨, 함께온 지인들과 비토리오 데 시카의 <해바라기>를 감상하다. 며칠전 함 들르겠다고 기별이 왔는데, 정말 영화를 감상하겠다며 찾아오신 거다. 독서실 빈방이라 좀 작긴하지만 120인치 스크린도 버젓이 내걸고, 테이블에 DVD장까지 비치하고보니 제법 감상실 티가 난다. 영화 끝나고 커피 한 잔 하며 감상평을 나누다.
내심 수준높은 예술영화 감상회를 해보고야 싶지만 현실은 요원하다. 지난 수년간 별의별 방법을 다 써봤지만 역시 한가하니 영화를 보겠다는 사람이 없을뿐더러 더구나 이 작은 동네에서 예술영화라니! 어림없는 일이다. 비단 영화감상회뿐 아니라 다른 문화모임도 마찬가진데 이것저것 조건 따지다간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저 오늘 했던 방식대로 일단 책을 읽고싶은 분, 영화를 보고싶다는 분, 음악을 듣고싶다는 분, 누구라도 관계없이 모두 수용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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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뮤직 포 유'의 G선생님, 필로무지카 멤버인 K씨 Y씨랑 함께 저녁식사하다. 실은 엊그제 G선생으로부터 저녁식사나 함께하자고 연락이 왔던 터다. 뒤늦게 알았는데 금주 토요일에 '토요음악회'를 한다고. 정확히 16년전인 2003년 3월 G선생님과 함께 시작했던 토요음악회가 벌써 187회째라니,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느덧 여든줄이신 G선생님의 열정과 저력에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과연 나도 나이들도록 저렇게 살 수 있을까. 저녁식사를 마치고 일행과 함께 다시 포유로 돌아왔다. 비록 쌀쌀한 겨울날씨지만 인적 하나 없는 은파 호수를 바라보며 밤길을 걷자니 감회가 새로웠다. 대체 무엇에 씌여 이런 일들을 벌이는 걸까. 그것도 평생을 말이다. 여하튼 음악에 대한 열정에 관한 한 G선생님이나 나나 한치도 다르지않다.
3. 일기 2003. 3.
겨울만되면 정기행사 치루듯 어김없이 천식이 도지니 사람 죽을 맛이다. 딴에 조심한다고 예방주사까지 미리 맞았건만 웬걸, 올해도 어김없이 독감에 이어 기침이 재발했다. 쉴새없이 기침을 하다보면 맥이 빠져 글이고 뭐고 만사가 다 귀찮고, 아예 집밖으로 나가고싶지도 않다. 자연히 발걸음이 뜸해져 집에 틀어박히기 일쑤다.
평소 자주 들르던 카페 '뮤직 포 유'에도 갈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포 유'의 강 선생께서 급히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그동안 바깥 나들이를 피한채 집 주변만을 맴돌다 보니 나 역시 강 선생님 소식이 궁금했다. 마침 기침도 좀 멎는 듯 해서 전화 받자마자 부리나케 달려갔다. 카페에 들어서는 나를 반기던 선생께서 인사하다 말고 그러신다.
- 조 선생! 우리 일 한번 벌려봅시다. 다른게 아니고 내가 오래전부터 멋진 음악감상회를 생각하고있었는데 고거 한번 해보자고요.
- 아니, 음악감상회라니요?
워낙 갑작스런 말씀에 영문을 몰라하던 나에게, 선생께서는 아무말 말고 무조건 당신 하자는 대로 함께 해 보자고 다그쳤다. 내가 영화를 잘 아니까 영화음악을 중심으로 감상회를 열어 보자는 거다. 이런 식으로 시작된 선생님과의 이야기는 차츰 발전해서 결국 금주 토요일(2003년 3월 8일) 오후 3시 '포 유'에서 첫 번째 토요 음악감상회를 열기로 결정했다. (*주공 4차 아파트 정문 맞은편 '사랑가정의학' 2층)
처음엔 극구 사양했지만 강 선생의 압력(?)이 워낙 거센 바람에 결국 승낙하게 되었는데, 일단 음악회 컨셉은 함께 짜기로 하고, 포스터와 초대할 분들의 연락 등은 강 선생이, 그리고 영화 해설과 진행은 내가 맡기로 하였다.
어제는 장장 4시간에 걸쳐 음악 선곡과 영화 장면들을 체크 했고, 오늘은 퇴근하자마자 두 대의 비디오를 이용해서 장면들을 모두 편집한 후 비디오로 카피 완료했다. 저녁 9시무렵 겨우 완성된 테이프를 들고 '뮤직 포 유'에 들러 오디오 음악과 편집된 장면들을 대강 맞춰 보다가 이제 방금 귀가했다. 웅장한 오디오 음악과 편집된 영상을 보자 강 선생께서는 기분이 좋으신지 한마디 하신다.
-조 선생. 내 장담하는데, 이번 음악회 분명 성공할거요.
'포 유'에는 무려 4,000만 원대에 이르는 초호화급 오디오 시스템과 60인치 대형 스크린에 피아노까지 구비되어 있다. 그러니 이런 음악감상회를 열기는 최상의 장소이다. 그래서 만약 이번 음악회가 성황리에 끝난다면 매월 한번씩 감상회를 개최하고, 내친 걸음에 영화감상회까지 시도해 볼 작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