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의 <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2016년)은 극중 남자 주인공이 자기가 사귀는 연인이 누구인지, 그녀의 진정한 실체가 무엇인지를 탐색하는 과정을 다룬 내용이라네. 주인공은 자기가 본것, 자기 판단을 믿지 못한채 실망스럽게도 친구가 제공하는 정보만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이다 결국 자신이 가장 믿고 가까워야할 연인의 말을 믿지 못하고 친구의 말을 더 믿는 꼴이 되지.    

이 영화는 거듭해서 관객에게 묻는다네. 당신이 알고 있는 상대가 누구인가? 단 타인의 견해나 주장을 믿지 말고, 당신 자신이 직접 보고 느낀대로, 경험한 것에 근거해서 줏대있게 말해봐라. 어렵쇼! 자기가 본 바를 말하라니 남이 본것을 또 옮기는구만. 당신 앵무새야? 꼭두각시야? 왜 당신의 여자인데도 자신의 생각을 믿지 못하고, 기껏 타인의 견해에 기대나? 그렇게도 줏대가 없어? 그렇담 당신의 소중한 연인을 되찾기 위해서라도 고생깨나 해야겠군.

홍상수에 따르면, 제 아무리 귀한것이 있어도 이를 알아보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냐. 만약 당신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당신의 것이 진정 어떤 것인지 모른다면 그걸 알기위한 과정이 비록 험난해도 회피하지 말고, 하나하나 부딪치고, 돌파하고, 고민하고, 갈등하며 고난의 여정에 동참해야 한다는거지.   

사실 나는 홍상수의 영화를 꽤나 좋아하는 편이라네. 왜냐면 영화 속 스토리가 바로 내 얘기를 하는것 같아서지. 대개 그의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은 위선적이거나 찌질한 남자들이 대부분인데 영락없이 내가 그렇게 살더라니까. 그런데도 사람들은 마치 감독 자신의 생활고백이라도 되는양 그의 사생활을 유추하고 결부시키는데 익숙하더라고. 실은 자신이 그러고 있는데도 말이지. 만약 어떤 작품이 정확히 내 자신과 우리를 이야기하고 있다, 라고 느낀다면 이 작품은 이미 보편성을 획득한게 아닐까? 당연한 말이지만 모든 예술가들은 작품을 통해 자신을 말하든가, 경험, 생각 등을 드러낸다네. 이때 좋은 작품은 예술가를 뛰어넘어 보편성을 획득하지만 그러지 못하면 잠꼬대에 불과하겠지.   

그래서 홍상수의 영화를 볼 때 유념해야할게 있는데, 제발이지 홍상수의 사생활, 사적인 것들을 영화와 결부시키지 말라는 것이네. 그러다간 영화를 감상하는게 아니라 그의 사생활 탐구가 주가 될수 있으니 말일세. 이점은 <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도 마찬가지일게야. 홍상수의 영화를 감상하는 이들은 으레 호기심 많은 자들이 그렇듯 굳이 영화와 사생활을 연결시키거나 알리바이 찾기, 퍼즐 맞추기를 하는 등 뻘짓들을 하더라구. 영화는 그냥 영화 아니겠나? 홍상수의 영화는 그냥 영화이고 픽션일 따름이라는거지. 만약 이점을 잊으면 홍상수의 영화를 제대로 즐길수 없다는거 꼭 잊지 말기 바라네. 

아참 깜박한게 있었군. 헤밍웨이가 천하의 바람둥이였다는거 알고 있겠지? 푸코, 마르셀 프루스트, 지드, 서미싯 모옴 등은 게이였고,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는 미성년자 강간범으로 법정에 섰으며,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는 게이 소년한테 끔직하게도 맞아죽었지. 뿐만인가. 위대한 러시아의 소설가 도스토예프스키는 구제불능의 노름꾼이었으며, 예술의 윤리성을 강조한 톨스토이는 만년에 가정불화로 객사했다네. '내로남불'의 원조랄까, 저잣거리 흔하디 흔한 '불륜로맨스'를 인간조건의 아이러니함으로 승화시킨 안톤 체호프의 단편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자>는 작가 자신의 불륜 로맨스 경험을 소설화한거지만 오늘날 독자들은 체호프의 사생활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이 이 단편의 위대함을 찬양하기에 바쁘더군. 애고~ 예술가들의 별난 사생활을 열거하려면 하루도 부족할테니 이정도로 대충 줄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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