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근래에는 드문 일이었다. 왜 이걸 주문했지, 읽는 동안 숱하게 던진 질문들. 미국 최대 출판사 랜덤하우스 교열국장이 쓴 『교정이 필요 없는 영어 글쓰기』. 영어 글쓰기가 가능하고, 어느 정도 독해 능력을 갖춘 이에게 필요한 책이니까. 한글 자막 없이는 외화 보기가 힘든 내게 필요한 책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 책을 구입하고 읽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미국 최대 출판사 랜덤하우스 교열국장(글쓴이)에 대한 호기심, 문장 기술자로 살면서 터득한 노하우가 궁금했다. 다 읽었다, 하지만 완독했다 할 수 없고, 정독했다고 할 수도 없다. 

인내심에 채찍질을 하며 읽다, 문득 발견한다. “대화체 문장을 이텔렉체로 표기하는 방식이 유용하긴 하지만 그래도 어쩌다 한 번씩만 써야 한다.(대화체 교열하는 법)” 필자는 늘 이런 식, 과다복용은 금물, 이 책 곳곳에서 팁(Tip)을 제공하는 방식이다. 다음이 흥미롭다. “우선 독자들은 이런저런 방식으로 읽으라고 대놓고 지시받는 걸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렇게 해보시라. “……강조할 대목을 대화 중간에 넣어 다른 말과 뒤섞기보다 문장 끝으로 빼는 것도 한 방법이다.” 그렇게 다음에서 다음으로 조언의 징검다리 건너며 책장을 넘기는데, 자꾸만 한 문장이 뒷덜미를 잡는다. “독자들은 ~ 달가워하지 않는다.”


02. 때문에 한동안 쓰는 일이 두려웠고, 쓰기를 멈췄다. 가끔 올리는 독후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하다. 읽자. 작년 4월 우리말 콘텐츠에 포함된(국내 독자들의 사랑 덕분에 최근 양장본으로 재출간됨,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2022-03-14) 책을 뒤늦게 읽다, 발견한다. “관심은 집중이 아니다. 집중은 강제할 수 없다.”(7.시몬느 베유처럼 관심을 기울이는 법, 233쪽) 베유의 말씀을 재인용한다.


“무엇보다 우리의 생각은 텅 빈 채로 기다려야 하고 그 무엇도 추구해서는 안 된다. 그저 자신의 생각에 침투할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 한다. ……모든 문제는 수동성의 결여에서 생겨난다.” 

모든 문제가 수동성의 결여에서 생겨난다고? 이런 베유의 선언 소개에 앞서 저자는 집중과 관심을 설명한다. 집중은 수축한다. 관심은 확장한다. 집중은 사람을 피로하게 한다. 관심은 피로를 회복시켜준다. 집중은 생각을 한 곳에 모으는 것. 관심은 생각을 유도하는 것…


03. 나는 왜 책을 읽는가, 드라마를 보고, 영화를 보는가? 왜, 무엇 때문에 무엇인가를 받아들이는가. 또한 나는 왜 글을 쓰는가, 나의 주장을 말에 싣는가? 책을 쓰고, 드라마를 만들고, 영화를 제작하는 사람들은 왜 그것을 하는가? 콘텐츠를 생산하는 사람과 그런 콘텐츠를 소비하는 사람들의 대화(소통)는 어떤 식이라야 하는가, 두 책의 두 부분에서 필자는 어떤 ‘발견’을 한 셈이다. 콘텐츠를 그냥 ‘책’이라고 하자. 책을 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뭔가를 발견하기 위해서다. 어떤 의미, 읽은 이 스스로가 발견한, 읽는 이에게 남다른 의미다. 

벤자민 드레이어(교열국장)는 글쓴이가 의미 있는 무언가를 글에 담아 누군가와 공유하려 할 때, 가능하다면 그 의도를 드러냄을 삼가라 조언한다.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물처럼 독자들이 읽는 동안 문득 ‘발견하게’ 하자. 대화체 문장만이 아니라 어떤 대목을 이태릭체로 표기하는 순간, 독자의 관심은 평정심을 잃게 되고, 그 발견은 독자의, 독자만의 순수한 발견이 아니게 된다, 뭐 이런 얘기 아닐까. 

시몬느 베유는 콘텐츠 소비자 입장에서, 책 읽기를 통해 독자의, 독자 스스로 발견하려면 어떻게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지, 구체적인 가르침을 준다. 무엇인가 발견하기 위해 ‘집중’하면 할수록 그 발견(깨달음)의 진가는 떨어지게 되는 것이고, 그 실체적 진실과 온몸으로 만나기는 불가함을 역설하고 있다. 


04. 필자만의 발견이라고 할 수는 없다. 사소해 보이지만 그래도 책을 읽는 동안 필자가 발견한 필자의 발견이다. 그러고 보니 오래전에 이런 발견의 소중함을 역설한 이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다. 그는 “우리의 주제는 시학이다.”라는 문장으로 시학을 시작한다. 그리고 이 주제는 (그리스) 비극 위주로 풀리며, 비극 장르의 위대함을 증명하였다. 이 비극의 구성 요소(6가지)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사건의 짜임새, 즉 플롯이다. 플롯은 비극의 제1원리, 곧 비극의 혼이다. 플롯 창작에 뛰어난 사람이 좋은 비극작가다. 그런 플롯 창작에서 핵심이 ‘발견’(무지의 상태에서 앎의 상태로 이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발견에 급반전이 따르는 「오이디푸스 왕」(소포클레스)을 최고의 비극으로 꼽는다. 다행히 우리말로 (원전) 번역된 지 40여 년 된 고전 『시학』에서 그 꽃이라고 할 수 있는 ‘발견’을 직접 발견하시길.


05. 독자들이 지금 콘텐츠를 소비-책을 읽는-한다. 자신만의 ‘발견’을 위해서다. 한마디(사람의 말, 대사)에는 그 사람과 그 말을 듣는 사람의 거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앞뒤 어떤 부연 설명보다도 힘이 있다. 한마디에서 플롯의 창조자가 애써 숨기려고 했던 바, 플롯의 소비자가 스스로 찾고자 하는 것을 찾을 수 있다. 그래서, 교열국장은 이탤릭체 사용을 극도로 자제하라 했다. 시몬느 베유는 그런 유혹에 이끌리지 않고 대상을 만날(발견할) 준비를 하시라, 강조했다. 

사실, 아리스토텔레스까지 초빙하지 않더라도 동양 사상에는 으레 ‘무위(無爲)’가 각인되어 있다, DNA처럼. 우리 가곡 한 대목은 어떠한가? 중학교 생물 선생이던 심봉석 작사, 같은 학교 음악 선생(이면서 제5차와 제6차 고등학교 음악 교과서 저자) 신귀복이 작곡한 <얼굴>.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 발견을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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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13 18: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timeroad 2022-04-11 1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글을 올린 이유가 담겼군요.

Meta4 2022-04-12 12:25   좋아요 0 | URL
덕분에 평소보다 읽는 데 집중하고 있답니다.

Meta4 2022-04-13 1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 제목을 떠올리다 검색한, <얼굴>이란 곡이 만들기까지 에피소드가 흥미롭네요,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시겠지만..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려 1967년 3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신귀복 작곡가는 서울 동도중학교 음악 교사였다. 얼굴을 작사한 심봉석 시인 또한 같은 학교 생물 교사로 근무했다. 교장 주재로 열린 신학기 교무회의가 계속 길어지자, 지루해진 심봉석 시인이 보고 싶은 ‘첫사랑’을 떠올리며 공책에 얼굴을 그리고 즉흥시를 썼다. 동료 교사 신귀복은 심봉석 시인의 그림과 시를 보고 즉석에서 5분 만에 멜로디를 입혀 곡을 완성했다. 같은 중학교 음악교사 신귀복과 생물교사 심봉석의 번뜩이는 재치가 만나 번갯불에 콩 튀기듯 후다닥 완성한 얼굴이 불후의 명곡으로 50년 넘게 온 국민의 사랑을 듬뿍 받을 줄 그 누가 알았겠나! 신귀복 작곡가는 이 노래를 1970년 가곡집에 수록했다. 그리고 4년 후인 1974년 윤연선이 리메이크하며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고 지금까지 인기를 이어오고 있다. 노래가 나온 이후 얼굴 작사가 심봉석 시인은 헤어진 첫사랑과 재회하여 결혼에 성공했으니 <얼굴>이 행운의 오작교 역할을 톡톡히 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