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전집 세트 - 전7권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플라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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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아보기에 익숙해졌지만, 자막이 필요한 외국 드라마 연속시청은 쉽지 않다. 눈이 아프다. 또한 OTT시장의 활성화로 예전에 CD나 화일 내려받기로 시청했던 대작들을 쉽게 접할 수 있어, 신작이 마땅치 않으면 '다시보기'가 더 신선한 경우가 있다. 필자는 책읽기나 쓰기에 지장을 주지 않을 만큼 익숙한 '국내' 드라마(혹은 영화)를 모니터 한 켠에 켜놓고 일을 본다. <변호인>도 그렇게, 다시 시청했다기 보다는 청취하던 중이었다.


사무장: 아, 우리 변호사님 영어 억수로 잘하시나봐.

미스문: 와~ 다 영어네요. 변호사님 이게 뭐해요

변호사: (장갑으로 유리컵을 만지작거리다가, 웃으며) 저 난이 왜 저렇노. 비실비실하다, 물 좀 줘야겠다. 미스 문아. 

미스문: 오케이! 난이 말라비틀어져 버렸네에.(화분을 들고 밖으로 나간다) 

변호사: (사무장에게 다가가며) 이게 한글이면 사무장님이 읽을라켔어요. 어차피 가오잡을라고 하는 것, 기왕이면 영어가 낫지에. 

사무장: (이삿짐센터 직원에게) 제일 잘 보이는 데다가 꼽아주시요.(<변호인> 24:20~ )


젊은 변호사 시절의 노무현 전 대통령 자전적 기록을 영화로 만든 <변호인>. 부산에서 변호사로 개업하여, 부동산 등기 업무로 진출, 대박을 터트린 송우석 변호사(송강호). 어엿한 변호사 사무실을 구해(여직원도 뽑고), 입주하는 날의 풍경, 하드커버로 된 책(전집 중 1권) 한 권을 펼치며 사무장이 송변에게 묻고 대답하는 과정이다. '재미'를 위해 삽입된 그렇고 그런 에피소드 중 하나일 뿐인데, 문득 다른 생각이 든 것이다. 

그 하드커버 전집이 영어 원서가 아닌, 한글 번역판이었다면 어땠을까? 그 내용은 접근성이 호락호락하지 않은 대화편들로 가득한 플라톤전집(전7권)이었다면.

사무장은, 송변은, 미스문은 플라톤을 통해 소크라테스를 만날 수 있었을까? 고전번역가 천병희 선생의 원전번역 역작 가운데 하나인 [플라톤전집 세트](전7권)은 2019년에 봄, 이즈음에 완간되었다. 번역가 한 사람이, 그것도 철학전공자가 아닌 독문학자(희랍어와 라틴어에 정통한)가 위작까지 포함하여 플라톤이 집필한 대화편 전편을 읽기 쉬운 한글콘텐츠로 생산했다는 것은 그 자체가 출판계에만 국한되지 않는 빅뉴스였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책에 대한 책을 쓰는 인문활동가가 천병희 선생의 대화편들로 독서토론을 진행하면서 했던 이야기를 잊을 수 없다. <국가>를 읽을 때였다. "영어 원서로 <국가>를 읽을 때, 뭔 말인지 이해되지 않은 대목이 적지 않았는데, 구름 걷히듯 풀리더라." 그런 얘기였다.

격문을 쓰듯 국내 번역환경 개선을 주창한, <번역청을 설립하라>(박상익)를 전자책으로 구매해 읽으면서(2018년 출간) 플라톤전집 완역까지의 과정을 독자로 따라온 사람으로서 감회가 남달랐다. 더구나 천병희의 원전번역은 전공분야인 문학에서 시작하여, 역사 그리고 철학까지 망라하고 있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플라톤 대화편 원전번역은 철학전공자들에 의해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다. 전공자들은 텍스트만이 아니라 그것이 가지는 철학사적 의미를 포함한 주해서이고, 그래야 하기에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고, 우리 번역환경을 생각하면 경제적으로도 쉽지 않은 결기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서양 고전, 서양 철학에 관심 있는 모든 독자들이 철학전공자들일 수는 없다. 소를 물가에 까지 몰아가는 일, 그리고 물을 먹거나 말거나의 선택은 그 소가 알아서 할 일이다. 독자들이 플라톤 대화편 읽기에 접근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이 부분은 천병희 선생님의 역할이다. 덕분에 이 분야의 매니아들이 늘어난다면, 철학서적의 번역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천병희의 플라톤전집은 모두 7권인데, 위작으로 확정이 되었거나 위작 논란 중인 작품들,  '서한집' '용어해설' 등 대화편으로 볼 수 없는 것들까지 수록한 전집 7권을 제외하면, 6권에게 걸쳐 25편쯤 된다. 전집7에 실린 <알키비아데스1.2>와 <힙피아스1.2>를 각 편으로 치거나 한 편으로 보거나, 7권의 다른 대화편들을 고려한다면 이 전집에는 플라톤의 대화편들이 최소한 28편 이상 수록되었다고 할 수 있다. 

<번역청을 설립하라>(박상익)에 담긴 한 나라의 기간산업인 번역환경의 어려움을 고려할 때, 고전번역가 한 사람과 한 출판사의 끈질긴 노력으로 플라톤전집을 완간했다는 것은 뉴스 중의 뉴스이다. 그러나 척박한 번역 현실에 대한 반증이기도 하다. 완벽한 번역이란 없다. 하지만 완전에 가까워지려는 노력은 독서가들(소비자)의 꾸준한 독서가 이어질 때 가능한 일이다. 조사 하나, 쉼표 하나를 첨삭하여, 가독율을 높이기 위해 기울인 번역서의 편집진들에게도 감사해야 할 일이다. 원전번역도 좋지만 읽히는 번역서를 위해서는 필요한 일이 있다. 박상익 교수가 책 말미에 수록해놓은 <번역가를 꿈꾸는 젊은 학도들에게>라는 당부 말씀이다. 절절한 제언이지만 그 가운데 하나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3. 번역가는 편집자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도움을 적극적으로 요청할 줄 알아야 한다. 독립적 사고를 하라는 것은 편집자의 적절한 도움마저 뿌리치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약점 없는 인간 없듯이 결점 없는 번역도 없다. (너 자신을 알라!) 편집자는 한계를 극복하게 해 주는 최선의 동지이며, 번역 결과물의 수준을 끌어올려 주는 고마운 동료다. 번역가의 평가는 오직 '결과물'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명심하자." 


여기에 좋은 번역을 읽는 독자들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영화 주인공 송변에게 영어 원서 전집은 '가오'를 잡는 도구였다. 벽돌책, 영어식으로 표현하자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천병희의 플라톤전집이라면 상황은 달랐을 것이다. 그렇게 떠나지 않고 지금도 경남 어디쯤 사저에 살아있다면 영화 속 주인공 실제 인물은 자신의 전문분야인 <소크라테스의 변론>부터 대화편 한 권, 한 권씩 섭렵하며 이곳 어딘가에 리뷰를 올리는 중일 수도 있다. 낱권으로 먼저 발행되었던 책들 재고가 소진되고 전집에 편입되면서, 주머니가 헐거운 독자들에게 하드커버는 부담이 될 것이다. 주요 대화편은 최근 상태의 번역을 반양장으로 출간해놓은 상태, 맛보기로 혹은 시험삼아 읽어볼 수 있다, 굳이 '있어 보이려고' 전집을 사기보다는. 좋은 번역을 훌륭히 소비하는 독자가 되는 길, 좋은 번역에 참여하는 길이기도 하다.(끝) 


[이 리뷰 맨 앞에 썼던 글을 아래에 옮겨 놓는다.]

[OTT시장에 뛰어든 애플TV가 막대한 제작비를 쏟은 <파친코>(8편)를 앞세워, 가입자 늘리기에 총력을 다하고 있다.  동명의 원작소설도 세계 독자들의 찬사를 받은 바 있거니와 실상과 달리 'K-드라마'로 세계 시청자들이 오인하는 등, 한류라는 패스트트랙에 올라탄 것이 싫지는 않은 모양이다. 그러나, 8편 중 3편을 공개하고(3월 25일), 매주 금요일 마다 1편씩 올리는 식으로, 시청자들은 애태우는 마케팅을 선택했다. 그리고 1편을 무료로 공개한 상태이다.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주말을 이용하거나 평일 밤샘해서라도 전편 몰아보기에 익숙해진 (한국)시청자들의 상태를 잘못 읽은 것은 아닐까. 전편이 공개되는 4월말 이후가 되어야 그 결과를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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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eroad 2022-03-30 2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참 웃다가 갑니다. 그리고 급 우울. 그립네요.

Meta4 2022-03-30 21:07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노통의 변론은 죽음 그 자체였죠. 소크라테스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