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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파네스 희극전집 1 ㅣ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아리스토파네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0년 11월
평점 :
머무는 곳이 초등학교 옆이라 좋은 점이 있고 또한 불편한 점이 있다. 유흥업소들이 없어 조용하다 못해 고요하다는 점이 최고의 장점이라면 교문 앞 작은 사거리의 신호등은 좀 그렇다. 겨우 2차선 축에 드는 길인데, 신호등이 칼 같이 지켜지는 것이다. 오가는 차량도 많지 않아 무시하고 건너면 되는데, 한두 명 혹은 서너 명, 나라의 내일인 초등학생 몇몇이 파란 신호등으로 바뀌길 기다리며 추위를 견뎌내고 있는 것. 나라의 미래들 앞에서 “이러면 안 되지.” 하면서도, ‘녀석들만 없으면 진작에..’라는 생각을 동시에 하는 것인데, 그럴 때마다 그런 자신을 발견하는 것에 마음이 불편해지는 것이다.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19세기 영국의 시인 윌리암 워즈워드의 <무지개>라는 시가 그 출처다. 그런데, 이 한마디가 인터넷으로 뉴스를 접할 때마다 떠오르고, 학교 앞 신호등에서의 불편함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종이신문을 언제 읽어보았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요즘 사람들은 그렇게 인터넷 매체 등을 통해 뉴스를 접하는데 A/S가 필수인 가짜뉴스가 범람하고 있다. 포털 상위에 노출되는 뉴스일수록 더욱 그렇다. 기성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 특히 부끄럽다. 팩트체크는 기본이 되었고, 팩트체크를 하는 뉴스비평이란 분야가 유투브방송의 주요 메뉴가 되어 묘한 ‘공생관계’에 있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우울한 풍경이 날마다 이어지고 있다.
그 오염실태가 가장 심각한 곳이 정치뉴스이며 정치권이다. 5년마다 돌아오는 대선판이라서 더욱 그러하다. 으레 그려러니 체념하는 상황이 더 화가 난다. 공짜는 양잿물도 먹는다, 라고 하지만 일주일에 하루쯤은 뉴스는 물론이고 어떤 동영상도 보지 않는, 인터넷 없는 날을 지정해야 할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이런 흐름은 아주 낯선 풍경은 아니거니와 거슬러 오르면 여기에도 그 나름의 역사가 있다. 고대 그리스 희극시인으로 정치색 짙은 작품을 쓴 아리스토파네스의 대표작을 떠올리게 된다. 배경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농지가 황폐해지자 고통받는 농민들은(농업국가인 스파르테 진영는 말할 것도 없고 전쟁의 다른 축인 아테나이의 상당수 농민들도 가세, 후자의 입장 반영이 우선이라고 보아야) 평화를 주장하고, 수공업자에서 벼락출세한 선동정치가들은 전쟁을 옹호하는 등 또 하나의 전쟁이 그리스 전역과 식민시에서 진행되던 때이다.
<구름>(Nephelai/ 라Nubes) 천병희 원전번역 『아리스토파네스 희극전집』(전2권) 중 1권에 첫 번째로 소개되는 작품이다(소설의 첫 문장이 중요하듯, 맨 앞에 수록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아리스토파네스가 썼다는 희극 44편 가운데 11편이 전해지고 있는데, 전집은 현존하는 11편을 완역한 것.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아테나의 패색이 짙어지자 민심은 동요하고 새로운 질서와 신학문이 등장하며 안정적이고 도덕적이던 아테네는 급변하고 있다. 이런 흐름에 보수적인 아리스토파네스는 소피스트들의 신식교육을 비롯해 자신이 생각하기에 공동체에 유해한 사실(현상)을 거침없이 비판하고 사람들까지도 실명으로 등장시켜 매섭게 비판하고 조롱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심지어, 그 도마에는 철학자 소크라테스도 올라 무참한 조롱거리가 되고 있다.
<구름(BC 422)>에서 소크라테스는 당대에도 후대에도 인정받는 위대한 철학자가 결코 아니다. 돈만 주면 무엇이든 하는, 말장난으로 옳은 것(정론)과 그른 것(사론)을 마음대로 뒤집는 방법을 전수하는 사이비 스승으로 그렇고 그런 소피스트 중 하나일 뿐만 아니라, 그런 부류의 대표주자이다. 플라톤이 빚어낸 숱한 대화편들 곳곳에서 그렇게 소피스트를 맹렬하게 비판하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떠올린다면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날마다 빈둥거리며 살아가는 아들 때문에 막대한 빚을 진 주인공 남자(스트렙시아데스)는 아들이 전차경주에서 진 빚을 떼어먹을 방법을 궁리하다가 소크라테스에게 보내 교묘한 논리와 말솜씨를 배워오게 한다. 그렇게 하여 채권자들을 따돌리고 돈을 갚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된 것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그 아들이 이번엔 아버지를 두들겨 패고는 소크라테스에게 배운 논리로 자신이 정당함을 입증한다. 훗날 소크라테스가 재판에 회부될 때(<소크라테스의 변론>) 죄목 중 하나가 아테네의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것인데, 이 작품이 그 근거로 제시된다.
스트렙시아데스: 사람들이 말하기를, 저기 저 자들에게는 매사에
정론과 사론의 두 가지 논리가 있대.
그리고 그중 하나인 사론은
아무리 나빠도 소송에서는 반드시 이긴대,
네가 그 사론을 배우면,
지금까지 너 때문에 진 빚을 나는
누구에게나 한 푼도 안 갚아도 되는 거야.(23면, <구름> 112~118행)
이런 설정이다. 플라톤과 다른 견해를 피력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 『수사학/시학』(천병희 옮김, 숲)에서 변론에서 이기는 기술(방법)을 기술하였는데, 아르스토파네스가 <구름>에서 비판한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법기술’을 학문 영역에 편입시킨 것이다. 상당히 흥행하고 요즘은 넷플릭스에서 서비스 중인 드라마 <로스쿨>에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중범죄를 지은 죄인이라도 변호를 받을 권리가 있음을 드라마 안에서 실제로 보여준다. 의뢰인과 관련된 정보를 보호해야 한다는, 직업윤리 때문에 피해자나 그를 동정하는 입장에서는 용서하기 힘들지라도, 가해자인 의뢰인을 위한 변론을 해야 하는 것.
상황은 이렇다. 하지만, ‘A는 B’라는 악의적인 프레임을 만들어놓고, 사실과 거짓을 버무리고, 악의적인 편집을 하고, 가짜(사론)를 진짜(정론)로 만드는 기사들을 읽노라면 토가 나올 지경이다. ‘기레기’라는 말이 세월호 침몰 사건 즈음에 등장했다는 것을 상기한다. 어린이들에게, 아니 자신의 자식들에게 읽힐 수 있는 그런 기사를 써야 하는 것 아닐까? 너무 순진한 생각인가? 초등학교 앞 사거리 횡단보도 앞에서 추위에 떨면서 빨간 불을 바라보며 스친 생각들을 정리해보았다.